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장. 첫 번째 만남
너넨 하루 중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 언제니? 주문한 커피가 나오자마자 대뜸 동수가 물었다. 음… 유경은 한참을 뜸 들이다 말했다. 어려워, 질문이. 옆에 있던 효영도 마찬가지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 더 쉬운 질문을 해 볼게. 너네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은 언제야? 다시 동수가 물었다. 유경과 효영은 또 생각에 잠겼다. 꾸중 들은 것도 아닌데 둘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졌다. 창밖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은 초점이 없어 보였다. 마치 한 번도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 못한 사람처럼, 마치 갑자기 길을 잃은 사람처럼 보였다.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하게 들어와 카페 한쪽 구석을 밝게 물들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테이블 위에 가지런하게 놓인 커피는 입도 대지 않은 채 식어가고 있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스한 김 만이 움직일 뿐 모든 게 정지된 것 같았다. 식상하다고 여기고 지나칠 수도 있을 질문 두 개가 그날따라 유경과 효영의 내면에 깊숙이 파고들었던 것이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보지 않으려고 애썼던, 그러나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어떤 알의 껍질 같은 것이 그들의 내밀한 곳에 견고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둘은 깨닫게 된 것이었다.
효영이 손을 내밀어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다시 시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먼저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질문은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요즈음처럼 추운 날에 자꾸만 생각이 나거든. 얼음땡 놀이를 하듯 유경과 동수는 동시에 몸을 움직여 커피 잔을 들고 효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산을 좋아해. 산에 가면 봄이 왔다는 걸 제대로 느낄 수 있거든. 그래서 이른 봄이 되면 나는 어떤 의무감에 사로잡혀 산을 올라. 사실 난 저번 주말에도 혼자서 동네 뒷산을 올랐어. 아직 2월 말이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혼자 집에 있으니 답답하기도 해서 운동할 겸 산을 올랐던 거야. 전날 내린 비 때문인지 하늘도 말끔했고, 비록 공기는 차가웠지만, 적어도 산 정상에서 탁 트인 전경을 볼 수 있다는 기대로 오랜만에 등산화를 꺼내 신었지. 쌀쌀했지만 기분 좋은 경험이었어.
유경이 훅 하고 들어왔다. 그러니까 효영이 너는 봄을 가장 사랑한다는 거야? 응, 맞아. 난 봄이 제일 좋아. 가만히 듣고 있던 동수도 한 마디 했다. 산에 오를 수 있어서 봄이 좋다는 거야? 아니, 등산은 하나의 수단일 뿐 목적은 아니야. 음… 그러니까 나는 봄에만 볼 수 있는 초록빛이 좋아. 산에 오르면 가장 먼저 그 초록빛을 발견할 수 있거든. 초록빛?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유경이 끼어들었다. 응, 초록빛. 난 거기서 어떤 살아있음을 느껴. 응축된 생명력이랄까. 유경과 동수는 '응축된 생명력'이라는 표현에 귀가 열리는 듯했고 자세를 바로잡고 효영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이, 왜 그래, 너네 둘 너무 진지해진 거 아니야? 효영은 쑥스럽다는 듯이 살짝 얼굴을 붉혔고 유경과 동수는 쿡쿡 웃었다. 효영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초록빛이 아름다운 것은 겨울의 시간을 오롯이 버티고서야 피어난 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이야. 난 그 초록빛을 볼 때마다 마음에 감동이 돼. 가끔 눈물이 날 정도로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효영의 눈빛은 살짝 젖어 있었고, 유경과 동수는 조용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모두 효영이 얼마 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과 봄은 곧 효영의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조용히 효영이 말을 이었다. 저번 주말에 산에 오를 때 너무 얇은 외투를 입고 갔나 봐. 그날 밤부터 감기 기운 때문에 두통과 오한이 있었거든. 지금은 좀 괜찮아졌지만 말이야. 내가 조급했어.
조급했다는 효영의 말을 듣고 유경과 동수는 살짝 숙연해졌다. 효영의 카톡 프로필에 적힌 짧은 문구의 의미가 상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의 겨울은 언제까지일까…" 다시 잠시 시간이 멈춘 듯 정지상태에 있다가 효영이 얼굴에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알아. 분명 봄은 올 것이고, 아파하는 이 순간들을 추억할 날이 올 거라는 사실을 믿어. 나는 더 단단해질 거고, 그렇게 견딘 만큼 내가 만날 초록빛은 더 아름다울 거야. 그 초록빛은 온 산을 물들일 테고, 저 멀리서도 보일 거야.
