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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Feb 09. 2019

남자들 이야기에 귀기울인 결과가 고작 '우유 당번'?

'페미니즘을 없애자'는 20대 남성들의 목소리, '듣기'만 해서는 곤란해

'억울한', '역차별당한다고 느끼는' 20대 남성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중앙일보>가 인서울 남자 대학생 6명을 인터뷰하고, 민주당 표창원 의원이 지난달 30일 '20대 남성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는 간담회를 연 게 대표적이다. 


결과는 형편 없었다. 중앙일보 기사는 우유 당번을 더 했다는 대학생의 발언 등이 역차별의 근거로 제시되면서 기사 전체가 웃음거리가 됐다. 간담회는 참석자들의 거센 항의와 표 의원의 '이해해달라'만 반복된, 생산성 없는 행사였다고 전해진다.


사실 당연한 결과다. '어떻게 들을지', '무엇을 들을지' 고민하지 않고 무조건 귀만 갖다 댔기 때문이다. 사회적 의미에서 귀기울여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듣는 행위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집단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궁극적으로 '응답해주기' 위한 준비다. 어디선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목적을 갖고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몇년간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는 성폭력-성차별 문제의 공론화와 관련 법 제정, 남성중심사회의 병폐를 견제하는 '제도와 문화의 형성'이라는 '응답'으로 돌아왔다. 그렇다면 20대 남성들의 억울하다는 목소리는 대체 어떤 응답을 받게 될까. 아무리 상상해봐도 이 응답이 무엇일지 잘 떠오르지 않는 건 나뿐일까.


"남자니까 기득권 취급을 받는다."

"초등학교 때 우유 당번등 궂은 일은 남자가 많이 했다."

"사회에 20대 남성을 보호해주는 시스템이 없다고 느낀다."

"(한국 남성 절반이 성매매) 이런 통계를 만드는것 자체가 남성을 공격하기 위한 의도 아닌가."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을 조롱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중앙일보가 실은 20대 남성들의 역차별 주장들이다.  사실 10년~20년 전에도 남자들은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살았다. 군 가산점이 폐지됐을 때도, 부산대 페미니즘 웹진 <월장>사건 때도, '된장녀'라는 말을 만들어낼 때도, 남성연대가 만들어졌을 때도 '여성상위시대'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왜 유독 최근에 이 주장들이 힘을 얻고 눈에 띄는 것일까. 남성들이 딱히 예전보다 더 손해를 보거나, 더 불행해져서? 아니다. 페미니즘의 힘이 강해져서다. 


사실 여성들이 우유 당번을 안 했던 것도 아니다.


'여성혐오'와 역차별론의 확산을 가난한 20대 남성들의 분노에서 기인한 것으로 치부하는 시선이 많다. 그렇다면 비교적 사정이 좋은 명문대의 단톡방, 대기업의 블라인드에서는 왜 그렇게 안티페미니즘 정서가 강할까. 핵심이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페미니즘 확산에 대한 거부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 계층만을 경유하는 게 아니라, '남성들의 유대'를 형성해주는 주류 남성문화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페미니즘의 확산이 여성을 우대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공정함'을 망친다고 믿고 있다.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들은 무엇인가를 빼앗기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 여성할당제를 없애달라고 하고, 팩트와 통계를 무시하면서까지 '역차별받는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들이 듣고싶은 응답은 딱 한가지다. "페미니즘을 없애주세요." 


