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지 Dec 29. 2019

#1 _그렇게 꿈꾸던 공간이 생겼습니다. "덜컥"

생각의 씨앗은 한 번 심어져 버리면 돌이킬 수가 없어요. 

#생각의 씨앗

한창 진로에 고민을 하던 시기가 있었다.  거의 즉흥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는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가지만, 여하튼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모든 사람에게 조언을 듣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당시 나의 고민거리는 안정적인 직장과 자유로운 삶 사이에서의 갈등이었다.  많은 사람들을 찾아가 내 고민들을 늘어놓고는 했었는데, 모든 조언들이 내 선택에 많은 영향을 주었지만, 유독 한 선배의 '씨앗'에 대한 비유가 지금까지 생각난다. 



생각은 씨앗이랑 같아서. 한번 심어져 버리면, 돌이킬 수가 없어. 
네가 자유롭게 뭔가를 하고 싶다면, 네가 당장에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넌 언젠가 그 길로 들어설 거야.
아니면, 최소한 그 길을 너무나 갈망하겠지



마음 깊숙이 자리 잡은 생각의 씨앗은 빼내기가 쉽지 않다. 


듣고 싶은 말을 들어서 그랬던 것일까? 

주변의 사례와 현실적인 문제들을 수차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내 뜻대로 안 하면 몸이 근질근질할 것이다"라는 이 선배의 허무맹랑한 조언에 홀딱 반해버렸다. 


그리고 이 '생각의 씨앗'은 좋은 합리화 수단이 되어 나의 크고 많은 작은 결정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2019년의 마지막 달에는 기어코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감히 내가 - 말이 좋아서 프리랜서이지, 백수인 내가 -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통 건물을 떡 하고 계약한 것이다.  그렇게 건물주 입성이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다달이 수백씩 내는 '월세 세입자'가 되었으니 오히려 떨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2019년 12월 1일.  그렇게 갑자기, 

서울 마포구 망원동 3층짜리 커다란 노란 집의 세입자가 되었다.  

이 노란 집의 1층은 내가 머무는 곳이고, 2층은 나의 소품샵이자 작은 작업실이며, 3층은 방 6개의 작은 숙박업소이다.  결국 연말에 갑자기 통 큰 계약을 한 나는, 졸지에 소품샵 사장님이자 숙박업소 사장님이 되었다. 


물론 이 선택이 아주 생소하고 낯선 결정은 아니었다.  나는 지난 몇 달간 미니호텔이자 소품샵 역할을 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을 계속 찾았었고, 여러 집들이 후보가 되었다가 사라지곤 했다.  단지, 채 두 달이 되지 않는 그 짧은 기간만에 덜컥 내 공간을 갖게 될 줄은 나도, 내 주변 지인들도 상상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게 덜컥 계약한 망원동 노란 집. 대애충 요렇게 생겼다. 




#2 생각의 씨앗이 심어져 버려서

사실 이 모든 해프닝은 불과 몇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언젠가 친구들을 내 에어비앤비에 초대해 조촐한 파티를 한 적이 있었다. 다들 내가 에어비앤비를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초대한 것은 처음이었다.  친구들은 내 작은 사업장(?)을 진심으로 좋아해 주었고, 우스갯소리로 이런 얘기를 전했다. 


"영지, 이러다가 숙박업계의 큰 손이 되는 거 아냐. 


그때는 그 말이 정말 농담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내게 에어비앤비는 "부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고,  불안정한 삶에 한줄기 빛 같은 나의 최저 생계수단에 불과했으니까. 




그런데 정말 의외의 곳에서 사건은 터지고 말았다. 어찌 됐건 '훌륭한 디자이너'가 되려고 했던 나는 - 주야 불문 적당한 작업실을 찾기 위해 계속 부동산을 드나들었다.  그러다 친해진 부동산 중개업자에게 정말 특이한 사무실을 소개받았는데,  건물의 3층은 사무실이고 4층과 5층은 일반 주택인데 그것이 모두 복층으로 이어진 구조 었다.  위치는 내가 생활하는 모든 것들이 있는 곳이었고,  빛도 잘 들어오며 옥상까지 쓸 수 있었다.   



