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⑤ 은행과 정산의 늪

답답한 러시아 은행, 정산 시즌만 되면 한껏 예민해지다

by 모험소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잡무를 포함한 다양한 업무를 해왔지만,

가장 특화된 분야는 바로 정산 업무였다. 말 그대로 돈 계산하는 일!


숫자에 약한 내가 돈 관리라니.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한국에서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회사 전체 재정 회계를 도맡아 하는 일이니.

은행 잔고가 얼마고, 사업비 및 운영비로 쓸 수 있는 돈은 각각 얼마나 있는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때그때 시스템에 처리 비용을 비목별로 입력해야 했다.

관리를 안 하고 돈을 쓰려면 한없이 돈을 쓸 수도 있고(물론 나중에 펑크 나서 수습도 해야 함),

하나하나 통제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는 일인 것이다.


분기별 정산서류

특히 분기마다 정산 서류를 본사로 보내는 일 때문에라도 돈 관리는 평소에 이루어져야 했다.


매번 자잘한 영수증과 카드전표, 은행 송금증, 계좌 사본 등을 하나하나 안 빠뜨리고 챙겨놔야 하고,

모두 정산 시스템 숫자를 서로 정확히 맞춰야 하니,

분기마다 한 번씩은 어김없이 고비가 찾아왔다.


물론 예민하게 숫자와 증빙을 다루는 일이라 머리도 아프지만,

러시아 은행을 상대로 처리해야 하는 일들

만만치 않게 손도 가고 감정 노동을 요하는 것이라 더욱 골이 아팠다.


은행 업무를 아무것도 모르고 시작한 백지 상태의 나는 서류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오랜 시간 공부할 필요가 있었다.


관리할 계좌가 현지 법인 명의라, 아무리 총무 직원이라도 은행업무 대리 위임장을 가져가야 은행일을 직접 볼 수 있다. 보안상으로도 중요한 돈 다루는 일이라 막내인 내게는 손이 떨릴 만큼 막강한 책임이 부여됐다. 한 손에는 위임장을 들고 용기롭게 은행을 향했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위임장 시스템으로 운영되겠지만 내가 해본 적이 없었으니, 사실 이런 것조차도 운전과 함께 러시아에서가 처음이었다. 참 러시아에서 가지가지 처음 해본다.


러시아 은행 등 관공서의 답답함과 횡포(?)는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바 있었다.

그래서 애초에 은행은 마음을 비우고 갔다.

담당 직원 데스크 앞에 앉아 서류를 제출하고, 그분께서 업무 처리하는 걸 빤히 쳐다보며 기다려야 한다. 처음엔 적응이 안 되고 이 언니가 오늘은 무슨 시비를 붙일지, 서류가 잘못된 건 아닐지 걱정도 됐는데,

제집 드나들듯 하게 되면서 그런 마음도 점점 무감각해졌다.


그래도 역시나 직접 체험해 보니(?) 러시아 은행은 정말 빡빡하기 이를데 없었다.

서류에 숫자 하나 잘못 써오면 가차없이 반려당하기 일쑤. 현금 인출 수표에 회사 직인이 조금이라도 자리를 이탈하거나 제대로 찍히지 않으면 받아주지 않고, 심지어 볼펜 색깔이 다르면 다시 해오라고 한다.

아주 사소한 것 하나만 잘못해도 무조건 받아주지 않았다.


5천 루블 인출을 위한 수표 견본. 글씨 하나 틀리면 안 되고 직인도 제자리를 벗어나면 안 된다. (출처: telegra.ph)


"오늘은 너무나 짜증과 화가 치밀어 올랐었다.
융통성이라곤 없는 은행 업무, 안 그래도 다시 해오라고 빠꾸먹은 은행서류 때문에 지불이 안됐는데 그와중에 돈 안냈다고 아무것도 못해주겠다고 배 째라는 식의 이상한 업체..."

