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그림자놀이 2부

4. 절대 사랑을 꿈꾸다

by 운정

"정선아, 교수님이 좀 보재."


과 선배이자 조교인 인태가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교실을 나서는 나를 불러 세우며 말했다.

한교수는 나의 지도교수였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1학기부터 근로장학생에 지원하였다.


"일하면서 공부는 언제하나?"


한교수는 일을 하면서 공부하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그는 부모 모두 미국유학한 박사이며 교수인 학자집안에서 자라 인간이라면 모두 공부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이 몸에 익혀진 사람이었다.

그도 미국 시카고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온 36세의 전도유망한 젊은 조교수였다.


교수연구실앞에 도착하여 노크하고 '들어와' 하는 소리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넓고 긴 탁자가운데 두줄로 쌓여있는 책더미위로 어떤 남자의 머리가 보였다.


"어서와, 자. 인사해. 앞으로 이 친구가 자네의 연구를 보조하게 될거야."


"반가워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교수님이 칭찬많이 하더라고요. 윤필상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해요."


그는 고개까지 숙이면서 나에게 인사를 깍듯이 했다.

나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며 교수님의 손짓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한교수는 나를 그와 나란히 앉히고는 20여권은 되어보이는 논문을 내 앞에 가져다 놓고 우리가 잘 보이도록 탁자 옆구리 기역자로 앉았다.

필상은 한교수의 대학 4년 후배이면서 동료로 이제 박사과정수료 후 연구논문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그는 단독으로 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연구프로젝트를 따내어 연구보조해줄 조교를 구하고 있었다.

한교수는 이제 대학 4학년이고 저 까마득한 후배인 나를 박사논문을 쓰는 후배의 연구보조인력으로 소개했다.


나는 매우 부담스러웠다. 박사 수준의 그를 돕는 다는 것이 그저 근로장학생으로 잡일을 해온 나로서는 어떻게 돕는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연구보조역으로 주는 인건비는 학생으로서는 꽤 파격적이었다. 연구기간은 2년이었고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도 나머지 학기 등록금을 내고 대학원까지 학비를 낼 수 있는 금액이었다.


"네가 심리통계를 잘하니까 이 연구에 특별히 투입하는거야, 대학원생 다 제치고. 너에게 도움이 많이 될거야. 대학원 진학할거잖아? 이 친구와 2년동안 연구에 매달리면 석사논문쓰는 것은 뭐 그리 어렵지 않을 거야. 과외알바, 근로장학생 더 이상 신청하지 말고."


나는 당황스럽고 부끄러워 몸둘바를 찾지 못하고 가만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세상속으로 나를 끌어 들이는 것이 그들이 나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리라.

그럼 나는 그들에게 무엇을 줘야 할까? 가슴이 덜컹덜컹거렸다. 나의 불안한 미래는 잠시 2년동안 유예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감사합니다,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셔서요. 그런데 제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네요."


"자자, 오늘은 만난지 첫날이니까 계약서는 다음에 쓰기로 하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구."


한교수와 필상은 가방을 들고 연구실 불을 끄고 벌써 나가고 있었다.

뒤따라 나서며 과외알바를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더니,


"전화해, 오늘 못간다고. 아니 앞으로 못간다고 해. 언제까지 그러고 살거야."


어제까지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나는 선선이 그들이 이끄는 대로 하고 있었다.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저녁7시에 과외할 학생집에 전화하여 오늘, 아니 앞으로 과외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과 유쾌하게 맛있는 저녁식사를 했다.

마치 내가 명문가의 집안의 자제와 동급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그들의 세상은 쾌적했고 밝았고 넓었고 따뜻했다.


매월 10일이면 따박따박 연구비가 들어왔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동생에게 등록금 정도는 줄 수 있었다.


"고맙다. 니가 날 지켰어, 니가 아니면 그 때 난 나가고 말았을 거야, 차마 널 두고 갈 수 없었지. 너 때문에 엄마는 그 모진 세월을 참고 견딜수 있었어."


어머니는 내가 학기마다 동생 등록금을 주러 가면 늘 그렇게 말하고 했다.


거의 하루 종일 필상선배와 일을 했다. 그는 다른 학교에서 박사과정을 하고 있었지만 한교수 이름으로 우리 학교 벤처동 연구실 하나를 임대해서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학교에 오면 연구실에 들러 가방을 풀고 수업을 다녀왔다. 4학년이라 수업은 많지 않았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연구실 논문속에 파묻혀 계산기 두드리고 통계 및 정보처리하고 프린트하고 논문검색하여 요약하고 비교 검토하며

그와 밥먹고, 일하고, 공부하고 밥먹고, 잠깐 소파에 기대 눈을 붙이다 또 일했다.