한눈에 쏙 반했던 4층 올라가는 계단. 


비록 월세가 저렴하지 않았지만,  주택으로 사용 가능한 4층과 5층에 게스트하우스를 한다면 충분히 월세를 뽑고도 남을 것 같았다.   완전한 통 건물은 아니지만, 최소한 세 개의 층을 쓰니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도 더 많았다.  작업실 공간을 진짜 호텔처럼 로비로 쓴다던가.. 내가 같이 살면서 아침밥을 제공한다던가.. 투숙객들을 대상으로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어레인지 한다던가.. 디자인과 숙박업을 접목한 너무나 재밌는 아이디어들이 샘솟았다. 


하지만 난생처음 내는 어마어마한 월세와 그때 당시 너무나도 바빴던 프로젝트 때문에 결국 그 집은 마음에서 접었다. 아직 이 집은 내 것이 아니요- 하고 말이다.  (그때 당시에 쓴 글도 있다. 클릭) 그러나 되려, 그렇게 마음을 접고 나니 안에서 더욱 강렬하게 끓어오르는 것이 있지 않겠는가. 


1층에 내 작업실 겸 쇼룸. 
2층에 작은 부티크 숙소. 
3층에 내 방. 

가끔 투숙객들을 대상으로 한 이벤트들을 1층 작업실에서 기획하기. 
투숙객의 이야기들과, 내가 운영하면서 겪는 다양한 해프닝들로 글 쓰기. 
전부터 준비하던 작은 소품 가게의 쇼룸을 1층 작업실에서 운영하며 그것들로 집 전체를 잘 꾸며놓기. 


머릿속에 휙휙 떠오르는 것들만으로도 종이 한장은 가득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려움과 설렘의 비중이 9:1에서 7:3으로.. 그리고 점차 4:6으로 변하고 있었다. 

열심히 머릿속에서 행복 회로를 돌리다가 '아차! ' 싶었다.  어처구니없는 씨앗은 심지 않기로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갑자기 부티크 숙소라니. 하지만 생각은 심어져 버렸고, 조용히 혼자 되뇔 뿐이었다. 



1층에는 내 작업실과 쇼룸을,
그리고 2-3층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운 숙소를 운영해야지.




#3 우연의 우연의 우연

아 물론, 씨앗이 심어져 있다고 해서 당장에 할 것은 아니었다. 프로젝트도 바빴고, 여유자금도 없었다.  일도, 에어비앤비 운영도 뭐든 것이 안정적으로 흐르던 어느 날 - 사달이 나버렸다. 


그 사달은 집주인에게서 온 다급한 전화로 시작되었다.  아니 그런데, 왜 그런 전화 있지 않은가.  앞 뒤 내용도 모르는데 왠지 받기가 싫은..  그래서 있지도 않은 미팅을 핑계로, 전화를 거부하고 문자로 답했다. 


평소에는 꽤나 느렸던 집주인의 문자가 3초 만에 회신이 왔다. 

"만나서 할 얘기입니다. 언제 시간이 되시죠?" 


그때서야, 아 이거 뭔 일 났구나 하고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5분 정도의 집주인의 항변과, 나의 의미 없는 투정이 이어진 후에야 전화는 끊어졌다. 


... 내용은 이랬다. 

나의 에어비앤비가 있던 월세방이 있던 건물이 통째로 팔렸고, 

새 집주인은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올해 안에 그 집을 비워야 했다.  


집이야 그냥 구하면 되는 것 아니겠냐만은, 이 바쁜 와중에 언제 집을 또 구하지 하며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집은,  내가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던 집이었다.  머릿속의 계산기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 집을 운영하면서 매달 들어왔던 매출이 계산되고,  동시에 그 생활비를 메우기 위해 내가 무슨 일을 더 해야지 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집을 꾸미는 데 들였던 돈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 남은 가구들은 어떻게 처리하지?  아니 이렇게 잘 꾸며놨는데, 이걸 다 헐어버리겠다고?  예약을 막아두고 친구들과 연말 파티를 하려 했는데, 연말 계획은 갑자기 "이주 계획"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쫓겨나야 했던 나의 첫 에어비앤비



"아.. 네, 일단 알겠습니다." 