- 2009.9.11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그래, 은행이라 그럴 수 있다 치자.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반려당한 서류 하나를 제대로 다시 만들어오려면

현지직원을 재촉해 재작성한 서류를 받아야 하고,

그걸 들고 대장님께 가서 다시 받는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면서 사인을 재차 득해야 하며,

직인도 흐뜨러지지 않게 다시 찍어서 은행을 오가야 한다.

반나절 이상은 더 소요되는 것이다. 은행 업무 시간 때문에 하루를 넘길 수도 있다.

당장이라도 돈이 필요한 날이라면 큰 낭패다.


러시아 은행에서는 현찰도 데스크에서 그냥 건네주지 않는다.

현찰 받는 골방 비대면인듯 대면인 까싸. 환전할 때도 보통 이런 곳에 들어간다. (출처: kushva-online.ru)

현금을 인출할 때는 작은 골방 '까싸(касса)'에 들어가야 한다. 요즘 같은 비대면 시대에 걸맞게 유리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 돈을 거래한다. 유리 너머 직원과 손 닿을 일이 전혀 없다. 서랍으로 서로 돈과 서류를 넘겨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은행 직원이 주는 대로 받아왔다가는 큰 단위 돈만 수북해진다. 천 루블짜리 지폐만 잔뜩 받아왔는데 당장 지불할 금액 단위가 백 단위라면, 천 루블을 찢어서 줄 수도 없는 노릇.

시중에서는 잔돈을 잘 바꿔주지 않는 분위기라(잔돈 전쟁 글 https://brunch.co.kr/@youngstrana/32 참고), 총무 직원으로서 작은 단위의 돈은 늘 구비해두어야 했다.

그래서 매번 유리 너머 은행원에게 필요한 작은 돈의 수량을 미리 정해 와서 요청한다.

오랜 노하우 끝에 돈에 둔감한 나도 이처럼 계산적이 됐다.


내가 정산 업무를 하며 당시 현찰에 민감하게 됐던 건,

늘 정돈이 안 되는 책상

은행을 잘 이용하지 않았던 당시의 현지 관례에 맞추면서 생긴 습관이기도 했다.

매달 직원 급여가 현찰로 지급되고 있었기 때문.

그래서 직원 급여날은 나의 막노동 날이었다.


처음에는 몇 명 안 되던 직원이 점점 많아지면서 계수 업무가 막중해졌다. 인출해야 하는 돈은 갈수록 늘어나고 일일이 월급 봉투 만드는 일이 너무나 큰 일이 되어버렸다. 사람마다 받는 급여도 다르고 작은 단위의 돈도 제각각이니 얼마나 큰 일인가.


매달 그 많은 돈을 인출해 회사로 돌아오는 길은 항상 뭔가 불안했다.

혹시라도 도난을 당하면 어쩌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가끔은 차가 없어서 은행에서 회사까지 돈 뭉텅이를 들고 혼자 20~30분을 걸어 온 적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있는 동안은 아무 일 없이 돈은 임자를 만나러 잘 갔다.


"오늘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보람된 하루.
아침부터 은행 서류 다 해놓고, 점심 먹고 은행 가서 돈을 왕창 인출해 용감하게 회사까지 걸어왔다. 미친 짓 요즘 자주하네.

오늘은 직원들 보너스 주는 날!!!!! 근데 왜 내가 이렇게 기분이 좋지? 회사로 걸어가는 길 내내 직원들이 좋아라 할 모습을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빨리 직접 주고픈 맘이 들었다. 예전엔 이런거 느끼지 못했는데.. 일부러 세금 안 떼게 하려고 굳이 현금으로 주자고 한 것도 나였다. 손이 시꺼매지도록 돈을 세고, 나누고, 봉투에 고이 넣고...

역시나 표정이 달라지는 우리 직원들. 한해 동안 수고 많았어요. 마치 내가 받은 상인 양 나도 덩달아 기뻤다."

- 2010.12.29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이와 같은 현찰 삽질은 귀임 즈음 은행 계좌 입금으로 일괄 정리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매달 직원마다 계좌 이체증 서류를 만드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었지만, 계수하느라 손가락 까맣게 될 일은 이제 없어졌다.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카드가 보편화되었으니 10년 만에 러시아 시골 세상도 많이 변했다.