'2030 남성이 이 시대 최고의 약자'라고 외치는 하태경 의원도 그 정도까지 응답해주긴 어려울 것이다. (그는 여성우대법(?)에 일몰시한을 넣겠다고 주장했으나, KBS 취재결과 어퍼머티브 액션을 명시해놓은 몇 안되는 법들은 '양성평등 조항'이거나 원론적인 내용을 담은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남성들은 여성들이 '고통 전시'를 하며 약자인척한다고 이죽댄다. 그래서 남성들도 자신들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대체 저 사례를 고통의 영역에 넣을 수 있을까 싶은 게 대부분이었다. 남성들의 하소연을 여성들이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에 비교해보면, 오히려 누가 사회적 약자인지 명백하게 드러날 뿐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면, 분명 한국에서 젊은 남성들이 고통받는 가장 큰 부분은 군대다.  한국사회에서 남성들이 '남성이기 때문에' 겪는 가장 극심한 폭력이 군대 아닌가. 하지만 그들은 군대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나 보상이 아니라 군대 그 자체가 주는 고통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20대 남성에게 가장 큰 고통은 '군대'지만, 그들은 군 복무 자체의 문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딱 두가지를 꼽자면 1. 남성이 남성에게 가한 폭력이 고통의 원인이 되며, 2. 군대에서의 고통을 말하는 순간 결론이 '군대를 없애자'식의 모병제 주장이나 군대 내 인권 개선 등으로 귀결될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것을 여성도 같이 하자고 말하기도 우스운 일 아닌가. 결국 남성들이 군대에서 겪는 고통은 페미니즘에 대한 반격이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묻히게 되는 셈이다. 


그들이 정말 남성 인권 개선에 대한 절박함이 있었다면, 군대부터 없애야 한다고 광화문 광장에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역차별'을 이야기하는 젊은 남성들은 자신들의 삶이 나아지길 바라는 게 아니다. 그들은 여성들이 그저 '닥치고' 있기를 바란다. "여성들이 약자인 척 하지도 말고, 남성들을 비난하지 말고, 예전처럼 평화롭게 살자"는 것이다. 성차별은 없고, 성폭력은 아주 특이한 일부의 사례일뿐인 그들이 상상하는 세상 속에서 페미니즘은 불공정한 '우월주의'일 뿐이다. 


20대 남성들은 어쩌면 살아오면서 자신들이 기득권을 누렸다고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과거보다 남아선호사상이 사라졌고, '남성만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세상은 지났으니까. 그런데 이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자라왔다고 해서 여성이 약자인, 여성이라서 차별받는 현실은 부정되어야 하는가. 추상적이고 느낌적 느낌에 의존한 남성들의 역차별 사례와 다르게, 여성들이 성별로 인해 겪는 차별, 이로 인해 받게 되는 실존적인 고통은 일상적이며 매우 구체적이다. 누가 누구보고 '망상'이라고 하는가.


남성의 인권이 나아지길 바라는게 아니라, 페미니즘을 말하는 여성의 목소리를 틀어막고 싶은 것이다.


20대 남성들은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싫다고 해서 페미니즘이 없어지진 않는다. 여성들은 절박하다. 계속 목소리를 내며, 자신들이 겪는 부당한 차별과 폭력에 저항할 것이다. 그러므로 '역차별론'을 주장하는 20대 남성에게 '계속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다'며, 이해하고 '우쭈쭈' 해주는 것은 임시 방편이 될 뿐이다. 희망고문이다. 해법이 될 수 없는 것은 물론, 오히려 그들을 도태시키는 꼴밖에 안 된다. 


결국 현재 20대 남성이 겪는 어려움이 또래 여성이나 '페미니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도록 하는 것. 남성들이 인식할 수 없었던 젠더권력과 차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만드는 것이 정답이다. 원론적인 이야기라는 점 잘 안다. 하지만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이해하며 스스로 생각의 타협점을 만드는 것 이외엔, 젠더 갈등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위무'와 '공감'의 탈을 쓴 퇴행과 포퓰리즘이 우려되는 시기다. '남성의 페미니즘 수용'이 대전제로 깔리지 않는 이상, 20대 남성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려는 그 어떤 시도도 전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남성들이 어떻게 성차별 구조를 인식하고 페미니즘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에 모든 사회적 역량을 집중하고, 수많은 방법론과 설득의 포인트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20대 남성은 왜 억울한가: '불공정함'이라는 착시현상>이라는 글과 문제의식이 이어지는 글입니다. 조금 길지만 같이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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