머릿속은 너무나 복잡했지만, 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았다. 집주인은 법대로 나에게 몇 달의 시간은 주었고, 이사비 지원과 언제든지 보증금 반환 등 - 그가 집주인으로서 해줄 수 있는 모든 예우는 갖추었다. 그냥 나만 마음을 잘 정리하면 되는 문제 었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이주할 집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비슷한 조건의 집 중에 마음에 쏙 드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장장 하루에 9시간, 집만 매일 열몇 채를 보며 찾아다녔지만 적당한 집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 었다.   위치와 집 상태가 좋으면 권리금이 너무 비쌌고, 권리금이 없는 집들은 딱 봐도 공사비만 어마 무지하게 들 것 같았다.  집을 팔 거였으면서도 얘기해주지 않은 집주인이 원망스럽고, 도대체 30억이나 되던 그 건물 전체를 다 산 새 주인은 뭐하는 사람인가 싶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온갖 부동산 사이트와 플랫폼을 뒤지던 차에 정말 사람들이 잘 쓰지도 않는 플랫폼에 올라온 글을 보았다. 



"급매. 저렴하게 양도"


당장 연락을 해 집을 보러 갔다.  집은 햇볕이 잘 드는 3층짜리 주택으로, 마당이 있고 옥상이 있었다.  이전의 주인 역시 그곳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하고 있었으나, 사정이 있어 급하게 양도한다고 했다.  집은 수리할 곳이 많았지만 최소한의 설비는 모두 갖추고 있었고, 이전에 보았던 집처럼 사무실 공간과 주택공간이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널찍한 거실을 잘만 꾸미면 충분히 내 작업실처럼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월세는 저렴하지 않았지만, 방 크기, 개수 등으로 계산하면 확실히 저렴한 것은 맞았다.   마침내 프로젝트도 거의 마무리가 되어 이 공간들을 어떻게 활용하고 기획할지 구상할 시간도 충분히 되었다.


급매에 무권리로 나왔던 망원동 노란 집. 이전 주인이 운영할 때의 모습이다. 



하지만 마음에 쏙 든다고 해서 일사천리로 될 규모의 일은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돈'이었다.  사실 월세는, 운영을 하다 보면 메울 수 있다. 하지만 이 어마어마한 보증금을 어디서  마련해야 할지 숨부터 턱 막혔다. 게다가 이 집의 급매의 조건은 2-3일 내에 보증금을 마련해주는 조건이었다.  내가 모아놓은 돈들을 다 긁어모으고, 적금을 깨는데도 부족했다.  그때 한 가지 떠오른 것이 있었다. 


"아. 나 집에서 쫓겨나면서, 보증금 언제든지 돌려준다고 했지. "

바로 집주인에게 연락을 해 아직 짐을 빼기 전인데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냐고 물었다. 집주인은 당연히 가능하다고 얘기해주며 흔쾌히 다음날 내 모든 보증금을 돌려주었다. 여기에 조금의 대출을 받으니 이 집을 계약할 수 있는 금액이 만들어졌다. 


그다음으로는 이 일을 혼자 할 수 있을지 덜컥 겁이 났다. 

누구보다 열심히 내 에어비앤비를 관리해주고 있던 매니저 아르바이트생에게 연락해, '내가 이렇게 갑자기 큰 일을 내어도 나와 계속 같이 일하겠냐'라고 물었다.  내 매니저 아르바이트생은 외국인 친구인데, 사실 내년 봄에 모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그 친구가 나와 계속 함께 해줄지가 참 걱정이었다.  그런데 그 매니저 친구는 웬 뚱딴지같은 답변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고민이 될 때는, 사실 점을 봐야 해.
어차피 계획대로 되는 것 없으니까 - 
잘되면 '운명이었구나!'라고 하고 
안되면 '에잇! 이런 돌팔이 운세!' 하거든. 




