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2-⑥ 바이칼, 너무 가고 싶어서

쪽팔림을 대가로 시베리아의 진주를 보러 가다

by 모험소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근무하면서 가보고 싶은 곳이 정말 많았다.

당시 우리 지사가 관할하던 지역이 저 멀리 사하 공화국, 캄차카반도, 마가단, 그리고 동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까지, 땅 크기로만 세계 1위였을 거다. 기회만 된다면 출장을 떠날 수 있는 곳이 매우 방대했다.

물론 난 막내라 집강아지나 다름 없었지만.


특히 이르쿠츠크, 그리고 바이칼 호수에 가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바이칼이 얼마나 투명한지,
얼음 조각을 들어 비쳐보는데 다 보일 정도더라고!

겨울에 이르쿠츠크 출장을 다녀온 친구가 흥분한 목소리로 바이칼이 너무 좋았다고 이야기할 때,

이따금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가는 여행객들이 바이칼 호수 보러 간다고 할 때마다,

부러운 얼굴만 하던 나도 반드시 보고 와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바다인듯 바다 아닌 호수 풍경.

하지만 생각보다 나의 일탈 여정은 쉽지가 않았다.


때는 바야흐로 2009년 여름.

대장님 정권 교체(?)를 앞두고 갑갑함 속에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특히 한국에 돌아가거나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여름 시기에는 혼자 남은 허전함과 헛헛함만 가득하다.


햇살이 한결 따사로워질 무렵, 도저히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혼자 바이칼로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마음을 먹고 행동에 옮기려는 순간, 이미 여행을 준비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기차를 타고 가자니 3박이 걸리고, 비행기는 3~4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시간대가 안 좋고 자리마저 없다.


"휴. 나 왜이리 답답하게 사니.

혼자 바이칼 여행 가려고 맘먹고 티켓 사러 갔더니 비행기는 자리가 없고, 열차는 시간표 알아보려고 앉아있더라니 그 자리에서 갑자기 인터넷이 몇 시간동안 스톱됐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시간표마저 매우 좋지 않고 그 날짜도 알혼섬 빈 방이 나는 시기와 맞지가 않는다.
뭐야. 가지 말라는거야?! 역시 성수기에 이런 늦은 결심을 하는게 아니었다."

- 2009.6.29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늦어도 이른 봄부터는 서둘렀어야 했는데.

바이칼 호수의 가장 큰 섬인 알혼섬(Ольхон)은 핫한 관광지라, 유럽, 중국 여행객들이 성수기에 몰려들기 때문에 빈 방은 이미 오래 전부터 없었다. 알혼섬 숙소에 문의 메일을 보냈더니 자리가 거의 꽉 찼단다.


생각해보면, 당시 매일 업무에만 허덕이던 내가 뭘 제대로 알고 미리 혼자 여행을 준비할 수 있었을까 싶다.

(이때만 해도 혼자 여행을 가본 적이 없던 때였으니)

아니, 어쩌면 어떻게든 갈 수는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솔직하게는

혼자 갈 용기가 안 나 스스로 핑계를 둘러대며 '에이, 못가겠네' 결론지었던 것이리라.


그러던 어느 날,

이르쿠츠크 출장이요?


홀로 바이칼행이 좌절된지 몇달 후,

감사하게도 이르쿠츠크에 갈 기회가 찾아왔다.

물론 출장으로였다. 난 당연히 쾌재를 부르며 '오케이!'


출장이라 하면,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갈 수 있는 성격의 여정이 결코 아니다.

목적을 달성하러 가는 것이기에 감내할 것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르쿠츠크와 바이칼은 꼭 가보고 말리라는 의지가 그 부담감을 눌러버리고 말았던 거다.


출장 떠나기 전 비즈니스 미팅을 잡아 준비하고 일정을 수없이 체크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장님을 모시고 떠나는 미션이라, 사실 안 가는게 더 마음 편한 출장이긴 했다.


그래도 일단 고고!

비행기 국내선으로 3시간 반 만에 도착한 이르쿠츠크.

차를 타며 이동하면서 본 이르쿠츠크 시내는 생각보다 정말 멋스러웠다. 웅장하고 화려한 아름다움이 아닌, 소박하지만 옛스런 멋이 느껴지는 동네였다. 목조 건물과 아름다운 서양식 건물들이 블라디보스토크보다 많아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시베리아 한복판에 별 거 없겠지 생각했는데, 내가 있는 동네보다 좋을 건 또 뭔가!


물론 이르쿠츠크가 프랑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청년 혁명 당원 데카브리스트들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을 당시엔 모르고 갔으니, 눈앞의 도시 모습이 그저 놀랄 수 밖에.
아름다운 앙가라강. 이크루크츠 시내에 바이칼 호수는 없지만 바이칼에서 흘러나오는 앙가라강이 있다.


이르쿠츠크를 보고 나니 바이칼이 더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 과정은 너무 멀고도 험했다.

가장 가까운 바이칼 호수가 시내에서 한 시간 이상 떨어진 곳에 있어,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남은 시간을 이용해 가야 했기 때문이다. 빨리 미팅 다 끝내고 호수를 보러 가고 싶은 마음에 난 제정신이 아니었을 거다.

