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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상(好喪) 2

by 한아


2화


3년 전, 어머니의 여덟 동기간에 가장 가까이 지내던 구리 이모가 폐렴이 걸려 몇 주간 두문분출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게 엊그제였는데 얼마 후, 그 길로 돌아가셨다는 전갈이 왔다. 아무리 한 해 두 해 다른 게 노인네 명줄이라고 하지만, 불과 지난달까지만 해도 어머니와 함께 수십 포기 김장을 담아 이 집 저 집 나누느라 분주했던 모습을 기억하기에, 가운데가 뭉텅 생략된 듯한 맥락 없는 임종 소식이 당황스러웠다.


전쟁통에 행방불명되거나, 병으로, 사고로, 노환으로, 세상에 나온 순서와 상관없이 먼저 떠나고 남은 동기간에, 어머니와 모습이 가장 닮은 구리 이모는 어머니보다도 열 살이나 손아래 동생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로 안부를 묻고 왕래하던 구리 이모의 소식이 뜸해지자 아무래도 가봐야겠다고 나서는 어머니를 끌어 앉혀, 이모가 심한 감기에 걸려서 입원했으니 괜히 병원 가서 당신까지 옮지 말고 나을 때까지 계시라며 둘러대기를 여러 번. 그러나 발인에 장례까지 마친 이모의 소식을 더 이상 숨길 수가 없어 어머니께 알렸다. 그동안 둘러댔다는 것을 눈치 빤한 노인네가 몰랐을 것 같지 않다. 어머니는 놀라지도 않고 그저, 그랬냐. 하고는 보던 드라마 채널로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그날부터인 듯하다.

어머니는 더 이상 부엌 출입을 하지 않았다. 예전에 비해 요리를 하는 빈도수가 떨어지고, 계량컵 없이도 정확하던 간이 짜지고, 가스 불 끄는 걸 가끔 깜박거리긴 했어도, 끼니때가 되면 하다못해 나물 반찬 한 가지라도 하려 애를 쓰던 어머니는 개점 폐업한 식당의 주인장처럼 주방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더욱 난감한 것은 식사 때가 되어 밥상을 차린 아내가 식사하러 오시라고 몇 번을 말해도 ‘난 밥 생각 없다’ 며 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었다. 밥 생각이 없다던 어머니는 다른 식구들이 식사를 다하고 설거지까지 다 마친 후 주방 불을 끄면 그제서야 느릿느릿 식탁으로 나와 아내가 어머니 몫으로 차려놓은 반찬이며 밥이며 국그릇을 한쪽으로 밀어놓고 컵라면을 끓여 먹거나 말라붙은 밥에 물만 부어 먹고는 다시 느리게 방으로 돌아갔다. 어떤 때는 새벽에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저녁에 먹던 갈비며, 생선 반찬을 밥도 없이 먹고 있는 어머니를 마주치기도 했다. 무대 위에 핀조명이 떨어지듯 온통 컴컴한 집안에서 식탁 등만을 켜고 앉아 한밤중에 생선 가시를 들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부조리극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이고 그로테스크하기까지 보였다.


어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자그마한 체구의 어머니는 작은 키만큼이나 손도 참 작았는데, 그 작은 손이 재바르게 움직이면 신기하리만치 뚝딱! 이런저런 요리가 완성되었다. 어머니의 밥상에는 거의 매 끼니마다 국이 있어도 찌개가 올라왔고, 생선이 있어도 고기가 곁들여졌다. 명절도 아닌데 간 녹두에 잘게 다진 돼지고기를 듬뿍 섞어 녹두전을 부쳤고, 삶은 메주콩을 갈아 짜낸 콩물에 소금을 살짝 뿌려 아침 출근길 집을 나서는 식구들 앞에 한 컵 가득 따라 내밀었다. 두유를 짜내고 남은 찌꺼기는 어떤 날엔 간장 양념만 살짝 얹은 뽀얗게 하얀 담백한 비지찌개로, 또 다른 날엔 뼈째 붙은 두툼한 돼지고기와 신김치를 넣은 벌겋게 매콤한 비지찌개로 저녁 밥상에 올라왔다. 식당에서 파는 맵고 들쩍지근한 양념 범벅의 제육볶음은, 달큰하면서도 은은하게 매콤한 풍미가 넘치는 어머니의 제육볶음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를 인정하면서도 칭찬의 표현을 입 밖으로 내는 것에는 인색하던 아내조차도 어머니의 제육볶음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으며 레시피를 배우고 싶어 할 정도였다. 진하게 우린 멸치 국물에 오래 치댄 반죽을 직접 썰어 또아리 지어놓은 칼국수, 잘 삭힌 새우젓국으로 간을 맞춘 애호박 새우젓 찌개. 늙은 호박에 동부콩을 듬뿍 넣은 호박죽, 생일과 무관한 갈비찜과 잡채, 손주들 학창 시절에 등굣길 아침 식사로 밀가루와 계란, 우유에 설탕을 듬뿍 섞어 부쳐내던, 빈대떡 같기도 호떡 같기도 한 어머니표 팬케이크까지... 레시피도 계량컵도 필요 없는 어머니의 메뉴는 끝이 없었다.


