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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때로 Oct 14. 2021

찜질방 계란

뜨거운 온도와 높은 압력의 마법

 결국 압력솥을 샀다. 둘째 이유식을 앞두고 내린 중대한 결정이었다. 37세, 5세, 1세의 수준별 맞춤 식사를 제공하려니 우리 집 어른 밥솥 한 개로는 버거웠달까. 그리고 2인용 압력솥.. 이거 너무 작고 귀엽잖아? 결제하기 꾹. 비밀번호 꾹.


"한 두 번 써보다가 아예 안 쓰는 거 아니야?" 

나의 구매 결정에 남편이 미심쩍은 시선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남편은 11년 동안이나 나의 냄비 같은 호기심과 실험정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저것 말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가뜩이나 아이들로 집안일이 많은데 할 일이 더 쌓일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그런 남편에게 나는

"아니? 이거는 냄비 같은 거야~ 여기저기 활용도가 높다고!"

"이유식 할 때도 영양소가 덜 파괴된대." 

"아침에 숭늉으로 활용하면 좋잖아~." 

"갈비도 금방 된대." 

라며 압력솥으로 풍성해질 우리 집 식탁의 맛과 영양소를 강조하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조할수록 남편은 더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 친구가 그냥 써보고 싶어서 사는구나..' 어쨌거나 저쨌거나 우리 집의 새로운 식구 압력솥은 택배 상자를 타고 자신의 주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통상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조건이 있다.

 '1 기압 (760mmHg)에서'

1 기압이 아닌 조건이라면 물은 몇 도에서 끓을까? 위 그래프를 보자. 기압이 세로축, 끓는 온도가 가로축이다. 그리고 가운데 아름다운 곡선은 수많은 점들의 집합이다. 곡선 위에 점 하나를 찍자. 내가 찍은 별점의 위치 좌표는 (77, 300)이다. 이건 300mmHg의 기압에서 섭씨 77도에서 물이 끓는다는 의미다. 이처럼 1 기압(760mmHg)에선 물이 100도에서 끓지만, 1 기압보다 낮은 압력에서는 100도 이하에서 물이 끓고, 1 기압보다 높은 압력에서는 100도 이상에서 물이 끓는다. 압력솥을 가열하면 내부 압력이 2 기압 (1580mmHg)까지 올라간다. 이때 물의 끓는점은 121도이다. 그래서 압력솥으로 조리하면 음식이 100도가 아닌 121도에서 익혀진다. 그리고 압력솥에 갇힌 수증기들이 고루고루 음식에 침투해서 음식이 부드러워지고, 빨리 익게 된다. 맙소사.. 이렇게 써놓고 보니 어지러운 고등학교 화학 교과서처럼 느껴지지만 간단하게 요약하자,

압력솥! 121도! 




빠른 배송 덕에 압력솥은 정확히 다다음날 우리 집으로 왔다. 택배 상자를 뜯고 설명서를 본다. [뚜껑을 여는 법, 닫는 법]이 눈에 띈다. 오 마이 갓.. 이것부터 배워야 하는 거야? 뚜껑 닫는 것부터 시도해본다. 패킹을 끼우고  딸깍 소리가 날 때까지 돌리면 된다는데, 이게.. 안된다? 왜 이러지? 뚜껑과 씨름하기를 몇 분...

'딸깍'

아, 뚜껑을 위에서 아래로 꾹 누르고 돌렸어야 했다. '압력'솥이라 뚜껑도 꾹 '압력'을 주며 눌러야 하는 거였다. 휴.. 1분만 더 씨름했다면 서비스센터에 전화해서 하소연 상소연할 뻔했다.

당장 사용해보기로 한다. 첫 실험은 아니, 첫 요리는 예전부터 생각해둔 찜질방 계란. 완전식품이면서, 간식으로도 손색없는 아이. 착한 간식 찜질방 계란을 만들어보자.


1. 계란을 깨지지 않게 쌓는다.
2. 물은 계란이 잠길 정도로만 넣고 소금을 2큰술 넣는다.
3. 뚜껑 닫고 강불 켠다. 추가 돌아가면 약불로 줄인다.


치치 치치.


4.  40분 후에 불을 껐다. 서서히 뜸 들이며 압력이 빠지길 기다린다. 밥솥의 열기가 식으며 압력도 내려간다. 위로 불끈 솟아있던 압력밸브가 툭하고 내려앉으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연다. 

깨진 계란 껍데기 사이로 갈색 속이 보인다. 안 깨진 달걀들도 보인다. 고소한 성공 냄새가 솔솔 난다.

그중 예쁜 것만 골라서 비닐봉지에 예쁘게 담는다. 오늘 이 계란을 시식할 영광의 주인공은 옆집 아기 엄마. 중고거래로 알게 된 친구다. 첫째 아이도 비슷하게 낳고, 둘째 아이도 비슷하게 낳은 동지. 인심 좋은 친구이기에 맨날 받기만 해서 미안했는데, 오늘은 내가 "이거 같이 먹자~" 하고 문을 두드릴 생각이다. 별거 아닌데도 선물 줄 생각에 든든해지는 내 마음..

 

"이거 어떻게 만들어?"

 친구가 물었다. 앗싸!  주부가 어떻게 만들었는지 물어본다면, 이건 아주 맛있다는 뜻이다. 아기들도 마음에 드는지 입을 쩍 벌려 받아먹는다. 고객님들이 만족하니 내가 더 감동이다.

'잘 샀네, 잘 샀어. 다음엔 압력솥으로 뭘 할까? 갈비찜? 닭백숙?'

다음에 도전할 두 번째 실험, 아니 두 번째 메뉴를 생각하며 나도 한 입 베어 문다. 어쩜 이렇게 탱글한지!


뜨겁고 무거운 압력솥에서 계란은 터지지 않고 오히려 깊은 맛을 냈다. 엄마가 된 후로, 나의 삶도 압력솥처럼 무겁게도 뜨겁게도 변했는데... 내 마음 속 계란은 지금 어떤 상태일까? 탱글탱글 잘 익어가고 있을까? 

인생의 지혜와 단단한 마음은 결코 쉬이 만들어지지 않으니 좀 더 기다려보기로 한다. 치치치치. 치치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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