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에서 초등학교로
열 살이 되던 그해. 3월이 되어 몇 번 학교를 간 것 같지도 않 은데 갑자기 담임 선생님은 우리에게 ‘국민학교’를 ‘초등학 교’로 바꿔 불러야 한다고 했다. 곧 ‘국민학생’은 ‘초등학 생’으로, 우리 학교의 이름도 ‘OO초등학교’로 바뀌어 불리 기 시작했다. 누가 발 빠르게 움직였는지 교가를 녹음한 테이프 에서도 후렴구 절정의 ‘아아~ OO국민학교~~’ 부분도 기가 막히게 변해 있었다.
‘국민학교’라는 단어에 익숙했던 초딩 1세대들은 새로 붙여 진 ‘초등’이 조금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의 입에서 생소한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그리고 교가를 부를 때마다 서로 를 쳐다보며 키득키득 웃기 바빴다. 새로운 표현에 적응되고, 익숙했던 것이 아이들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잊힐 때까지 조금씩 잡음이 있을 터였다.
어쩌다가 아이들이 ‘국민학교’라고 말 실수라도 하는 순간이면 선생님은 잊지 않고
“국민학교가 아니라 초등학교.”
라고 교정하는 날들이 계속되었다.
관성에 익숙한 우리가 ‘국민학교’를 버리지 못하니 담임 선생님은 그 명칭이 일제시대의 잔재라는 것을 알려주셨다. 일본이 식민 통치를 하던 시절, 저학년 학생들을 위한 교육기관을 세우고 ‘국민학교’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교육은 하되, 결코 조선인들이 일본인들보다 우월할 수 없도록 낮은 수준의 것만 가르치던 곳. 때문에 ‘초등학교’라는 새로운 명칭은 우리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역사적으로 바로잡고자 하는 시도라고 하셨다. 인생 최초의 PC(Political Correctness)였다. 물론 PC라는 단어는 당시 우리에게 익숙한 개념은 아니었지만, 어렴풋이 언어가 문화에, 사유의 방식에, 그리고 무의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득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작 열 살 뿐이었지만 몇몇 조숙한 애들이나 삐딱한 애들을 제외하고서는 우리의 애국심에는 남다른 면모가 있었다. 아이들은 일본과 북한을 천하의 원수로 여겼고 매주 월요일 아침이면 흙냄새 풀풀 나는 운동장에 모여 태극기를 바라보며 아름다운 대한민국 금수강산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곤 했다. 한일전 축구 경기는 챙겨봐야만 했고 심판의 몸짓에, 일본 선수의 반칙에 부들 부들 떨다가도 우리 선수가 넣은 골에는 환호성을 지르며 손에 손잡고 하나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 뿐이었을까. 어른들의 세계 도 아주 다르지는 않았다. 토요일에 회사를 나가는 것도 가족과 나라를 위해 당연하였다. 그와 같은 작은 노력이 반드시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시대이기도 했다. 개인보다 국가의 의미 가 컸다.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 산지가 많아 경관이 아름다운 우리나 라, 수학 잘하는 인재가 많은 우리나라. 여름은 40도 가까이 올 라가고 겨울은 -10도도 넘게 떨어지는 통에 혹독한 기후 속에 서 살고 있다는 것, 산지가 너무 많아 농사를 짓기에 척박했다는 것, 땅을 파도 나오는 지하자원이 없어 사람의 노동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든 후에나 알게 된 사실 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런 불편한 진실들이야 나중에 알게 된 것일 뿐이었고 이제 막 초등학교 3학년이 된 나에게 대한민국 국민일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축복이었다.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나는 국기에 대한 맹세를 주기도문만큼 이나 막힘없이 술술 외울 수 있었다. 학교에서 1학년을 대상으 로 개최한 ‘애국가 쓰기 대회’에서는 최우수상을 탄 적도 있 었다. 1절부터 4절까지 맞춤법 틀리는 것 하나 없이 완벽하게 써냈기 때문이다. 아빠와 함께 애국가를 외운 것이 도움이 되었 다. 아빠는 애국가 가사의 각 절은 우리나라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나타낸 것이라고 했다. 아빠 말대로 1절은 봄의 이야기, 2절은 여름의 이야기, 이런 식으로 대응시키는 방법으로 각 계절을 상상하며 외우니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
애국가뿐이었을까. 태극기 무늬의 ‘건곤감리’의 의미를 아는 것은 물론이었고 눈을 감고도 그 모양을 정확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나라의 꽃은 무궁화요, 동물은 호랑이.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애국가 가사에 대한 문제나, 태극기의 네 모서리를 장식하고 있는 검정 띠 모양의 순서를 맞춰야 하는 퀴즈를 보면 내가 어른들보다 낫다는 묘한 애국적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는 좋은 한국인이다, 라는.