아파트 화단을 온통 뒤지고 다니며, 김치통 사이즈에 딱 맞춤한 돌을 그 왜소한 노인네가 기어이 끌고 와 깨끗이 씻어 소독한 후, 하루 반나절 동안 잘 말린 누름돌은 여름이면 어머니의 오이지 통 속에서 수십 년 넘게 온 힘을 다해 '무게 넘치게' 제 할 일을 다했다. 찬 바람이 불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면, 여름 내내 일렬종대로 자리를 지키던 오이소박이들이며 열무김치들이 자리를 내어준 김치통 속에 나박나박.. 흰 눈이 내리듯, 작고 납작하고 네모난 배추, 무, 배의 하얀 조각들이 아름다울 만치 일정한 크기로 소복하게 쌓여 나박김치로 익어갔다. 성능 좋은 김치 냉장고가 만들어 준 살얼음을 빙판처럼 깨고 건져낸 뽀얗고 시원한 나박김치는 이듬해 봄이 올 때까지 푸성귀가 귀한 겨울 한철 식탁을 맛깔나게 해 주었다. 젓갈과 고춧가루를 많이 넣지 않아 담백하고 시원한 어머니의 서울식 김장 김치를 먹어본 사람들은 이제 다른 김치는 못 먹겠다며, 10년만 젊었으면 김치 장사로 대박이 났을 거라고 아쉬워했고, 김장하는 옆에서 김치 속을 주워 먹으며 뒷정리를 돕던 내 딸은 지금도 늦지 않았다며, 할머니는 김치 담그기만 하라고, 나머지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진지한 척 맞장구를 치기도 했다.


천성이 부지런한 어머니는 잠시도 쉬지 않고 뭔가를 만들었다. 주로 먹을거리들이었다. 좋아하는 연속극을 보면서 잘게 자른 무 조각을 실에 꿰어 무말랭이 줄을 만들어 주렁주렁 옷걸이에 걸어놓거나, 추석이 아직 한참 남았는데도 생율밤을 들고 앉아 갓난아기 머리통 모양으로 동글동글하게 깎아놓거나, 하다못해 멸치 똥이라도 빼 다듬어 두는 등, 강박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허투루 쓰는 시간을 못 견뎌했다.


어머니가 메인 셰프 역할을 하긴 했지만, 아내도 음식을 안 한 건 아니었다. 어머니가 워낙 쉽게 쉽게 음식을 하시니 주방 보조 정도만 해도 충분했을 텐데도, 깔끔한 아내 성미에 그걸 당연히 여겼을 리 없다. 당시에 대학에 강의를 나가던 아내는 나름대로 강의 준비와 수업 사이사이 시간을 쪼개어 요리를 하고 나와 아이들을 위한 밥상을 준비했다. 강의하랴, 수업 준비하랴 두 아이 건사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면서도, 수업이 없는 날에는 아내 표현으로 ‘입천장이 까질 만큼 까삭거리는’ 설탕옷을 입힌 고구마 맛탕을, 굵은 쌀떡에 잘게 썬 소고기와 대파를 듬뿍 넣은 떡볶이를, 큰맘 먹은 휴일 특식으론 요리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비주얼의 큐브 모양 안심 스테이크 볶음을, 마흔 중반이 훌쩍 넘은 딸아이가 지금까지도 감기 특효약이라며 찾는 시원한 오징어 국을, 등등... 두 여인이 경쟁이라도 하듯 날마다 수많은 요리를 해댔다.


