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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Feb 27. 2020

검정치마의 한국대중음악상 수상, 유감을 표합니다

페미니스트들에게 '어퍼컷'을 날리고 싶다는 선정위원

'여성혐오' 논란이 있었던 검정치마의 <THIRSTY> 앨범이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모던록 음반상을 수상했습니다.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혹자는 가사 한 구절, 트랙 하나를 단면적으로 보고 '여성혐오적'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여성이 착취당하거나 대상화되는 이미지가 그려진다고 해서, 그 자체가 '여성혐오'는 아닙니다. 다만 왜 굳이 그런 이미지를 차용했는지에 대해서, 납득할 수 있는 예술작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게 창작자의 책임입니다. 그런데 지금껏 그저  '창작자의 자유' 혹은 '세계관'이라는 명목으로 논란을 빠져나간 예술 작품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1년전에 쓴 제 글 <검정치마 여성혐오 논란의 핵심: '홍대 인디신 남성성'>에 대해서도 많은 분들이 "'사랑에 실패(외도 등)하고 파탄난 남자의 이야기'(3집 파트1과 전혀 다른)를 풍자적으로 그린 것이다"라거나 "과도한 도덕적 잣대"라며 반박해왔습니다. 


그런데 파탄이 난 '남자'는 굳이 왜 여성을 착취(성매매)하는 '개'가 되는 걸까요. 이것은 기존의 마초적 남성성을 답습하는 구도일뿐더러, 화자를 '광견'이라는 표현하는 것이 '풍자'보다는 '자조'에 가깝다는 것은 저의 생각만은 아닐 겁니다.


또한 콘셉트 앨범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전 트랙 '상수역'에서의 찌질함, 혹은 '미완의 사랑'이 광견일기로 이어진다는 점에 더욱 문제적이죠. 쓸쓸하게 자신의 처지를 읊던 사람이 갑자기 '광견'으로 변해서 '사랑 없는 섹스'를 하고 나서 스스로를 자조한다는 이 구도. 이게 어떻게 성적대상화를 조롱하는 곡이 될 수 있나요? 오히려 성적대상화하는 관점을 적극적으로 이용해서 문제인거지. 즉, (사랑하지 않는) 여성은 이 곡에서 남성의 상황이나 감정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에요. 이것이 여성을 올바르게 그리는 방식이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저는 검정치마가 처음 나왔을때부터 그의 음악을 좋아하며 지지하던 팬이었고, 그가 최근의 비판을 받아들이면서 좀 더 진일보한 세계관을 보여줬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한대음은 이 모든 비판을 무위로 돌려버리며, 검정치마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줘버렸습니다. 음악계가 얼마나 현 시대 흐름에 발맞춰가고 있는지 되돌아볼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뒤늦게 김성대 선정위원의 최우수모던록 앨범상 수상평을 보게 됐습니다. 


“특정 이념에 기댄 ‘틀린질문’으로 예술가의 표현할 자유를 농락한 이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판단과 해석의 자유로 이 앨범에 오명과 누명을 덧씌웠다. ‘최우수 모던록 음반’이라는 결과는 조휴일이 한 컷을 가져와 앨범 커버로 쓴 허버트 L. 스트록의 영화와 두 번째 곡 제목으로 쓴 샘 멘데스의 영화는 고사하고 지난 앨범([Team Baby])과 이번 앨범 간, 곡과 곡 사이 맥락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작품을 비난한 모든 이들에게 날리는 시원한 어퍼컷이다.” 


면죄부도 아니고 어퍼컷이었네요. 이 위대한 앨범을 알아보지 못한 ‘특정이념’(페미니즘)을 가진 이들에게 어퍼컷을 날려서 속시원하신가요? 김성대 선정위원이 내심 통쾌해하면서 쓴 앨범 평이 한국대중음악상의 위상을 추락시키고 있다는 것은 아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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