거기다 대장님 비즈니스 미팅에 동행해야 하니! 어질어질하다.


대장님과 현지업체 미팅에 들어갔을 때 내 모습은 지금도 기억하고 싶지 않다.

어쩌다 통역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말로 전달해야 할 시간에 흐르던 침묵과 정적,

'그런 게 아닐까요' 대장님께 되묻는 내 모습,

내게 재촉하면서도 '아, 그 얘기네' 눈치로 더 잘 파악하시던 대장님.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무능한 전공자로서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순간의 연속이었다.

아무런 공부와 실습 없이 비즈니스 미팅 통역에 달려들기에는 내 능력이 너무 부족했다.

대장님은 뭘 믿고 날 데려가신 걸까? (그날 이후 통역은 함부로 절대 안 하게 되었다)


서진영이는 아는 게 무어냐


대장님께 수도 없이 들은 말이다.

바이칼 보는 대가가 이런 쪽팔림이었다니!

열심히 일해도 정작 이런 실전에서는 입도 뻥끗 못하는 내 모습에 스스로 많은 자극을 받기는 했다.

나타샤와 함께. 그녀가 빌려준 장갑과 부츠는 매우 유용했다.

아무튼, 지옥 일정을 마치고 드디어 바이칼로 출발!


현지 가이드 나타샤(나탈리아)의 도움을 받아, 남은 시간 편하고 홀가분하게 관광을 즐길 수 있었다. 유쾌하고 밝은 나타샤는 고려인이었는데, 아쉽게도 우리말은 못해 나와 주로 러시아어로 소통했다.


배려 깊은 나타샤 덕분에 이르쿠츠크에서 가장 가까운 바이칼 호수가 있는 어촌 리스트뱐카(Листвянка)까지 택시로 한 시간 반을 단숨에 달려갔다.


"이번 출장에 너무나 큰 도움을 주었던 나타샤. 현지 고려인기업 간담회때 만난 박사장님의 따님인데, 출장기간 동안 우리를 미팅장소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고, 바이칼 가는 날에는 날씨 춥다고 장갑, 부츠, 옷 등등 직접 챙겨주기까지한.. 보기보다 어른스러운 나보다 3살 어린 동생. 우리말은 한마디도 못하지만 왠지 동질감이 느껴지고, 친근하고, 정말 너무나 고마웠다."

- 2009.10.17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맑고 투명한 바이칼


역시 바이칼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여름의 바이칼이 가장 좋다는 건 거짓말인 것 같다.

살짝 춥지만 가을의 바이칼도 너무나 맑고 깨끗했고 매력적이었다. 물론 겨울도 정말 예쁘다.


바다표범아, 안녕?

그렇게 나와 바이칼의 첫 조우가 이루어졌다.

바이칼 박물관에서 바다표범(Нерпа 네르빠)도 만났고, 호수변에 있는 동화 같은 호텔 레스토랑에서 작품 사진도 남겼다.

자연이 좋으니 그 어디든 작품이 된다. 자연이 훌륭한 건 물론이고, 나타샤를 비롯해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친절하고 정감있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블라디보스토크 사람들에 비해 때묻지 않고 순수해서 더 좋았다.


이런 곳을 여행이 아닌 출장으로 오게 되다니. 다시 발걸음을 블라디로 돌려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바보 같은 통역만 자꾸 생각 나 다시 한 번 내 마음 한켠도 쓰려왔다.


그래도 강렬했던 이르쿠츠크 출장 이후로 러시아의 다른 도시들도 눈에 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커졌고,

이때부터 나의 잠재되어 있던 여행 DNA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동화 속에 있는 듯한 바이칼 호수의 풍경

"이르쿠츠크 출장, 정말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고, 무식을 단독 드리블하는 바람에 쿠사리도 먹어보고, 앞으로 더욱 열심히 해야 할 부분을 가르쳐주고, 고생은 엄청 했지만 너무나 알차게 보냈던 출장!


정갈했던 도시, 무척이나 맑았던 바이칼 호수. 순박한 사람들, 도시속 숨겨진 보물들... 도움을 주려고 환대적인 주변 사람들. 그리고 따뜻한 그들의 마음. 편한 마음으로 갔다가 졸지에 통역을 하게 되는 바람에 완전 엉터리로 버버버버벅. 완전 헤매기도, 그냥 실수에 즐겁기도 했었지만. 정말 역량 꽝이다 나.


암튼 힘도 들었지만 많이 배우기도 했던, 새로운 면들을 접할 수 있었던 좋은 출장이었다.(밀린 보고서와 일들, 잡다한 행정들이 날 기다리고 있으나) 그러나 새벽 3시반 비행기는 너무했다. 돌아오니 이건 또 뭔가, 현지직원이 줄줄이 3명이 그만둔다 한다니. 안그래도 잠 못자서 머리가 띵한데 돌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

- 2009.10.16 나의 블라디 주재원 일기


물론 바이칼 전후로 내가 겪어야 할 온갖 수모와 골칫거리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영험한 시베리아의 진주의 기운을 받아서 잘 버텨낸 셈 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멀리 간 출장길, 그리고 바이칼과의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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