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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um Apr 06. 2021

하얀색의 미학

하얀색의 치유

하얀색으로 작품을 한번 하고 나서 하얀색에 대한 경계는 무너졌다. 예전 나의 치유를 위해 작업했던 시간의 치유라는 작품에 젯소만으로 나의 세계를 표현해보았다.


<참조> 선! 그림에다 뭐하는거야?


하얀색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은 나의 사고를 확장시켰고 수평적이었던 나의 시선또한 깊은 심연까지 바라보게 하였다.


칸딘스키는 흰색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흰색은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다. 그것은 젊음을 가진 무이다. 정확히 말하면 시작하기 전부터 무요, 태어나기 전부터 무인것이다.


하얀색은 나의 무의식을 표현해주듯이 나에게 놀러와주었고 본연의 존재를 나의 물건들과 나의 지나간 시간들의 흔적까지 밤이슬처럼 촉촉히 어우러져 빛을 내게 해주었다. 나를 감추지 않아도 됨을 하얀색은 나의 육감을 빌려 영감으로 다가와 주었고 마치 내가 태어나기 전에 이렇게 생겼지만 언제나 빛나고 있었음을 알려주듯 작품안에 또다른 아우라로 더 빛을 내뿜고 있었다. 흰색이 돋보이려면 검정색이 있어야 하지만 이런 상반된 색의 조화로 하얀색을 한계지을 수 없기에 난 흰색 그 자체를 느낄 수 있게 나의 내적 음향에 힘을 빼고 무산시켰다. 운동하는 모든 에너지가 없음을 표현하기엔 하얀색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심연을 가로지르는 걱정, 분노, 불안함, 초조함 등의 어그러진 감정들은 그 자체로 서있는것을 거부하기 떄문에 서로의 색이 다 섞여야만 검정색이 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치유가 필요한때에 난 그 어떤 가능성이 없는 검정을 배제하기로 한것이다. 이건 내가 없어졌을때 존재하는것이기도 하기때문이다.

거기는 말도 필요없을 것이고 눈을 떠야지만 볼수 있는 눈꺼풀 사이의 곡선 외의 깊이까지 볼 수 있을것 같다. 시간은 멈춰져 있고 그 나머지가 무엇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대리자 같은 느낌도 든다.

그러다 악의에 찬 소리들이 어슬렁거리면 하얀색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서로의 다양한 장애물들을 경계를 그어서 서로를 서로의 점까지 도달시킨다. 어떤 한 점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운동처럼 번지기라도 하듯 그들은 자신들을 전진시키고 상승시킨다. 밤과 낮의 오묘한 차이가 이젠 확연해졌다는것을 아무도 모를 수 있게말이다.


감정들을 구속시킬수 있는 하얀색은 봄에 우리의 눈을 깨우고 여름이면 볼 빨간 열정으로 땀을 흘리게 하고 가을이면 젖어버린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게도 하고 겨울이면 추워서 텅 빈 마음에 조명처럼 밝혀주기도 한다. 우리가 관찰할 수 인식은 그저 하얀색이 만들어 놓은 놀이터에서 잠깐 엿본것이다.

종교나 과학, 도덕 자체를 흔들었던 니체로 인해 자기애가 실현되었는데 자기중심적인 확신은 내면의 심연의 흑점으로 간다. 거기는 더이상의 푸른 바다와 노란 개나리나 붉은 노을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나의 사랑은 어떤 빛이 나는지 모르겠다.

하얀색은 아름다울 미로 표현하다가도 근엄한 관대함이라고도 하고 절제된 인내이기도 하고 그 어떤것도 포용할 수 있는 사랑같다.

하얀색은 거기서 초록이 빨강이 되는것을 만든 씨앗이라 모래알보다 더 작은 결정체를 보여주고는 곧 떨어질 낙엽이 나무에서 떨어짐과 동시에 땅속에서의 빛나는 유익의 협력함까지도 보여준다.


우리는 하얀색을 닮아 모든 화음에 모든 협화음을 낼 수 있게 전개한다. 영혼적인 것이 자유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음향의 울림은 내적 필연성을 만끽한다. 영혼의 순수함은 새로운 미를 발견한다.

하얀색은 그 색이 만드는 그 어떤 원칙이 없었지만 우리는 원칙을 만들고 질서를 만든다.

미숙한 형태로 만들어진 하얀색은 물질의 영역에 또 다른 영역의 추를 만들어서 완전함을 존재시킨다.

우리는 완전한 하얀색을 닮아가는 불완전한 하얀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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