효영에게 겨울은 한 사람을 떠나보낸 후의 마음이었고, 봄은 곧 만나게 될 미래의 한 사람이었다. 유경과 동수는 효영의 문학적 감성에 적잖이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가슴 깊이 효영을 응원했다. 아름다운 초록빛의 봄이 효영에게 찾아와 효영의 기나긴 겨울을 끝낼 수 있기를 기원했다.
화장실에 다녀온 유경이 마치 제 차례가 되었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효영이 말을 듣고 내가 사랑하는 계절이 이거구나 싶었어. 나도 초록의 싱그러움을 좋아하던 때가 있었거든.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열정이 가득하던 때였어. 하지만 그 뜨거움도 흘러가는 시간을 거스를 수는 없었지. 때론 떠밀려가는 것만 같았어. '나로서의 나'는 없고, '누군가를 위한 나'만이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
물론 그 시절에도 나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어. 있는 것에 감사도 했고 내게 없는 것 때문에 불평도 했지. 좀 더 잘나지 못한 나를 자책하기도 했고, 자책한 나를 안쓰러워하기도 했어. 좀 더 잘할 걸 후회하기도 했고, 그만하면 잘한 거라 자위하기도 했어. 그렇게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니 인생의 여름이 끝나버렸지 뭐야. 그리고 어느덧 나는 엉거주춤 가을에 와 있더라구.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유경의 말을 가만히 듣던 동수는 마음속에서 깊은 공감을 했다. 동수 역시 한 아이의 아빠였고, 인생의 후반전으로 넘어오며 가치관의 전환을 겪어낸 터였기 때문이다. 동수 역시 봄이 아닌 가을을 사랑했다.
유경은 말을 계속 이어갔다. 떠밀려온 계절이라 생각하지 않아. 이 가을을 '누군가를 위한 나'로 살았던 여름의 연장선상에 두고 싶지도 않고. 대신 '나로서의 나'를 찾아내는 계절, '나로서의 나'로 살아내는 계절이 되면 좋겠어. 마침내 진정한 나로서 내게 주어진 이 현재를, 지금, 여기를 사랑하며 살고 싶어.
봄을 사랑하는 효영조차도 유경의 말을 듣고 가슴이 울컥한 것 같았다. 효영도 누군가의 시선에 맞춰 살던 바보 같았던 과거가 생각났고, 그렇잖아도 요즈음 진정한 나를 찾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진정성 있는 말은 언제나 힘이 있어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 누군가의 가슴 깊숙이 박히는 법이다.
묻지도 않았는데 유경은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하는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 맞아. 나는 이제 나는 가을을 사랑하게 된 거야. 태양의 뜨거움보다 햇살의 따사로움을 감사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비록 눈부시진 않지만 가을만의 은은한 빛으로 하루를 풍족하게 채우는 나날들이 좋아.
가을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더 깊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나아가고 싶게 만들거든. 나도 너네처럼 이제 인생 절반을 살았잖아. 가을로 물들어가는 내 모습이 좋아. 조금씩 익어가는 내 모습이 좋아. 과거와 달라져가고 있는 낯설고도 익숙한 내 모습을 끌어안고 싶어. 나는 가을을 사랑해.
이미 커피는 비어버렸고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유경의 말을 들으며 동수는 많은 생각들이 떠올랐다. 머릿속에는 어떤 장면 하나가 그려졌다. 언젠가 가슴 아팠던 날들을 떠올리면 늘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얼어버린 낙엽이 뒹구는 횡단보도 위에 멍하니 홀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또다시 떠올랐다.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유경과 효영이 동시에 웃으며 말을 했다. 야, 동수야 뭐 하니? 자니? 네가 물어본 질문에 우리가 이렇게 성실히 대답했는데 너도 뭔가 말해야 하지 않겠어? 넌 어때? 너는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 언제야?
동수는 건성으로 대답을 하는 둥 마는 둥 했으나, 여전히 꿈을 꾸듯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밖에서 교회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7시였다. 창밖은 이미 네온사인들로 아기자기한 옷을 입고 있었고, 카페 안도 푸근한 조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수가 대답했다. 음… 미안해. 너네 둘의 대답이 생각보다 진지하고 좋아서 감동도 받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났어.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 나는 글로 대답을 할게. 유경이는 애들 밥 먹여야 하고, 효영이는 운동하러 가야 할 시간이잖아. 오늘 밤에 내가 카톡으로 보내줄게. 사실 이런 질문 너네들에게 한 이유는 글쓰기 모임을 우리끼리 가져보면 어떨까 싶어서였거든. 말로 하면 사라지고 말지만, 글로 쓰면 흩어져 있던 생각의 파편들이 한데 모이고 정리되어 남게 되니까 말이야. 글쓰기를 하게 되면 오늘 너네 둘이 한참을 생각하고 대답한 바로 그 과정을 매일 하게 되거든.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 비로소 알게 돼. 오늘 질문이 너희들에게 의미가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지점이라 생각해. 놓치고 있던 소중한 것들, 쓰지 않으면 사라지고 말 것들을 붙잡는 것. 이게 일상으로 스며들면 우리 삶이 더욱 깊고 풍성해지리라 나는 믿어. 너희 둘과 같은 동지들이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 아무튼 고마워, 얘들아. 다음 달에 또 만나.
