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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선 Sep 04. 2024

푸바우, 푸바우, 푸바우!

영화 <안녕, 할부지>를 보고

'푸바우(본명: 푸바오. 나는 '푸바우'라고 부를 것이다. 내 맘이다)'라는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오늘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슬픈 결말을 아는데 절대로 가서 다시 울고 있는 일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을 하고 영화를 봤다. 내가 심한 야행성에 잠이 많아서 좋아하는 겹살을 누가 구워 먹는다든지 하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오전 9시에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는데 오늘은 설렘에 오전 9시부터 영화관에 갔다. 그리고, '망할!', 영화제목이 나오자마자 벌써 눈물이 나오려고 눈밑에 몰려들었다. '야이! 눈에서 비키라구! 여긴 영화관이라구! 사람들 있는데 남사스럽게!' 영화관이 시커매서 다행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불이 켜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되돌아갈 시간이 2시간 여 남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푸바우를 정치 사회적 산물로 보고 분석을 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런 현학적인 분석을 위해 이 글을 쓰고 싶지 않다. 이 영화의 본질은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미화를 해도, 나는 역사적으로 약소국의 공주를 볼모로 잡아 갑질하는 강대국에 보내고, '이놈의' 강대국은 정치 사회적 계산에 따라  약소국을 통제하고 무시하기 위해 볼모로 잡아간 공주를 모욕하고 처우를 굴욕적으로 했던 여러 경우와 오버랩이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푸바우가 잘 있다고 말로 떠들어봤자 인터넷이 사방으로 터진 요즘 세상에 누가 보기에도 푸바우가 여기에 있던 때보다 만신창인 건 눈뜬장님이 아니면 부인할 수가 없고, 내 마음도 이럴진대 이를 직접 돌봤던 이들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안 그래도 하는 수 없지만 말이다.


영화를 보고 아무런 생각이 안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너무 완벽하게 재미있거나, 정말 공허하게 아무것도 없었거나. 반대로 영화를 보고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경우는 영화가 매우 좋았거나, 공허함을 넘어서 화가 나도록 별로인 영화였거나. 이 영화는 본질에 충실하고, 감성적이며, 요즘 유행하는 이유 없이 현란한 겉치레와 기술의 장황함이 없이도 한치의 군더더기 없이 좋은 영화라고 느꼈다. 한 평론가가 이를 '신파'라고 표현한 것도 본 적이 있는데, 신파가 안 좋은 경우는 그것이 인위적이거나 억지로 짜낸 듯한 경우일 것이다. 신파가 왜 나쁜가? 사람은 희로애락의 감정이 적절히 섞여서 삶을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삶을 진정으로 사는 사람만이 희로애락의 감정도 느낄 수 있고, 울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런 용어는 뭔가 부정적이고 격이 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꼭 그런 용어를 써야 했을까? '신파'라고 한 그 평론가는 아마 마음의 눈이 비뚤어져 있는 나르시시스트일 것이라 짐작된다. 영화를 보고 뭔가 깎아내릴 것을 하나 찾다가 저런 싸구려 비열한 용어를 쓰면서 자신이 뭔가 대단한 일면을 가진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말이다. (메롱!)


