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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um Apr 01. 2021

이방인

02_ 어떤 사유

수많은 이론과 논리 또는 어떤 예술적 감각과 지각을 배우고자 사람들은 호기심이나 모험 또는 잠재적 가능성의 욕망 또는 의지로 새로운 삶에 도전하려 하고 있다.
타국의 삶에서의 동기는 사회에서 요구하는 스펙이나 경력으로 자기 발전을 위한 것이거나 아님 다른 세계에 대한 로망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 나이에 문화적 차이나는 여러 대립적 환경에 적응하는 것에 용감하다 또는 대단하다고 하거나 한국에서 버티지를 못하니 도피한 거 아니냐는 말을 한다.


30대 초반 난 독일행을 결심하고 반도피 반도전으로 유학의 길에 몸을 싣는다. 이방인의 삶에 도전해보리라 결심하고 아니 이렇게라도 도피를 하게 되는 것을 도전이라고 또 나의 탈로 희석시켜버린다. 하지만 내면은 언제나 나를 찾고 싶어 하기만 하였다.

가치는 자신의 의지로 성장시킬 수 있고 그것이 열매가 맺을 때 좀 더 의미가 있으니깐 말이다. 타국에서의 삶은 때론 나로 하여금 상대의 비뚤어진 시선을 쓰다듬을 수 있는 관대함을 배우게 하고 포용하게 하고 더 지각 있게 훈련시킨다. 어떤 형태에서 오는 대립과 갈등이 있는 벼랑 끝은 때론 전쟁터이다. 몸이 상하거나 정신이 온전하지 않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틸 수 있는 건 그만큼의 시간들을 견뎌왔고 새로운 기쁨과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철저한 외로움과 고독의 벼랑 끝에서 순간의 여유를 배우기도 하고 공부와 생활비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니 갑의 거친 말속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 이성적으로 고립된 생각에서 오는 감정에서 벗어나려는 또 다른 인격수양을 한다. 아니 전쟁터에서 나의 자아를 지켜야 한다는 발버둥과 기도의 아우성으로 버틴다. 사실 타국 생활은 정말 만만치 않다. 생활비를 직접 해결해야 하는 처지라면 유학생이 부릴 수 있는 돈과 여유는 항상 한정이 되어 있다. 개인적으로는 작업을 하고 전시를 해야 하는 처지라서 전시를 위한 재료비를 쓰기 위해 모아두곤 하였다. 바로 옆 기차로 2시간이면 가는 파리 에펠탑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사실 여행을 안 좋아한다고 내심 괜찮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때도 있다. 근사한 여행은 아니지만 작정하고 유명한 관광지를 계획하고 둘러보는 것이 아닌 우연히 들른 여행이지에서의 소소한 시선의 단장들이 계절의 변화를 좀 더 구체화시켜서 관점의 이질적인 면을 친근하게 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매일의 독일에 사는 나의 집과 일터, 교회, 학교는 나의 여행지야 라고 나를 세뇌하고 나면 실제로 여행하는 이방인의 자세로 조금은 설레고 조금은 긴장하기도 한다. 어릴 적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을 정확히 말을 못 하는 가정적 분위기라 난 이런 것을 좋아하고 싫어해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궁금하기도 하고 이런 것도 배울 수가 있을까 조심스럽게 관찰도 한다.

독일을 오기 전 나의 본능은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집중하고 그것을 피하는 도피처를 갈망했던 터라 좋아하는 것을 찾아서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여전히 나의 울타리는 남들이 소리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얇은 막으로 만져보기도 하고 두드려보기도 한다.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깨질까 나를 위한 단단한 울타리를 만드는 것은 어렵기만 하였다.


이방인이란 다른 나라에서 오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는 하나 내포된 의미는 이질감이 동반된 단어인 것 같다. 난 고향에서도 가정과 사회에서도 이방인으로 소외감을 느껴봤기 때문에 이질감에서 오는 묘한 경이감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문화에 익숙할 때까지는 새로운 사람들의 대접을 누려도 된다는 안도감이 경이감보다 앞섰다. 이런 표면적인 친근함이라도 달아날까 봐 난 새로운 것을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을 주저하게 된다. 혼자만의 시간으로 잠시 들어가지만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나를 해치지는 않겠다는 안도감이 나의 육감을 곧 풀어헤쳐버린다.


그러다 나의 말을 경청해주는 사람들에게 나의 생각과 사고를 전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림이나 작품과 함께 전달하는 건 나를 격앙되게 하면서 살아있게 만들었다. 작품이 또 다른 나이기도 하지만 벌거벗겨 버린 내가 세상에 다 보여줘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내 안의 에너지가 점차 큼을 의미하기도 하여서 세상에 이로운 존재로서의 또 다른 기쁨이 나를 황홀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삶을 윤택하게 만들 수 있는 힘과 의지가 나로 하여금 흘러 멈추지 않는 것은 고인물보다 두말할 것 없이 너무 가치가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썩어버린 나의 상처를 심폐 소생하여 살기기라도 하듯 난 나를 해치지 않는 법을 담담하게 습득하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 하루하루 이 삶에서의 이방인의 이질감을 즐기고 있다. 한국에서의 이질감은 상처를 동반한 내면에서의 거추장스러운 두려움이 나의 후미진 감각의 구석까지 스며들어가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무단히도 페르소나 같은 탈을 쓰면서 진실을 외면했었다.



나를 마주 대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리의 사람들의 나와 다르게 생긴 것에 대한 이질감은 그들의 올곧음과 철학적 깊이로 나를 바라봐주는 시선들로 없어져버렸고 원활한 소통으로 유창하지 않은 말솜씨에 귀를 기울여주는 건 내가 만들어낸 작품을 바라봐주는 관대함과 관심으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난 한국의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교수들의 예술적 감각을 세뇌당하는 경우는 받지 못했던 것이 나의 감각을 자유롭게 해주는 시간을 단축시킨 것에 다행스러웠다. 한국에서 학위를 받았던 내 동생은 언제나 입버릇처럼 한국의 주입식 교육을 버려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학교 생활을 했다. 쉽게 말하면 수동적인 사람은 누군가가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여 주면 자기 스스로 파헤쳐 나가기가 어려워 교수의 도움을 갈구하면서 교수의 감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다. 능동적인 사람은 반대로 이런 답습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수직적 교육의 제도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경우가 십시일반이었다.


난 새로운 사고체계를 쉽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고 경이로웠다.

예술의 세계는 정말로 오묘하다.

나의 작품으로 나와 다르게 생기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소통의 연결고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곧 나의 잠재력과 간헐적으로 몰려오는 괴로움들은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제는 잊는 것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언제 불뚝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나의 영혼의 발자취에 쇄기를 박아버린다는 심정으로 에너지의 근원인 사랑 그 자체인 대상을 경외하게 되었다. 나를 온전히 흡수시켜 버리는 느낌으로 나를 내려놓는 온 감각적인 자율 행위는 그것으로 언제나 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빛을 쫓아가는 길은 협박이 아닌 회유와 거친 형태가 아닌 회복에서 오는 사랑을 오늘도 소망한다.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알곡과 가라지가 동시에 만나게 하심은 끊임없는 선(인내와 연단)과 악(슬픔 또는 고난에서 부딪히는 부정적인 형태)을 맞부딪혀 약한 자의 마음으로 있게 하신다. 악은 선을 이기지 못함을 굳게 믿고 있음을 알기에..


그리고 도피가 아니라 필연에 자율적 선택을 순종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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