그래서 그 얘기를 듣자마자 운세 어플로 오늘의 점을 봤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운세가 지금 상황과 너무 딱 들어맞아 우습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그 얘기를 전했더니 매니저 친구가 깔깔깔 하며 얘기했다. 



평소에 잘 믿지 않는 운세 어플은, 그 날따라 신뢰도 100%이다. 


"고 하자 고! 난 너랑 일하면 너무 재밌어. 네가 자꾸 재밌는 일을 벌이거든!
게다가, 진짜 안 믿기겠지만, 
- 나도 그제 조금 사정이 생겨서 한국에 더 오래 있어야 되거든. 최소한 내년 말까지.  너 집이 될 운명이었나 보다. 아직까지는 말이야! " 




갑자기 원래 운영하던 곳에서 쫓겨나고, 정말 우연히 집을 찾게 되었으며 때마침 매니저 친구도 한국에 더 있어야 했다.  내가 프로젝트에 치여 '방학'이라고 기간을 정해두고 더 이상 프로젝트를 안 받았기 때문에 새 집을 가꿀 여력도 생겼다.  갑자기 아다리가 딱딱 맞아떨어진 이 상황을 두고 나 스스로 "우주의 기운"을 받았다고 합리화해버렸다. 


결국 그렇게 갑자기 심어져 버린 작은 씨앗은, 

우연의 우연이 겹쳐 덜컥 싹을 틔워버린 것이다.  망원동의 노란 집 계약을 통해서 말이다. 





그리고 2019년의 마지막 주말인 오늘. 

나는 일요일 아침부터 부랴부랴 망원동 노란 집으로 출근하여 숙소를 깨끗이 청소하고 게스트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준비를 마친 후에는 작업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내일 있을 소품샵 제품 촬영을 어떻게 진행할지 조금 더 구상해보았다. 


망원동 노란집 안의 모습들. 매일같이 쓸고 닦는다.



내게 심어졌던 작은 씨앗은 그렇게 싹을 틔운 것이다. 

씨앗이 심어졌던 그 어처구니없던 상황만큼, 어처구니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이 싹이 쑥쑥 자라 정말 무성한 나무가 될지, 아니면 조금 자라다가 금세 시들어 버릴지는 나도, 그 어느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이 망원동 노란집에서, 아직은 미숙하지만 내 씨앗은 작게 싹을 틔웠고, 나는 기왕 싹을 틔운 것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또 언젠가 그 싹이 자라면서, 또다른 생각의 씨앗을 툭 하고 떨어뜨릴 것이다. 

그러면 그때되서 나는 또 새로운 꿈을 꾸며 싹을 틔울 날을 기다리겠지. 





1화 : 그렇게 큰 집을 계약해버렸습니다. 

-마침- 




<망원동 노란 집 이야기>에 대해.. 

누구나 한번쯤 자신만의 공간을 꿈꿉니다.   여기, 그 꿈을 조금 '덜컥' 이뤄버린 글쓴이가 있습니다. 

'망원동 노란 집'은 글쓴이가 항상 꿈꿔오던 작은 공간으로,  1층에는 작업실과 소품샵의 쇼룸이, 그리고 2층에는 방 6개짜리 작은 숙박업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시리즈에서는 - 숙박업도, 유통업도, 심지어 디자이너 프리랜서도 다 처음인 글쓴이가, 이 노란 집에서 지내며 자신의 일과 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더불어 미숙하지만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자신의 창업일지를 통해, '자신만의 공간'을 꿈꾸고 있는 모두를 응원하고자 합니다. 


매거진을 구독하셔도 좋고, 브런치를 구독하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https://docs.google.com/forms/d/19_tW8euLdEGyLWlmjKi1JYVagh1pECWmAZ3egjBqmnk/edit 

위 폼에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매주 <어려서 그렇습니다> 시리즈와 함께 글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글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글쓴이 김영지 올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