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현실과 방황

사회 물 오래 먹었더니 현실이 보이더라

by 모험소녀

이제야 내 인생에 꼬인 사슬을 풀고 나온 기분이었다.

7년 만에 느껴 보는 캠퍼스 공기는 너무도 달콤하고 신선했다.


퇴사하고 시작한 서른 살 늦깎이 대학원생은 이제 마음 편하게 공부만 해도 되는 거였다.

원칙적으로는!


나를 받아주신 교수님께 감사했고, 그 때문이라도 나는 공부에 전념하려고 애썼다.

학문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할 일이 참 많았다. 매일 노어, 영어, 한국어로 된 수많은 논문이 주어졌는데, 읽는 속도가 느려 내용 파악만도 며칠이 걸렸다. 엄청난 공부량 때문에 학문에 대한 즐거움은 미미하게 느껴졌다.


생각보다 공부에만 온전히 집중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6년 반 동안 정신 없는 분위기 속에서 빠른 멀티 태스킹을 요하는 회사에만 있던 내가

흔들림 없이 '진리의 상아탑'을 쌓기엔 이미 사회 물을 너무 많이 먹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논문 한 페이지 읽고 스마트폰 보고, 몇 줄 보다가 다른 것 들춰보고 하는 식이니...

나에게 이토록 집중력이 없는지 몰랐다. 일하다 전화 받고, 일 처리 하다가 심부름 다녀오고, 상사가 부르면 가고, 일은 빨리빨리 처리해야 하는 회사 생활의 여파였다.

논문도 빨리 해치울 요량으로 읽으면서도 더 쉬운 방법을 찾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첫 학기 신고식을 제대로 치르고 나니 다음 학기가 두려웠다.

그나마 방학만 바라보고 버틴 거였다.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힘들게 지내려고 학교에 온 건 아닌데.


다음 단계를 도모하려고 왔는데, 어느 새 학교가 또 다른 덫이 되어갔다.

회사를 그만 둔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증명하고 싶어 더 아등바등 공부했던 거다.

지친 몸과 마음, 대학교 때 해보지 못한 긴 여행으로 방학의 특권을 누리며 잠시 고통은 잊는 듯 했다.


2학기에 접어들자, 조금씩 현실적 생각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조교를 맡으며 학교의 민낯도 많이 봤다. 나름대로 해 온 가닥이 있어 과사무실 업무 처리는 어렵지 않았지만, 확실히 회사에 오래 몸을 담고 와서 다시 학교를 보니 바뀔 수 없는 것들 투성이라 답답했다.


이 공부해서 뭘로 먹고 살지? 이런 분위기에서 열심히 해도 교수가 될 수나 있을까?

보다 냉철하고 현실적으로 스스로 물어보니 딱히 답이 나오지 않었다. 공부로 끝장을 보겠다고 온 건 더군다나 아니었으니 말이다. 참으로 철 없는 뒤늦은 사춘기 몸부림에 흘러온 것만 같아 다시 불안한 마음이 들게 됐다.


결정적으로는 2학기 마친 후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수술로 현실 더 뼈저리게 다가왔다.

'내가 지금 이렇게 속 편히 공부할 때인가? 병원비 보태드리고 부모님 부양해야 할 상황에....'


그래서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휴학'을 이때 결정하게 됐다.

어쩌면 기약 없는 휴학이었다.


어머니 간호하며 당분간 주위를 환기시키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자는 생각에

또 살면서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아르바이트'도 하게 됐다.

나의 방황은 이미 시작된 거였다.

퇴사 이후의 이상적인 삶을 그려 나가기가 서른 살에겐 현실적으로 너무 버겁기만 했다.


바깥 세상은 모든 것이 야생이었다.

러시아 작은 스포츠 단체에서 잠시 일을 하게 됐다.

회사에 있을 땐 내 명함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됐지만, 이 단체는 조직원도 마땅치 않고 파워가 없었다. 역시 조직이 주는 힘은 대단한 것이구나어 예전 회사의 존재가 특별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그래도 가장 보람됐던 건 거기서 지금껏 사용한 러시아어 그 이상의 러시아어를 썼다는 점. 회화할 때 틀릴까봐 러시아어 쓰기 엄청 부끄러워하던 내가 급하니까 튀어나오는 의사 소통이라도 나쁘지 않게 구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곳에서는 모든 걸 몸으로 직접 부딪혀야 했고,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내 기준으로 봤을 땐 모든 게 엉터리에 제대로 갖춰진 것 하나 없었지만,

다행히 그 동안 해오던 가닥의 내공으로 큰 행사도 수행하고 잘 모면해 나갔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었네!


하지만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이런 불안정한 일을 계속 할 수는 없었기에,

난 여전히 방황 중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동기 언니가 내 연락처를 물어보며 회사에서 연락이 갈 거란 연락을 받았다.

날? 갑자기 왜?


방황자의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Point9. 공부는 회사 다니면서도 할 수 있다!

회사 다니면 공부가 아쉽고, 막상 공부를 하면 일을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 하지만 기왕이면 공부는 회사에 적을 두고 살뜰히 챙길 것을 권한다. 학생으로만 지내던 사람이 학업을 계속 이어가는 건 어렵지 않지만, 사회 생활을 어느 정도 한 직장인이 순수 학생으로 되돌아가면 세속적 속삭임이 끊임없이 흔들어 놓는다. 웬만한 의지나 목표가 없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전공 선택은 업무와의 연관성, 향후 직무 등을 고려해 경영, IT, 법 등과 같은 실용 학문이나 본인 전문 분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래야 회사를 다니면서 공부할 명분이 충분해지고, 업무와 상호 작용도 되며 학위 취득 이후 사내에서 전문성 발휘에도 도움이 된다. 단, 학문의 칼은 일, 공부 모두 제대로 감당할 자신이 있을 때 뽑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안 된다. 거기다 공부를 독려한다는 회사들조차 실제로는 직원이 업무를 소홀히 하거나 공백이 생길 것을 우려해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경우가 많다. 역시 보통 일은 아니다. 사람은 평생 공부를 해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직장인들에게는 체력과 의지가 둘 다 받쳐줘야만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일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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