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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2장. 글쓰기가 말을 걸어오다

by 김영웅

1부. 2장. 글쓰기가 말을 걸어오다


유경과 효영은 한 달 전 동수가 보낸 글을 읽었을 때 가슴이 벅차올랐다. 동수가 가을을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을 넘어 둘은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과 말들이 언제나 머릿속과 마음속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고, 이제는 떨쳐버려야 할 시기임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낡고 오래되어 거미줄까지 쳐진 내면 깊숙한 곳의 '나'라는 우물로부터 탈출하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다. 여기까지 오기에 너무 오래 걸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들은 한 달 전 동수의 말을 기억했다. 글쓰기가 그 탈출의 통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겨났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책상 위에 놓인 달력에 한 달 뒤 동수와 만나는 날짜에 동그라미를 쳐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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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만남 후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동수가 단톡방을 개설하여 유경과 효영을 초청했다. '글쓰다짓다'라는 이름이었다. 글은 쓰는 것이기도 하고 짓는 것이기도 하기에 왜 두 번 연이어 같은 뜻의 동사를 사용했는지 몰라 유경이 먼저 동수에게 단톡방 이름의 의미를 물었다. 동수가 대답했다. 응, 글쓰기와 글짓기 모두 같은 뜻이지만 '글쓰다짓다'에서 '짓다'는 집짓기, 즉 건축을 떠올리며 선택한 단어야. 내가 읽은 글쓰기 책들 중 안정효 작가와 신형철 작가는 글쓰기를 건축과 같은 행위라고 정의해. 문장은 쓰는 게 아니라 찾는 거라고 말하거든. 어떤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문장은 단 하나밖에 없으며 그 문장을 찾아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정확한 글쓰기'라고 해. 왜 있잖아. 같은 뜻인데 중언부언하듯 여러 문장으로 말하게 되면 산만해져서 초점이 흐려질 뿐 아니라 말과 글의 힘이 떨어지잖아. 짧은 말을 하더라도, 혹은 짧은 글을 쓰더라도 꼭 해야 할 말만 꼭 필요한 단어를 사용해서 할 줄 안다면 그게 가장 효과적이고 정확하다고 할 수 있겠지. 내가 지향하는 글쓰기도 그와 같아. 그래서 글쓰기 모임 이름에 그런 뜻과 내 의지를 담고 싶었어. 그러므로 '글쓰다짓다'는 정확한 글쓰기를 지향하는 모임인 셈이지. 이게 너네들 뿐 아니라 작가를 지망하는 모든 이에게 필요한 방향 같다고 생각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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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듯 말듯한 동수의 말을 들으며 유경은 안정효와 신형철의 글쓰기 책을 바로 구입했고 그 부분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듯했다. 마흔이 넘도록 왜 이런 시간을 갖지 못했었나 하는 후회와 자책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어 동수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 심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동수를 다시 만나게 되면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듣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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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영도 맥락은 다르지만 비슷한 마음이었다. 평생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행위 자체를 의도적으로 피해왔던 효영은 늘 그런 다툼이나 논쟁이 일어날 것 같은 상황이 되면 마음에 들진 않더라도 상대방의 의견을 그냥 따라주는 편을 선택했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늘 효영을 착하다거나 아량이 넓다고 칭찬을 했지만, 효영은 그게 사실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효영은 자신이 착하지도 아량이 넓지도 않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효영이 상대방의 의견을 따랐던 것은 단지 그게 더 쉬웠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타적인 행위가 아니라 지극히 이기적인 행위였던 것이다. 그랬던 효영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많은 참음과 억눌림이 있었다. 효영은 그게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자기 의견을 뚜렷하게 말하거나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먼 나라의 이야기인 것만 같았고, 마흔이 넘어 이젠 그럴 힘조차 모두 다 사라졌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건 곧 자기 책망과 자기 비하로 이어졌고, 최근 여자친구와 헤어진 시기에 그 감정이 폭발해 스스로의 모습을 정말 바보 같다고 여기고 있던 차였다. 이런 시기에 동수의 말이 화살이 되어 효영의 가슴팍에 꽂혔던 것이다. 글쓰기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지만, 효영의 마음속엔 뭔지 모를 기대가 가득 차게 되었다. 글쓰기를 진지하게 하게 되면 바보 같았던 지난날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효영은 새로 개설된 단톡방에서 유경과 동수의 대화를 보며 '정확한 글쓰기'에 대한 정의에 눈이 번쩍 뜨였다. 잘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뭔가 중요한 일들이 효영의 안과 밖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효영은 달력에 쳐놓은 날짜를 고대하며 둘의 대화에 조용히 '좋아요'를 눌렀다.


동수가 이어서 글을 남겼다. 너네 혹시 저번에 내가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글로 써 볼래? 유경이 바로 대답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응, 맞아. 그거. 동수의 대답에 효영이 물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알려줘. 너무 막연해. 동수가 기다린 것처럼 바로 썼다. 일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 언제인지 써 보는 거야. 예를 들면, 누군가에겐 힘든 일과를 끝내고 자기 전에 샤워하는 시간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겐 맛있는 점심식사를 하는 시간일 수도 있겠지. 저마다 다른 시간을 쓰고 왜 그런지 자기만의 이유를 달면 돼. 어렵지 않아. A4 용지 반 페이지에서 한 페이지 정도로 한 번 써봐. 다음 달에 만날 때까지 이 단톡방에 올리면 좋구. 나도 함께 할게. 우리 세 명이 서로 다른 답을 내놓고 왜 그런지 이야기도 들어보는 시간을 가지면 재미있을 거야. 내가 뭘 사랑하는지 성찰하는 시간도 될 거고. 다람쥐 쳇바퀴 같던 일상에서 탈출하는 통로가 될지 누가 아니? 아무튼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라 믿어. 동수의 말에 유경과 효영은 '좋아요'를 지그시 누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다. 정말 그랬다. 유경과 효영에게는 탈출구가 필요했다. 다만, 그게 글쓰기라는 행위로 다가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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