덕분에 우리 집 밥상은 늘 풍성했다. 적령기에 좋은 짝을 만나 시집간 딸이 친정에 다니러 와서 하는 말이 ”시집와 시댁 밥상을 보니 우리 집은 완전 최고급 한정식 집이더라,“ 며 새삼 철든 소릴 했다.

어머니도 아내도 요리를 잘하니 날마다 생일상이라 부럽다고 남들은 속 모르는 소리를 했지만 과유불급이라고, 매일이 잔치상이요, 생일상인 상황이 때로는 나와 아이들에게 편치만은 않았다. 허기가 덜하거나 속이 더부룩한 날에는 어머니와 아내가 둘 다 섭섭하지 않게 모든 음식을 골고루 먹는 일이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모든 반찬이 메인 요리인 밥상은 풍요롭다 못해 피로했다. 나이가 들수록 위장도 줄어드는 듯 부른 배가 쉬이 꺼지지 않는 일도 잦아졌다.


아내의 음식 솜씨도 결코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평생 공부만 하느라 상대적으로 요리 경력이 적은 아내가 이북과 접경한 경기도 최북단에서 나고 자라 남북한의 음식을 골고루 섭렵한 데다가 타고난 손맛까지 겸비한 어머니를 이기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이었다. 아니, 실은 이기고 지는 싸움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건 어머니와 아내가 식구들의 입맛을 인질로 삼아 벌이는 총성 없는 전쟁이자 영역 싸움 같은 것이었다.

그랬던 어머니가 최근 몇 년 전부터는, 레시피 없이도 척척 만들어내던 음식들을 하다 말고 다음이 뭐였더라... 싱크대를 내려다보며 우두망찰 하거나 냉장고 문을 연 채로 뭘 꺼내야 할지 몰라 냉장고의 냉기가 가시도록 문을 붙들고 서 있기도 했다. 어떤 과정은 건너뛰고 어떤 과정은 두 번, 세 번 반복을 했는지 계량 도구보다도 정확하던 어머니의 음식 간이 짜지기 시작했다. 국이 있어도 찌개를 올리고, 고기가 있어도 생선을 올려야 직성이 풀리던 어머니가 음식을 섞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미역국과 무 국, 된장찌개와 고추장찌개, 삼겹살과 갈비구이를 섞어버렸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이가 들어서 손맛도 떨어지고 음식 하는 것도 귀찮아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퇴직 이후 어머니와 집에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진 아내는 점점 어머니의 이상한 행동을 못 견뎌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옷이며 화장품 등을 동네 다른 노인들에게 아낌없이 퍼주었다. 때로는 세탁소에 드라이를 맡기러 내놓은 아내의 옷이 사라지고, 길에서 자신의 옷을 입은 동네 노인을 본 아내가 그 집 며느리에게 이야기해서 옷을 도로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


어머니는 집의 것을 퍼다 나르는 한편으로 아들, 딸, 손주들이 주는 용돈을 모았다가 집 앞 수입품 가게에서 끊임없이 이상한 것들을 사다 날랐다. 아파트 상가 모퉁이 자리에서 30년 넘게 장사를 하고 있는 수입품 가게의 늙은 여우 같은 사장에게 우리 어머니는 그야말로 호구이자 ‘봉’이었다. 미제가 흔해 빠져 줘도 싫다, 안 갖는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남대문 수입 상가의 두 배가 넘는 비싼 가격으로 미제 캐러멜이며, 초콜릿, 일본 캔디 등을 사다 서랍에 숨겨놓고는 아장아장하는 증손주들에게 몰래 나눠주었다. 아내와 며느리와 딸이 애들 이 썩기 십상이니 그만 주라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가끔씩 옷장을 열어보면 못 보던 옷들이 걸려있었다. 그 가게에서 구색을 맞추기 위해 가져다 둔 유행 지난 재킷이며 조악하기 짝이 없는 프린트 스카프 따위를 노인네에게 세일 품목이라며 안긴 듯했다. 한 번은 엔초비 통조림을 사 왔길래, 이게 뭔 줄 알고 샀냐 물으니, 이제 고작 4살인 손녀딸아이가 그걸 좋아해서 샀다고 해서 아연실색한 적도 있었다, 어머니가 가스 불을 켜놓은 채로 까맣게 잊어버려 두꺼운 냄비 바닥에 구멍이 몇 개 뚫린 후로 아내는 주방에 가스 밸브 자동잠금장치를 설치하고, 우리는 가능하면 일박 이상의 여행을 삼가게 되었다.


-3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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