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몽글맹글 Jan 05. 2021

크리스마스이브에 나에게 준 선물

싹이 난 감자와의 동거

독일에서의 연말연시는 슈퍼가 열지 않는 날이 많기에 미리 장을 많이 봐 둬야 한다. 그래서 감자, 양파, 과일 등 신선제품마저도 미리 사서 쌓아두었는데, 이브날, 화이트 스튜를 만들려고 감자를 보았더니 싹이 난 감자가 몇 개 있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집에서만 보내는 것이 아쉬워 화이트 스튜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라도 느껴보려고 했건만 싹이 난 감자라니.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기도 전에 요 몇 개 중 하나를 한 번 심어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언젠가 본 감자꽃이 참 이뻐 보였던 게 떠올라서였을까.


싹이 난 감자 중 그나마 덩치가 작은 감자 하나를 남겨두고 화이트 스튜를 만들어 먹었다. 배도 부르고 따뜻해지니 발코니에 나 두었던 민트의 분갈이 전에 사용한 화분과 분갈이를 하고 남은 허브용 흙을 만지러 나갈 용기가 생겼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나에게 감자가 심어진 화분을 선물하리라, 비장한 마음으로 발코니로 가서 민트를 샀을 때 딸려 온 화분에 흙을 담았다. 감자 위에 흙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는지 감이 전혀 오지 않은 나는, 흙이 위를 너무 많이 덮으면 싹이 뚫고 나오지 못할 것 같아 한 2mm 정도만 덮고 감자를 심었다. 방에 돌아와 혼자 자축하며 감자에게 물을 줬는데, 흙 2mm는 너무 얇았나 보다. 민망할 정도로 감자가 다시 내 눈 앞에 나타났다. 그래서 다시 발코니로 가서 그 위에 3mm 정도의 흙을 다시 올려주었다. 또다시 감자가 나타날 것 같아 물을 못 주겠다. 그냥 흙이 아니라 물에 담가두고 키울 걸 그랬나.


이브 날과 크리스마스 당일에 먹은 화이트 스튜

다음 날 아빠에게 감자 이야기를 하니 웃으시며, 물은 넉넉하게 줘야 한다며 흙을 아무리 덮어도 알아서 싹 틔우고 다 하니 다시 심는 게 나을 거 같다고 하셨다. 다시 심는 것쯤이야, 시작하면 금방인데 시작하기가 참 어렵다. 오늘은 해가 졌으니까 내일 다시 생각해볼래,라고 아빠한테 이야기하고 크리스마스 날은 그렇게 밍기적 거렸다.


12월 26일 아침에 일어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물을 줘봤는데, 역시나, 감자가 다시 나타났다. 진짜 다시 심어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의 절망감은 있었지만 이틀 만에 싹이 난 부분이 좀 더 자란 것 같은 감자 모습에 신기하기도 하고 정말 잘하면 감자꽃을 볼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들었다. 다시금 발코니로 화분과 함께 나가 감자 화분에 들어 있는 흙의 반을 빼고 감자를 화분의 중간 정도에 넣고 그 위에 흙을 담았다. 이번에는 감자가 다시 얼굴을 빼꼼 들이밀지 못하도록 흙 위를 손바닥으로 팡팡 소리가 나게, 하지만 가볍게 4번 두들겨주었다. '옮겨 다니느라 고생했어, 감자야'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물을 주었는데 다행히 이제는 감자가 흙 속에 잘 있어 주어 또다시 감자를 들어낼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감자를 심은 첫 날의 모습

그 후, 이틀 혹은 삼일에 한 번씩은 물을 준 것 같다. 방이 건조해서 그런지 보통은 민트와 로즈마리에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물을 주면 적당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줬더니 말라죽어가는 것 같아 나는 일주일에 두 번 물을 주기에, 자라나는 감자는 좀 더 많은 물이 필요할 거라 생각이 되어 위의 횟수로 물을 주었다.


1월 3일 아침, 민트와 로즈마리에게 물을 주면서 감자에게도 물을 줘야지 하는 찰나, 한 곳의 흙이 우뚝 솟아난 거 같아서 흙을 옆으로 치워줬더니 새싹이 아닌 줄기 같은 게 보였다. 우와, 아빠 말씀대로 감자는 알아서 흙을 뚫고 솟아났다. 사진을 이리 찍고 저리 찍어 가족들과 친구에게 자랑하며, 나는 무언가를 죽이는 손이 아닌 잘 보살피고 살릴 수 있는 손이라며 뿌듯해하였다. 뭔가 내 방에 나 혼자가 아닌 진짜 살아 있는 것과 함께 있는 기분마저 들어 이 날은 자작곡인 감자송을 콧노래로 한참 흥얼거린 것 같다.


우뚝 솟은 대견한 감자 줄기

진작에 식물들을 길러볼 걸 그랬다. 유학생뿐만 아니라 혼자 사는 사람들, 외로움,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 자신을 필요로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 모두에게 추천하고 싶다. 우리 함께 감자를 키워보아요, 노랗고 이쁜 감자꽃을 피워보아요,라고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해 폭죽 금지라고 하지 않았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