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한민국 영어 교사이다. 이게 뭐라고, 나는 일찍이 결심했다. 내 아이 영어는 내가 책임진다! 그땐 몰랐다. 이게 얼마나 힘든 여정일지.
좋다는 건 다 해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 그중에서도 교육에 관한 것이라면, 우리 나라 엄마들 십중팔구는 눈에 불을 켜고 정보를 모으고, 좋다는 학습지며 학원을 찾아 헤매리라. 하지만 내 자존심은 사교육을 허락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영어선생님인데!"를 외치며 각종 엄마표 영어에 관한 정보를 대충(여기서 포인트는 대충이다. 무슨 자신감이 그땐 그리 넘쳤던 건지.) 훑고, 이 정도면 나도 가능하리라 쉽게 판단했다.
아이들 또래의 엄마들끼리 모임을 형성했다. 우리는 매주 모여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아가들을 안고, 흔들고, 영어로 노래를 부르며 율동하고, 영어책을 한껏 오버해서 읽어주었다. 당시 우리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 열정에 혀를 내둘렀을 것. 우리 아이는 영어 영재로 거듭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온갖 잡다한 영어 교구들을 사모으며 영어로 대화하는 그날을 꿈꿨다. 말 못 하는 아기일 때의 일이다.
좀 커서는 책 읽기에 돌입했다. 왜? 그게 좋다고 들었으니까. 누구는 AR지수가 몇이라더라, 챕터북을 읽으며 혼자 낄낄대더라, 이런 말을 들으면 초조해졌다. 친자 확인을 하고 싶으면 직접 가르쳐보라고 누가 말했던가. 이보다 더 분명히 나의 핏줄임을 확인할 수 있을까 싶은 순간을 매일 겪었다. 울화가 치민다는 표현을 온전히 이해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방금 했던 단어를 왜 한 페이지 넘어갔다고 모르는 건데? 내가 방금 손짓 발짓 몸짓, 할 수 있는 짓은 다 해가며 알려줬는데? 여기 이 페이지만 지금 10분째 읽고 또 읽는 중인데? 결국 폭발이었다. 엉엉 우는 아이를 뒤로 하고, 열 조절에 실패해 있는 대로 수은주가 올라가 버린 나란 온도계는 유리 파편을 여기저기 날리며 펑! 터져버렸다.
이러다간 아이와 지금껏 쌓아놓은 관계마저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자연주의를 입으로 외쳐대며 발도르프 교육기관에 보내면 뭐 하나. 실상은 우리 애만 뒤쳐질까 봐 초조하고 불안해서 영어 단어 하나로 애를 쥐 잡듯 잡고 있는데. 영어, 접자. 나의 표리부동에 스스로 엄청난 실망감을 느끼고, 폭주하던 기관차는 드디어 멈추어 섰다. 나의 직업적 자존심에도 상처가 생겼다.
엄마품 영어그림책 강연
도서관 건물을 나서다 우연히 포스터 하나를 마주쳤다. 욕심쟁이 엄마는 자식 교육에 대한 탐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덜컥 이 강연을 신청했다. 또 누굴 잡으려고.
영어그림책으로 아이들에게 어떻게 영어를 교육하는지 알려주는 강연인 줄 알고 신청했는데, 속았다. 그러고 보니, 강의 제목도 좀 요상하다. '엄마표'가 아니다, '엄마품'이다. 알고 보니 아이와 책으로 대화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강연이다. 강연이 끝나고 머리를 세게 맞은 듯 한동안 멍했다. 강사의 말대로 영어에 포커스를 두지 않고 책을 함께 읽을 아이들을 머릿속에 그렸더니 그림책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그림책에서는 주책맞게 강의 중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원래 애들 그림책이 이렇게 심금을 울렸던가.
그때부터 나는 엄마표가 아닌, 아이들과 본격적인 '엄마품에서 그림책 읽기'를 시작했다. 엄마품에서 읽는 책에 영어는 그저 덤으로 따라오는 부록일 뿐. 나는 내 아이들 앞에서 선생님이 아니라 단지 '엄마'이다.함께 책을 읽고, 울고, 웃고, 이야기를 나눈다. 때로는 부끄러운 나의 이야기도 아이들과 함께 나누며 깔깔 댄다. 아이들은 (내 눈에) 별거 아닌 이야기를 읽고도 그 속에 숨은 진주를 찾아낸다. 엄마와 아이들이 함께하는 그림책은 언제나, 매 순간순간이 감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