brunch

사랑의 이해

by 양이

어떤 애와 연애를 끝내기로 한 후, 이런 얼굴론 도저히 밖에 나갈 수 없다는 내 말에 진이는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반을 걸려 우리 집에 왔다. 이미 충분히 울어서 더는 눈물이 안 나올 것 같은 나는 진이가 오기 전에 세수를 하고, 최대한 단정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너무 주책맞은 사람처럼 울진 말아야지. 그러나 현관문이 열리고 진이의 얼굴이 보이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세상이 무너진 사람처럼 와락 눈물을 터트렸다.


진이는 "아이고~" 같은 짧은 탄식을 내뱉더니 "이리 와."하고 나를 꼭 안아주었다. 왜 사람은 안기는 순간 아이 같은 기분이 되어 버리는 걸까. 나는 그대로 진이에게 안겨서 엉엉 울었다.


왜 헤어졌고, 어쨌고 같은 그동안 누구와 헤어질 때마다 해왔던 구구절절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자 나는 진이에게 말했다.


"있잖아. 내가 나로서는 영영 사랑받지 못하는 기분이야."


내가 동네방네 헤어졌다고 징징댄 탓에 내일은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니모가 회사 앞으로 나를 데리러 온다는 이야기를 한 후였다. 그 다음 날에는 친구인 윤을 만나기로 했다. 진이는 내 이야기를 듣더니 나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다들 너를 걱정하느라 시간을 쓰고 있어. 그 사람들은 너를 사랑하는 게 아니야?"


나는 순간 나를 위해 늘 놀랄 만큼 사랑을 보여주는 진이에게 미안해져서, 나에게 준 사랑을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 게 얘를 상처입혔을까 봐 뭐에 찔린 사람처럼 다급하게 말했다.


"미안해...."


"그냥 속상해 네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데. 너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가 또다시 심란한 얼굴로 물었다.


"근데 있잖아. 얘처럼 좋아하는 사람을 앞으로 만나지 못하면 어쩌지."


"아람아. 내가 기억한단다. 너는 지난번 연애 때도 그렇게 말했단다."


그러더니 진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아니, 근데 어떻게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쉴 새 없이 울 수가 있지."


나도 이미 흐물흐물해진 눈을 닦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그건 신기해하는 중."


하염없이 울다가도 진이랑 얘기하다 보면 가끔은 웃음이 났다. 그 순간 뭔가 내 마음속에 단단한 무기가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절대적으로 잃어버리지 않는 사랑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진이가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만큼은 절대로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어떤 연애가 끝나도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리라고 생각하지만, 얘와 헤어지면 영영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굴며 살 것 같았다. 그건 너무 나에게 치명적이어서, 조금 더 기운을 내며 제대로 살아야지 같은 다짐을 하게 된다. 언제나 나를 미래 쪽으로 움직이게 하는 건 때론 나보다도 더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는 것 같은 진이의 마음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알게 된 지 1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진이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언젠가는 스스로도 '이건 제법 좀 한심한걸.' 같은 일을 고백하면서 진이에게 나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술에 취해 말도 안되는 문장을 반복해 보내는 내게 진이는 말했다.


KakaoTalk_20250306_172420006.jpg


"원래 친구는 서로 미안해하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했다가 그걸 다 잊을 만큼 좋아하고 그렇게 서로 빚지고 갚고 하면서 지내는 거니까 그런것 보단 늘 너를 최우선으로 생각해. 그니까 어떻게 하면 너 스스로가 덜 힘들고 덜 괴롭고 더 행복할까를 먼저 생각해. 난 걍 너가 행복하면 돼~~%!!!."


시시때때로 진이를 실망시키지 않을까 고민하지만 그럼에도 내 옆에 진이가 있다는 게 나는 늘 너무 큰 행운이라는 생각을 한다. 연애가 끝날 때마다 알게 되는 건, 결국엔 그 어떤 감정도, 시간도 지나간다는 것이고, 그 '결국'이 되기 전까지 내가 정말 어찌할 수 없이 속수무책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제 정말 3년 동안은 연애 안 할 거야."


내가 무슨 다짐을 내뱉을 때마다 진이는 "나는 안 믿어~ 그래도~ 제발~ 그래줘~"라고 외쳤고 나도 말하면서도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 했다.


누구도 나만큼 나를 무너트릴 수 없었다. 그러니 내가 나를 무너트린 만큼 나는 또 부지런히 나를 돌보야 했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나를 돌보는 것보다 더 나를 돌봐주는 말들이 있어 나는 그럭저럭 또 힘을 낼 수 있었다. 적어도 나의 일부분은 진이의 말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진이의 말이 맞았다. 나는 또 속수무책으로 연애를 했고, 그런 연애가 끝날 때마다 내가 사랑하는 것보다 사랑받는 것에 무능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나를 이렇게나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시시때때로 진이가 해준 말들을 물끄러미 떠올린다. 진이 같은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나인 게 조금 괜찮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편지의 미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