제일 많이 만졌던 현찰. 그 많은 돈은 내 손을 거쳐만 갈 뿐. (출처:rossaprimavera.ru)

아무튼 돈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정산 때만 되면 예민해졌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10개 분기 정산을 하면서 나름대로 적성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정산 서류상의 0.2~0.3루블 차액이 어디서 발생하는지 지구 끝까지 쫓아가 밝혀내고야 말고, 분기 말에는 애매한 지출이 생기지 않게 회사 식구들을 철저히 단속했으며, 아주 작은 영수증 하나도 꼼꼼하게 풀칠해 보관했으니. 내 꼼꼼함이 제대로 한몫했다.


연차가 늘수록 숫자를 맞추는 시간도 짧아졌고, 그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역시 정산 업무는 내 정신 건강상 좋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하다 보면 자기성찰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비로소 정산의 베테랑이 되어간다. 숫자가 한번에 맞고 틀린 것 찾아내는데도 금방이다. 헐, 혹시 이게 내 적성? 그럴리가.
정산이나 회계, 꼼꼼하게 살펴봐야 하는 일들을 할 때, 하면서도 드는 생각이지만 난 참 집요하게, 한가지 일이 걸리적거리면 끝장을 볼 때까지 지나치게 파고드는 습성이 있는것 같다. 그래서 너무 부분에만 치우치게 되고 전체를 못보는 성향이 되다보니 옛날부터 이런 일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는데. 꼭 일을 해도 자꾸 이런 일만 맡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 2010.4.2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정산 업무의 늪

특히 마지막 정산을 마칠 때 예민함은 극에 달했다. 연말연초에 러시아의 약 열흘이나 되는 연휴를 정산 업무를 끝내야 해 온전히 즐길 수가 없으니

더 서글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휴식을 달라!


"아침부터 은행서류와 연말보고서 때문에 나 혼자 동분서주.
직원들은 하루 휴가내고 안나온 이들이 많아 분위기는 고요했고, 집에 갈 준비들을 했다. 다른이들에게선 평온함이 느껴졌지만, 나 혼자 예민해져서 은행서류 무슨일이 있어도 오늘 꼭 받아와야 된다고 짜증을 살짝 냈다.(러시아는 내일부터 열흘 연휴니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냥 다 내 일이니까. 쟤 뭐 혼자 저러나 남 일 보는양 그냥 그렇게. 안하고 배째면 완전 티나는 일인데 그렇다고 열심히 한다고 해도 전혀 빛나지 않는일. 도와줄거 없냐는 식상한 말 한마디가 그립다. 그냥 이렇게 매여있는 내가 신경질났다. 열심히 하는거 자체가 쟤 왜 저렇게 법석이냔식으로 보는것도 싫고. 다 같이 열심히하는 분위기면 좋잖아. 왜 연말은 항상 나만 이렇게 바쳐야 하는거냐고. 아, 올해 마지막날도 이렇게 꼬인채로 끝낼 건가."

- 2010.12.31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결론적으로는 지금에 와서 보면 나에게도 러시아 은행만큼이나 갑갑하고 융통성 없는 모습이 발견된다.

돈 앞에서는 아날로그적이고, 주어진 일을 개선하려 하기보다 해오던대로만 열심히 하고,

허덕이면서도 인간에 대한 예의까지 갖춰보려 애를 쓰니 얼마나 피곤했겠는가.

그렇게 돈과 관련된 세계는 한 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늪이었다.


사실 내 돈도 아닌 돈을 이렇게 만져보고 남들 앞에서 생색(?)낼 수 있었던 것도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리라.

또한 총무를 충실히 보조해준 우리 현지직원이 없었으면 더욱 하기 힘들었을 일!

무사히 돈 계산 마치게 해줘서 고맙고 감사하다.

정산 시즌만 되면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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