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기 전 베트남에 갔습니다. #59

치유받기와 치유하기

by 영순

아침을 먹고 나와 천천히 시장 거리를 걸었다. 새로운 풍경과 사람들이 내 마음을 조금씩 다시 새롭게 해주고 있었다. 내 마음은 온통, 치유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내가 기꺼이 그러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고통'이 아니라, '치유'에 초점을 맞추기로 의도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스스로 느꼈다.




문득, 두 단어가 떠올랐다. '치유받기'와 '치유하기'. 고통받고 상처받고 쓰러져 있는 우리는 치유를 너무나도 간절히 원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치유받기'가 아닐까. 종교로부터, 타인으로부터, 휴가, 글, 음악, 음식으로부터. 나는 너무 고통스러운 피해자이므로, 당신이 그랬으므로, 나는 힘이 없으므로 '치유받아야' 한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은 나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다. 관심있는 가까운 이들조차도, 잠깐의 관심만 기울일 뿐이다. 어떤때에는 눈빛에, 표정에, 말에 진심이 담겨있지 않기도 하다. 나는 진정으로 '치유받고' 싶은데 말이다.




우리에겐 하나의 카드가 더 남아있다. 바로 '치유하기' 카드다. 사실, 너무 큰 고통속에 놓여져 있다보면, 내가 나 자신을 치유하는 것은 커녕, 하루 하루 일상의 삶을 살기도 힘이 들다. 아니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어떻게 치유를 스스로 한단 말인가.




하지만, 논리적으로 접근해보면, 치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고, '치유받기'와 '치유하기' 중에서, 누군가가 혹은 무엇이 나를 치유해주지 않는 한(치유받기), 남은 가능성은 하나 뿐이다. '치유하기'. 스스로 치료할 수 밖에 없다.




주인공이 전투 중에 다쳐, 스스로 총알을 빼내고 벌어진 상처를 스테이플러로 고정시키는 영화 장면들을 우리는 잘 안다. 스스로 치유하고 일단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 너무 아파요. 치료할 힘이 없어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라고 아무리 불쌍하게 외쳐봐야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전쟁터이기 때문이다. 타인들은 그들 자신의 전쟁터에서, 그들이 부상자라고 생각하며 그들 역시 치유받기를 원하고 있다. 친구도, 가족도, 형제 자매도, 온전히 내 치유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중에 다시 소독을 하더라도, 나중에 다시 봉합을 하더라도, 나중에 다시 수술을 하더라도, 일단은 나 스스로 얼른 치료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슬프고 좌절스럽지만, 그게 삶이라는 전쟁터이다. 이런 자가 치료가 상처의 악화를 막고 예후를 좋게 해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 소방대원들이 해주는 응급처치는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도 우리 마음에 응급처지, 자가 치료를 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는 우리 마음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수십년을 살면서 오로지 혼자 마주해야 하는 존재가 '내 마음'이기 때문이다.




8일째 베트남의 하루를 '치유하기'로 결정하고, 베트남 시장을 걷다보니, 과일이 보였다.

"저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