카페에서 나오자 세상이 조금 달라 보였다. 유경과 효영에게는 자기라는 오래된 우물의 문을, 그 견고한 껍질을 발견한 자가 바라보는 세상이었고, 동수에게는 함께 읽고 쓰고 나누며 깊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동지를 얻어 마음에 감동이 된 자의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이었다. 같은 세상이나 다른 세상이었다. 또한 셋은 각자 다른 삶을 살아왔으나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같은 공간 같은 시간 속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동지애를 느꼈다. 잠시 따뜻했다가 다시 추워진 어느 겨울날 저녁에 예기치 않게 찾아온 선물 같은 시간이었다.
그날 밤 동수는 유경과 효영에게 약속대로 글을 써서 보냈다. 유경과 효영은 글쓰기에 대한 기대를 마음속에 품게 되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동수처럼 글을 쓰고 싶다는, 아니 무엇보다 글을 쓰며 나를 찾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가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림을 느꼈다. 마침내 알을 깨고 나올 시간표가 왔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혼자라면 쉽지 않을 이 여정을 함께 할 동지가 있어서 다행이라 여겼다. 동수의 글을 아래에 덧붙인다. 제목은 'Embrace'이다. 셋은 한 달 뒤에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Embrace
잊히고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우수라면, 그 우수에 찬 눈을 가진 사람의 뒷모습은 겨울이다. 어느덧 인생의 가을에 서 있는 나는 앙상한 뒷모습만 남게 될까 두려워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한참을 젖은 눈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앞에서 뒤로 흐르지 않고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아득한 저 아래에 쌓이고 있는 듯했다. 시간이 어떻게 무게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오랜 비밀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눈을 감으면 나는 11월 말의 어느 날, 얼어버린 낙엽이 뒹구는 횡단보도 위에 홀로 서 있다. 진눈깨비는 점차 눈으로 바뀌고 있었고, 그에 따라 대기도 한결 가벼워지고 있었다. 웅크리고 있던 나는 잠시 봄을 느낄 수 있었다. 신호를 일곱 번 넘길 무렵 바닥엔 조금씩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하는 데엔 몇 분 채 걸리지 않았다.
몇 초간 섬망에 빠진 듯한 상태로 나는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할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여 그 길 위에 멈춰 서 있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시간이었고, 바닥에 쌓인 눈도 누적된 시간으로 보였다. 눈이 내린다고 해서 항상 쌓이지는 않듯,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사실도 동시에 떠올랐다.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사무칠 정도로 강렬한 갈망이 내 안에서 일었다. 흘려보낸 시간이 사라지지 않고 쌓이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흔적이 남는 삶, 기억에 남는 삶을 살고 싶다는 절박한 소망이었다.
여기, 인생의 절반을 허투루 살아버린 한 미련한 사람이 있다. 그는 추워지는 길목에 서서 두꺼운 옷깃을 여민 채 위에서 떨어지는 시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 깊은 우물을 들여다본 그는 소스라친다. 그가 남들보다 앞서 가고 남들보다 빨리 가려고 온 힘을 다하던 시절들에 이르자 그 무게가 깃털보다 가볍다는 뜻밖의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뜨거운 여름 같던 시간들이었건만 파리한 나뭇가지 같은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잊히고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다. 허망함에 가득 찬 그의 눈은 다행히 분노가 아닌 우수에 차 있다. 하지만 그의 뒷모습은 여전히 겨울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가올 시간을 올려다보며 앞으로도 모든 것을 기억할 수 없음을 예감한다. 그리고 마침내 뒤돌아서서 자신의 뒷모습을 끌어안는다. 겨울을 두 팔 벌려 받아들인 그는 이제 모든 계절을, 모든 순간들을 끌어안을 기세다. 비록 앞으로 다가올 많은 시간들이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가더라도 그 순간들을 치열하게 사랑하리라고 다짐한다. 기억에 남지 않게 될 삶조차도 두 팔 벌려 끌어안기로 한다.
나는 가을, 그중에서도 늦가을을 사랑한다. 11월이면 다시 그때로 돌아가 절박한 마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시간을 관조하며 우수에 찰 수 있다는 건 내게 주어진 삶을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허망해하던 내 모습도, 심지어 분노하던 내 모습도 모두 다 나라는 진실을 이제 나는 겸허히 받아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