하지만 그즈음 애국심과 관련하여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선생님이 교실에 커다란 교구를 가지고 오신 날의 일이었다. 기다란 각목에 둘둘 말려져 있는 흰색 전지를 펴니 그 안에는 우리나라 지도가, 내 키만큼 큰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나라 지도다. 보다시피 우리나라 지도는 호랑이의 형상을 띠고 있다.”
허리가 꺾인 채 포효하고 있는 호랑이의 모양이라고 했다. 하지만 내 눈에 그것은 호랑이라기보다는 영락없는 토끼였다. 북한 쪽은 토끼의 머리와 귀, 남한은 손과 몸통, 이런 식으로 말이다. 꼭 토끼가 건너편에 있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 손을 모으고 허리를 꼿꼿이 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토끼 같다고 말할까 말까 고민이 되었다. 왠지 그 말을 하면 혼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누군가가,
“선생님, 호랑이가 아니라 토끼 같은데요?”
라는 당돌한 질문을 했다. 내 마음이 들킨 것 같아 조마조마했 다. 선생님은 엄한 목소리로,
“선생님 눈에는 호랑이다. 어떻게 이게 토끼로 보이니?”
라고 하셨다. 교실은 얼어붙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쾅댔다. 영 락없는 토끼인데 선생님은 토끼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이상한 건가?’
선생님은 교탁 앞에서 자세를 고쳐 잡더니 장황한 말씀을 시작 했다.
“일제강점기에 한 일본인 학자가 우리나라를 토끼에 비유한 적이 있다. 이는 조선이 약한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여 일본의 조 선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를 토끼라고 부르는 것은 나라를 일본에 파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다.”
보고 있던 한반도의 지도에는 호랑이 그림이 겹쳐져 있지 않았 다. 그래서 선생님은 열심히 장구채로 지도를 짚으며 어느 부분 이 호랑이의 머리인지, 발인지, 허리인지 설명했다. 선생님의 노 력에도 내겐 호랑이가 보이지 않았다. 상상력을 탓하며 거의 절 망하고 있을 무렵, 토끼 같다고 말했던 그 애가 이런다.
“선생님! 우리가 토끼면 일본은 토끼가 싼 똥 같은데요?”
아이들의 박장대소와 함께, 그리고 선생님의 정말 그렇구나, 라고 하는 것 같은 미소와 함께 팽팽하던 교실의 긴장감이 풀어지고 있었다.
물론 여전히 내 눈에 우리나라 지도는 토끼처럼 보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랑이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한동안 어린 마음에 깊은 죄책감이 되었다. 잊을만하면 그 죄의 목소리는 나에게 내가 얼마나 못된 아인지를 상기 시켜주었다. 친구들과 재미있는 놀이를 하고 있을 때도 문득 그 애들과는 다르게 내 마음에는 아주 더러운 것이 묻어 있는 것 같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했다. 왜 나의 눈에 그것이 호랑이로 보이지 않는 걸까. 나는 나쁜 한국인일까. 나만 고집 부리는 것일까.
하지만 그러는 사이 또 내 마음 한편에서는 토끼가 뭐 어때서? 라는 반항심이 생겨 토끼의 좋은 점을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나도, 우리 엄마도 토끼띠인걸. 토끼는 살생을 하지 않는 평화의 동물인걸.
세상이 국민학교와 초등학교의 구별처럼 아주 또렷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남한과 북한, 한국과 일본, 콩쥐와 팥쥐, 흥부와 놀부, 좋은 것과 나쁜 것. 그와 같은 단순한 세상에서 나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데 왜 한반도의 지도가 토끼처럼 보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