필상은 그다지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와 한교수와 나누는 이야기를 듣자니, 그는 사업을 하는 집안의 장남으로 아버지는 사업을 이어받기를 원하는데 그는 연구가 적성에 맞는다고 집안에 반항아처럼 고집을 피우는중이라고 했다. 그 당시 정부차원에서 신도시 건설을 발표하면서 건설경기가 활성화되는 시점이어서 아버지는 유통사업과 건설사를 모회사로 하여 몇개의 자회사 사업을 확장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러니 아들이 연구나부랭이나 하고 있는 것이 몹시 못마땅했을 것이었다.


그는 매우 진지한 사람이었고 집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는 연구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집착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학교에서만 찾으려는 것처럼 학교와 집만을 왔다갔다 하며 연구에 몰두했다.

국내의 심리학 분야에서 신경계와 호르몬, 인간의 심리문제와의 관련성, 그리고 나아가 뇌과학에 관한 연구가 전무한 상태여서 그의 연구는 획기적이지만 연구자들이 도전하기 두려워하는 영역이었다. 생리심리학분야는 대학원생들에게 인기없는 분야였다. 그의 연구를 연구재단에서 밀어주는 거 보면 미국이나 독일 같은 연구 선진국에서 이미 검증된 연구가 많이 있었고 이에 맞추어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연구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선배에게 이 연구는 뭐에요?"


내가 물었다.


"음, 이 연구가 좋다기 보다는 음, 그냥 이렇게 가만히 있는게 좋아. 너랑 있는 것도 좋고.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 상황이 좋아. 혼자있는 시간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어. 음, 사업하는 집들은 말야, 매우 시끄러워. 복잡하고. 그래서 난 사업하기 싫어."


"뭐라구요? 시끄러운게 싫어서 연구하는 일을 한다구요? 뭐람, 잘난척하는 소리하기에요? 난 연구가 너무 힘든데, 선배는 뭐 뭐, 혼자있고 조용해서 좋아, 이러는 거에요?"


나의 볼멘소리에 그는 허허 웃으며 나의 볼을 한손으로 쓰다듬었다.


"사실 말야, 내가 어릴 적 하고 싶었던 것은 그림그리기였어. 아버지는 질색하셨고.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글쎄, 불가능한 일이겠지. 아버지는 강인한 분이야. 그런 아버지에게 벗어나려면 나만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아버지에게 끌려다니지 않으려면 말야."


"지금이라도 그림을 그리지 그래요?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럴까? 그럼 너랑 헤어져야 되는데? 이 연구를 하니까 너를 만나게 되었고 너만 평생 사랑하면서 조용히 살 계획인데?"


그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나의 귓볼을 잡아 당기며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과 드러난 이에 키스해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생경하기도 했다.

그와 함께 한 공간에 있다는 것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속에 묻어 오는 그의 해사한 미소속에 안기면

마치 포근한 양털요람에 있는 아기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입맞춤을 하면 얼어붙고 추웠던 나의 마음이 녹아내리며 온 몸의 찬기운이 빠져나가며 피부에 소름이 돋으며 부르르 떨렸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친절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정중한 선후배사이를 잘 지켜내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옆에 있으면 냉정하리만치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차라리 그것이 편하기도 했다.

나또한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살갑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으니 그와 연구조력자 역할 외 다른 특별한 관계를 다른 사람이 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교수조차도 우리관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는 보여주지 않는 그의 모습, 다른 사람들에 섞여있을 때 보이는 이 앙당 물듯이 꾹 다물고 있는 입술과 냉냉한

그의 그런 모습에 나도 선뜻 다가서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는 연구실에서 우리가 해야 할 오늘의 할일이 끝날 무렵이 되면 논문들 틈에서 빠져나와 나른한 얼굴이 되어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그와 사랑을 나누며 절대 사랑을 꿈꾸었다.

내가 슬픔으로 눈물에 젖어 기대도, 비참함으로 무겁게 기대도 무너지지 않은 사랑

나를 한없이 받아주고 안아주는 사랑

나의 남루하고 비루한 처지를 짠하게 보지 않는 화사한 사랑

나는 절대 사랑을 꿈꾸었다.

그는 나에게 신이었고 아버지였다.


그렇게 꿈같은 2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고 그의 연구결과는 그의 박사 논문과 함께 올해의 논문상 후보에 오르며 성과를 내었다.







keyword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