영화는 영화라는 것을 찍는 기술을 매우 효율적이고 감성적이고 분명한 인과관계와 합당한 필요에 의해 아주 잘 잡아내었다. 나무에 긁힌 푸바우의 흔적, 눈망울, 일류 배우도 흉내 낼 수 없는 진짜 인간의 오묘하고 복잡한 희로애락의 감정선, 표정 등,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지에 대해 분명하고도 충분히 납득가능한 중심을 잡고 영화를 매우 잘 만들어냈다고 본다. 이 영화는 줄거리나 대사 (하긴 이 영화에는 애초에 그런 게 없다. 그렇지만 어떤 대사와 줄거리보다 뛰어나다. 삶이 영화만큼 이토록 멋지다면 인위적인 대사와 줄거리 이런 게 무슨 필요가 있을까?) 뿐만 아니라 눈으로 보이는 장면의 어느 한 귀퉁이도 놓쳐서는 안 되는 영화이다. 삶과 시간의 흔적을 시각적으로 아주 잘 찾아내어 이를 세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매일 보는 하늘도 이 영화에서는 새삼스럽다. 그리고, 우리는 그 흔하다는 하늘을 사실 대부분 잊고 지낸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영화의 중간에 애니메이션도 등장한다. 마찬가지로 현란한 기술이 가미된 애니메이션 영화에 익숙해진 우리는 처음엔 이 애니메이션이 초보적이고 서툴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바로 이런 인상은 사라지게 된다. 거기에서도 또 본질에 대한 당연한 깨달음을 알게 된다. 기술이 본질에 앞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푸바우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푸바우와 사육사가 그 어느 잘난 애니메이션 감독이 제작했을 것보다 더 이들과 닮아있다는 것을 말이다. 푸바우와 사육사를 세밀히 애정 어린 시선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나오지 못할 애니메이션이다. 둘의 표정과 행동, 색채가 단조로우면서도 매우 세밀하게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아마도 강사육사는 이 애니메이션을 가보처럼 소중히 여길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일관성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등장하는 인물과 소재도 그렇지만 감독을 포함한 제작진도 비슷한 진정성과 순수성을 가진 사람들이어서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이 영화를 화려한 수상경력이 있는 박찬욱 감독과 같은 사람이 제작했다면, 아예 제작이 되지 않았거나 그 참신하고 순수한 본질을 제대로 잡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영화가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지길 기대하고 있다. 뭔가 멋있어 보이려고 있는 척하는 그런 공허한 영화의 홍수 속에서 작은 뗏목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 대해서 나는 24시간 이상 떠들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잘 만들어진 영화란 뜻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험난한 세상에서 푸바우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순수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들은 종을 떠나 존재하는 돌봄과 사랑, 연민과 그리움이라는 인간적이고도 순수한 정서가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푸바우만이 주인공이 아니다. 이곳 주키퍼들만큼 진심으로 자신의 일에 몰입하고 진정성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보기에 순수하고 행복해 보이는 이 주키퍼들의 세상에도 회사라는 조직 내에서, 동료들 간에, 관객들 앞에서, 수많은 더럽고 치사한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자신의 하는 일과 돌보는 동물들에게 보이는 표정과 행동은 푸바오만큼이나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 사실 각종 우울증세와 스트레스에 흉악범죄가 난무하는 세상에 매우 보기 드문 광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의 일에 저렇게 진심인 사람들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돈에 눈이 멀어 어떻게든 대충 일하고 돈이나 뜯어갈까 하는 사기꾼들이 많았단 소리다. 가식이 아니면 힘든 세상에 이 푸바오를 둘러싼 사람들은 이유 없이 온전히  사랑하고 좋아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고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사실 단순하게 살며 행복할 수 있는 곳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서 자신의 일터로 나와 그곳을 청소하고 성실하게 맡은 업무를 처리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동물들을 잘 돌보고, 주말엔 텃밭에 가서 각종 꽃들과 채소를 기르며, 옆에 있는 의자를 끌어다 앉아 지는 저녁노을을 한 번 바라보고,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하루 종일 핸드폰의 숫자를 들여다보고 경쟁에 치닫고 그런 게 아닌 그런 삶, 그런 삶이 고프다고나 할까.


이 영화에는 현재의 피곤한 삶을 구원할 많은 열쇠들이 숨어있다. 사랑한다는 것, 돌본다는 것, 자신의 일에 소명의식을 가지고 임한다는 것, 진정으로 슬퍼한다는 , 눈물을 흘린다는 것, 사랑하기 위해 똥을 치우고, 밥을 먹이고, 청소를 하는 그 일들이 사랑하는 대상을 쓰다듬는 일과 동일하게 신성하다는 것을 아는 것 (특히 한심한 부모들 밑에서 오냐오냐 잘못 키워져 비싼 거 걸치고 사진이나 찍어대는 것에 몰입되어 있는 정신 나간 일부 엉덩이에 뿔난 MZ 세대들), 행복이란 어디 멀리에 가서 휘황찬란한 점심을 먹는 게 아니라 주변의 다양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하는 것에서 온다는 것 등을 안다면, 알 수 없는 현대의 온갖 우울증과 공허감을 반 이상은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곳 주키퍼들은 더 이상 누구의 을도 아닌 온전히 자신의 삶에 스스로 주인공인 사람들이다. (이들을 고용하고 있는 회사는 정말 이들을 고용할 수 있어 행운인 줄 알고 서로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공원 수입료의 많은 부분을 인센티브로 제공해야 함이 마땅하다. 두고 보겠음!) 이들을 어떤 대단한 사람들과 같이 놓아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아직은 존경할 만한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에 마음이 놓인다. 나도 내 작은 영역에서 적어도 내 작품에 대해서는 진정성을 놓지 말고 이 삶을 일구며 가야겠다. 나는 이 영화에 나오는 사육사들의 이름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100점 만점에 100점 이상인 영화를 마음이 공허한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그럼에도 그 공허함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 심각한 우울증세가 있어서일 것이며, 병원에 가서 전문인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 오늘 하늘이 파랗구나! 가을이 보이는 길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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