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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Jun 29. 2023

여름에 태어난 엄마를 위해

아이가 주는 첫 선물

올해 내 생일은 장마를 알리는 비가 세차게 내린 다음날이었다. 출근길 아침, 하늘은 파랗고 바람은 선선했다. 청명한 날씨처럼 기분이 산뜻해졌다.


이날은 첫째 대단이의 방과 후 교실 학부모 참관수업이 있는 날이다. 방과 후 교실 참관수업은 의무사항이 아니다. 말 그대로 학부모가 아이가 방과 후에 참여하는 특별활동 수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이가 잘하고 있는지 교실에 찾아가 보는 것이다.


대단이는 3개의 방과 후 교실을 수강하고 있다. 워킹맘은 하루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엄마가 오지 않으면 아이가 서운해 할 수 있다는 말을 귀동냥으로 들은 차라 3일 중 하루만 가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아이는 당연히 3일 모두 오는 것이 아니냐는 예상외의 반문을 했다. 첫날은 못 갔다. 둘째 날은 그래도 왠지 가줘야 할 것 같다. 어차피 내년부터는 안 갈 거니까. 그래, 생일인데 한번 가볼까?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생일은 오롯이 나를 위해 보냈다. 회사에는 월차를 내고 도심으로 나갔다. 나를 위한 소소한 선물을 사고 극장에서 재미없는 예술영화를 보았다. 저녁에는 친구를 만나 맛있는 것을 사 먹었다. 뜨거운 한낮의 열기가 증발한 초여름의 저녁, 그 선선한 공기가 참 좋았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생일에 나를 위해 특별한 일을 한 기억이 없다. 아이를 키우는 데는 돈이 많이 들어가는지라 물욕이 사라진 지 오래여서 딱히 선물은 필요하지 않다. 굳이 회사를 쉬면서 나를 위한 시간을 따로 보내지 않는다. 그러고 집에 가서 애를 보면 괜히 더 피곤해서 생일이 파국으로 끝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이제 내 생일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보낸다. 그래도 딸의 생일이라고 매년 딸의 집에서 미역국을 끓여주시는 친정엄마 덕에 미역국은 반드시 챙겨 먹는다. 이만하면 됐지, 뭐.


회사에 출근하고 오후반차를 냈다. 하루 중 가장 뜨거운 때 회사를 나섰다. 수업 시작시간에 맞출 수가 없는 시각이다. 역시나 파워워킹을 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겨우 대단이의 학교에 도착해 교실을 찾아갔다. 오늘의 방과 후 수업은 로봇수업이다. 이미 수업은 시작한 터라 조용히 들어갔다. 아이는 열 명 남짓, 참석한 학부모는 네 명 정도. 학부모들은 교실 뒤에 의자를 빼 와 앉아 있다. 나도 따라 앉았다.


로봇 조립에 열중한 아이의 뒷모습을 보는데 참 대견하다. 우리 집 아이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열심히 집중해서 로봇을 조립하고 있다. 자리를 떠나 돌아다니는 애들은 한 명도 없다. '아니, 애들이 왜 이렇게 훌륭한 거지? 다들 너무너무 대단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느새 나는 열심히 졸고 있다. 무더운 날씨에 식후에 운동을 하고 땀을 흘린 댓가다. 대단이는 로봇을 열심히 조립했고 완성한 로봇으로 남은 수업시간에 친구들과 배틀을 했고 그 와중에 투닥투닥 친구와 다퉈서 방과 후 선생님을 살짝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미 매우 털렸다. 아무것도 안 하고 뒤에서 지켜보다가 졸기만 했는데.


이 모든 것이 날씨 때문이다. 이노무 후텁지근한 공기가 사람을 진이 빠지게 만든다. 겨우 정신을 챙기고 대단이와 함께 대단이의 돌봄 교실로 갔다가 혼자 학교를 나왔다. 나에게 주어진 여유시간은 한 시간 남짓. 그래도 생일인데 이왕 휴가를 내서 나왔는데 뭔가 평상시와는 다른 것을 하고 싶다. 평상시 움직이는 동선과 반대쪽에 있는 동네 맛집 카페로 향했다. 달달한 아이스 라떼가 시그니처인 곳이다.



몸에서는 땀냄새가 진동하지만 어쨌든 젊은이들과 섞여서 커피를 마시고 아이들의 하원을 위해 카페 나섰다. 공교롭게도 아직도 한낮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고 내가 걷는 길은 그저 땡볕이었다. 결국 나는 집에 돌아와 저녁밥을 먹고 초저녁부터 쓰러져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퇴근한 남편이 집에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설핏 깼다. 애들이 없단다. 할머니와 나갔나 보다. 그러고 또다시 잠이 들었다.


애들이 조잘조잘 떠들며 집에 들어오는 소리에 다시 잠이 깼다. 몸은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무거워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엄마, 엄마 선물."


"응?"


눈을 뜬 내 눈앞에 쨍하니 파란색의 캔이 보인다.

카스다. 카스 500ml.  

카스 500ml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웃는 대단이의 얼굴.

엄마가 잠이 든 사이 할머니와 함께 슈퍼에 가서 자기 돈으로 사 왔다는 카스 500ml. 아빠 것도 사라는 할머니의 말에 아빠는 오늘 생일이 아니라며 할머니의 제안을 거부했다는 칼 같은 대단이.


생일선물은 아이에게 늘 주기만 했지, 받아본 것이 처음이다. 어른의 선물은 해치워야 하는 숙제 같은 것이다. 적당한 가격을 가늠해 보면서 구입하는, 상대방에게 마음을 표시하기 위한 장치. 아이에게는 특별한 날을 빌미로 아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하는 면죄부. 선물을 주면서 마냥 기쁜 마음을 느꼈을 때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하다. 그런데 대단이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지금 내게 제일 필요한 것을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그래, 선물이란 게 원래 이런 거였지. 줄 때는 상대방이 선물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기대되고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어 행복하다. 받을 때는 눈앞의 이 물건이 내 것이라는 것에 기쁘고 나에게 선물을 주는 상대방의 예쁜 마음에 감사하게 된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흘러가던 생일이 비로소 특별한 날이 되었다.


대단이가 부스럭부스럭 책가방에서 뭔가를 꺼내 준다. 유리 단지 그림을 색칠하고 단지를 주고 싶은 대상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트모양 종이에 써서 붙여 놓은 작품이다.



"사랑해요."

"저를 키워 주셔서 감사해요."


쓸 말이 부족했는지 감사의 메시지만 3개이다.

"노력할게요."라는 말에는 갑자기 왈칵 마음이 쏟아졌다.  

찡해지는 코끝을 가다듬고 있는데 대단이가 나한테 다가와 한마디 건넨다.



..........................................


"오래 사세요."

 

여름의 맥주는 텀블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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