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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 목소리가 들리나요?

고요하고 덥고, 높은 기온이 소리를 모두 녹였을지도 모른다는.

by 코코넛


일기예보에서 보여주는 기온의 숫자와

체감하는 숫자의 차이를 오롯이 드러낸

한낮에, 대기의 파노라마는

소리까지 모두 흡수한 듯

사방이 고요해서 마치 깊은 산속,

절간의 기도 장소에 머무는 같다.


벽에 귀를 대고

벽 너머의 소리를 들어보고 싶은 생각을 가졌었던

그런 종류의 호기심은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일까?


어린 시절엔 호기심이 많았었다.

생각해 보니 호기심을 잠시도 내려놓지 않았으므로

마음이 바빴었다.

나를 에워싼 공간의 모든 게 속삭였으므로

잠이 든 상태에서도 꿈으로 듣고, 보고 했었다.




명절이나 부모님의 생신 때,

친척들이 우리 집에 오셔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가셨는데,

인원이 늘어나서 집안 전체가 복작대도 내 방은 고요했다.


그 이유가 이모와 삼촌을 비롯한 친척분 중

아무도 내 방에서

잠을 청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척분들의 말을 빌리면

내 방은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방>이라고 표현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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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들어가던 해부터 독방을 쓰기 시작했는데,

내 방에는 책상과 책꽂이 있는 벽면을 제외하고

한 면에는 괴목과 돌

<주말에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모았던 전리품들이다>을

수집해 차곡차곡 쌓았고,

또 한 면은 아그리파와 줄리앙, 세네카의 석고상까지 있으니

내 방이 그분들의 말마따나

귀신이 나올 법한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방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어렸을 때부터 사람에 대한 호기심보다

자연의 형태와 색에 대한 호기심이 더 많았다.

그 많던 호기심이 거친 세상과 마주한 이후부터

하나, 둘 어디론가 가버렸지만,

질문은 아직 산재해 있으므로

성장이 아직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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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여쭤보고 싶어요.

어린 시절이 정말 그렇게 멀게 느껴지시나요?

어머니 무릎에 앉아 있을 때가 아주 오래전 일 같으세요?>

부드러워진 그의 태도에 응하여 로리 씨가 이렇게 대답했다.

<이십 년 전에는 그랬는데 이제 와 서 보니 그렇지 않아.

점점 끝이 가까워지니까,

둥글게 여행해서 점점 시작으로 가까이 가는 것 같네.

그게 아마 부드럽게 위로하고 준비하는 방법의 하나인가 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수많은 추억이 이제 내 마음을 건드려.

예쁘고 젊은 내 어머니와 우리가 세상이라 부르는 것이

아직은 현실로 다가오지 않고

내 허물도 아직 확실하지 않을 때의 기억들 말이야.>“


-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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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건조할수록 어렸을 때의 기억이

똑똑 문을 두드리는 것일까?

정신없이 바쁠 때는

기억나지 않아서 모두 지워진 기억이라 여겼었는데

어느 틈에 찰스 디킨스의 문장에서처럼

어렸을 때의 기억이 마음을 건드린다.


기억이 마술 같다는 생각이 떠올라서

독일의 사진작가이자 미술사학자, 비평가였던 <프란츠.로>가

1920년 이후에 등장한

사실적이고 몽환적인 그림을 지칭하기 위해 만든 용어인

<마술적 리얼리즘> 작가 중 한 명인

조지 투커의 <목소리>라는 그림을 감상했다.




나를 에워싼 공간의 사면이 모두 벽면이고 혼자 있을 때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까지 이어지면

조지 투커의 그림처럼

누군가와 절실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상대의 말에 귀 기울이고 싶은 생각에

벽 너머에 마치 사람이 있어서 말을 건네는 듯한 환영?.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는

체험까지 완비하는 극한 고요함?


<사실, 이런 고요는 아직 체험하지 못한 초현실적인 분위기 즉 상상일 뿐이다>


조지 투커는 중세 이후 화가들로부터 외면당한 재료인

에그 템페라로 그림을 그린

미국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이끈 화가다.

물성이 주는 느낌을 느끼고 싶은 작품이라

책에 실린 그림이 아닌

벽에 걸려있는 실물을 꼭 접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는 그러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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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우리를 요란하게 스쳐 간다.

구름이 우리를 지나쳐 흘러간다.

달이 우리 뒤에서 잔다.

짐승 같은 밤이 온통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그 외엔 아무것도 우리를 따라오지 않고 있다. “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발췌


초록빛이 조금씩 다른 빛을 찾아가는 걸 바라보는 계절이다.

나도 나와 다른 빛을 찾아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

물들이고, 물들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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