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몇 명 안 되던 직원이 점점 많아지면서 계수 업무가 막중해졌다. 인출해야 하는 돈은 갈수록 늘어나고 일일이 월급 봉투 만드는 일이 너무나 큰 일이 되어버렸다. 사람마다 받는 급여도 다르고 작은 단위의 돈도 제각각이니 얼마나 큰 일인가.
매달 그 많은 돈을 인출해 회사로 돌아오는 길은 항상 뭔가 불안했다.
혹시라도 도난을 당하면 어쩌나? 무슨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가끔은 차가 없어서 은행에서 회사까지 돈 뭉텅이를 들고 혼자 20~30분을 걸어 온 적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있는 동안은 아무 일 없이 돈은 임자를 만나러 잘 갔다.
"오늘은 정신없이 바빴지만 보람된 하루. 아침부터 은행 서류 다 해놓고, 점심 먹고 은행 가서 돈을 왕창 인출해 용감하게 회사까지 걸어왔다. 미친 짓 요즘 자주하네.
오늘은 직원들 보너스 주는 날!!!!! 근데 왜 내가 이렇게 기분이 좋지? 회사로 걸어가는 길 내내 직원들이 좋아라 할 모습을 생각하니까 나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빨리 직접 주고픈 맘이 들었다. 예전엔 이런거 느끼지 못했는데.. 일부러 세금 안 떼게 하려고 굳이 현금으로 주자고 한 것도 나였다. 손이 시꺼매지도록 돈을 세고, 나누고, 봉투에 고이 넣고...
역시나 표정이 달라지는 우리 직원들. 한해 동안 수고 많았어요. 마치 내가 받은 상인 양 나도 덩달아 기뻤다."
- 2010.12.29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이와 같은 현찰 삽질은 귀임 즈음 은행 계좌 입금으로 일괄 정리하면서 마무리되었다.
매달 직원마다 계좌 이체증 서류를 만드는 일도 보통 일은 아니었지만, 계수하느라 손가락 까맣게 될 일은 이제 없어졌다. 지금은 놀라울 정도로 카드가 보편화되었으니 10년 만에 러시아 시골 세상도 많이 변했다.
제일 많이 만졌던 현찰. 그 많은 돈은 내 손을 거쳐만 갈 뿐. (출처:rossaprimavera.ru)
아무튼 돈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정산 때만 되면 예민해졌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10개 분기 정산을 하면서 나름대로 내 적성을 찾은 것 같기도 하다.
정산 서류상의 0.2~0.3루블 차액이 어디서 발생하는지 지구 끝까지 쫓아가 밝혀내고야 말고, 분기 말에는 애매한 지출이 생기지 않게 회사 식구들을 철저히 단속했으며, 아주 작은 영수증 하나도 꼼꼼하게 풀칠해 보관했으니. 내 꼼꼼함이 제대로 한몫했다.
연차가 늘수록 숫자를 맞추는 시간도 짧아졌고, 그 때의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역시 정산 업무는 내 정신 건강상 좋지 않은 일이었던 것 같다.
하다 보면 자기성찰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비로소 정산의 베테랑이 되어간다. 숫자가 한번에 맞고 틀린 것 찾아내는데도 금방이다. 헐, 혹시 이게 내 적성? 그럴리가. 정산이나 회계, 꼼꼼하게 살펴봐야 하는 일들을 할 때, 하면서도 드는 생각이지만 난 참 집요하게, 한가지 일이 걸리적거리면 끝장을 볼 때까지 지나치게 파고드는 습성이 있는것 같다. 그래서 너무 부분에만 치우치게 되고 전체를 못보는 성향이 되다보니 옛날부터 이런 일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는데. 꼭 일을 해도 자꾸 이런 일만 맡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 2010.4.2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정산 업무의 늪
특히 마지막 정산을 마칠 때 예민함은 극에 달했다. 연말연초에 러시아의 약 열흘이나 되는 연휴를 정산 업무를 끝내야 해 온전히 즐길 수가 없으니
더 서글퍼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휴식을 달라!
"아침부터 은행서류와 연말보고서 때문에 나 혼자 동분서주. 직원들은 하루 휴가내고 안나온 이들이 많아 분위기는 고요했고, 집에 갈 준비들을 했다. 다른이들에게선 평온함이 느껴졌지만, 나 혼자 예민해져서 은행서류 무슨일이 있어도 오늘 꼭 받아와야 된다고 짜증을 살짝 냈다.(러시아는 내일부터 열흘 연휴니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냥 다 내 일이니까. 쟤 뭐 혼자 저러나 남 일 보는양 그냥 그렇게. 안하고 배째면 완전 티나는 일인데 그렇다고 열심히 한다고 해도 전혀 빛나지 않는일. 도와줄거 없냐는 식상한 말 한마디가 그립다. 그냥 이렇게 매여있는 내가 신경질났다. 열심히 하는거 자체가 쟤 왜 저렇게 법석이냔식으로 보는것도 싫고. 다 같이 열심히하는 분위기면 좋잖아. 왜 연말은 항상 나만 이렇게 바쳐야 하는거냐고. 아, 올해 마지막날도 이렇게 꼬인채로 끝낼 건가."
- 2010.12.31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결론적으로는 지금에 와서 보면 나에게도 러시아 은행만큼이나 갑갑하고 융통성 없는 모습이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