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은 나와 남편의 결혼기념 10주기다. 물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시댁의 가풍을 이어받은 남편은 결혼기념일 선물로 뭔가 오래 남는 좋은 물건을 해주길 바랬다. (전편참조) 5월초 남편은 뜬금없이 "로렉* 사줄까?" 라고 물었다.
10년 전 이맘 때쯤 결혼을 한달여 남겨뒀을 때, 예물 예단 꾸밈비 등 결혼에 필요한 여러가지 돈 드는 일이 거의 마무리 되갈 때 쯤이었다. 1캐럿 다이아와 진주목걸이 세트를 해주셔서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어머님이 전화를 하셨다. "너도... 남편 예물로 로렉*는 하나 해줘야 하지 않겠니?" 먼저 결혼한 집안 조카도 시계 하나 정도는 받았다며 로렉*를 해달라는 시어머니... 그 전까지는 로렉*가 뭔지도 몰랐던 나는 가격을 검색해보고 기절할 뻔했다. 이미 많은 것을 해주신 부모님께 더이상 손벌릴 수 없었던 나는(파혼을 하기에도 너무 때늦었던 나는..) 비상금을 털어서 남편 시계를 사줬다... 억지로 시계를 받아서 미안해진 남편도 나에게 로렉*의 반값 정도 되는 까르*에 시계를 사줬다. 시계들은 참으로 영롱하였다.
결혼후 10년을 사는동안, 결혼 때 받았던 예물 및 구입했던 다른 물건들의 사용 빈도를 생각해보면 이렇다.
- 한복: 거의 무쓸모. 친정오빠 결혼식때 한번 더입음
- 가방: 예물로 받은 샤X 가방. 옷장에 처박아두고 거의 안씀
- 예물주얼리: 다이아반지와 목걸이세트. 예물함에 넣어두고 아주 가~끔 사용
- 예복: 너무 타이트해서 첫째 돌잔치때 딱 한번 더 입고 이후 살쪄서 못입음
- 시계: 데일리로 지금까지도 차고다님
그나마 받았던 것들중 가장 가성비(?)가 높아 뽕을 뽑고도 남는 물건은 나에겐 시계였다. 나이가 들면서 목걸이, 귀걸이를 착용하면 하루종일 두통에 시달리거나 피곤함을 느끼게 되면서, 예물함은 옷장 구석에 처박혀서 나오질 못했다. 예물 스타일 주얼리가 부담스럽기도 했던 탓이다. 다만 시계는 부담없는 단정한 스타일인데다가 시간을 확인한다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기에 매일 차고 다녔다. 이런 나를 10년간 지켜보던 남편은 10주년 선물로 로렉*를 뒤늦게 커플로(!)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크게 물욕이 없는 나는 됐다고 그돈으로 오래된 침구나 바꾸자고 손사래를 쳤지만... 남편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 로렉* 매장에서는 공기만 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일단 제품이 잘 없고, 매장에 들어가기도 힘들다고 했다. 대기번호를 받고 기다려서 입장이 가능하고, 들어간다고 해도 원하는 제품이 없으면 허탕을 치는 경우가 많아서 몇번씩 가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남편은 한동안 검색을 해보더니 지난 토요일 아침, 갑자기 일어나자마자 캠핑의자를 챙겨들고는 "오픈런 하러 갔다올께!" 라며 나갔다.
그리고 곧 "아 늦었네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고 카톡이 왔다. 남편이 보낸 동영상에는 사람들이 끝없이 줄을 서 있었다. 그냥 줄이 아니라 침낭에 드러누워서, 돗자리 펴고서, 간이의자에 앉아서 줄 선 사람들이었다. 아침 8시쯤 도착한 남편은 10시까지 기다린 끝에 대기번호 56번으로 등록되었다. 그리곤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오픈런, 바쁘다면 대행도 가능하다
남편에게 들은바로는. 오픈런 줄을 선 사람들은 아마도 70% 이상이 대행료를 받고 대리로 줄을 서주는 사람들로, 새벽 5시부터 나와서 줄을 선다고 한다. 인스타그램에서 오픈런으로 검색해보면 엄청 그런 대행계정이 많다. 주로 카카오톡 오픈채팅을 이용해 소통한 뒤 이 사람들이 5시부터 줄을 서주고. 오전 10시에 백화점 문이 열릴때까진 구매자 본인이 현장에 도착해서 교체해주어야 한다. 10시에 로렉* 매장 담당자가 대기번호 등록을 해 줄 때는 구매자 본인 휴대폰 번호로 등록을 해야하기 때문이란다.
앞에 선 사람들의 얘기도 엿들었다며 들려줬다. 부부가 아침 알바(?) 개념으로 각각 오픈런을 뛰는데, 시간당 만원, 5시부터 10시까지니까 5만원, 둘이 같이 뛰니까 10만원을 버는 거라고 했다. 오전 10시까지 10만원이라... 나쁘지 않은데? 라고 나는 말했다. 그러나 줄곧 우리는 '이렇게까지 해서 사야된다는게 이해가 안돼' 라는 말을 반복했다.
대기번호를 받았다면? 언제 연락올지 모르니 다른 스케줄을 잡지 않는게 현명
남편이 받은 56번 대기번호 순서가 언제 연락이 올지 알 수 없었다. 남편은 한 사람당 10분 정도 본다치면 50명, 500분, 즉 8시간 정도니까... 아침 10시에 열었으니 저녁 6시쯤 연락이 올거라고 가정하고 토요일 스케줄을 소화하자고 했다. 그런데 막상 하루종일 실시간으로 대기순번을 확인해보니 시간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언제는 순식간에 10번씩 순서가 줄어들더니, 어떤 번호에서는 30분 넘게 멈춰서 있었다. 병원 대기 예약처럼, 구매결정이 오래 걸리는 고객이 꼭 있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대기번호 10번째가 된 6시부터 롯데로 가서 근처를 배회하며 기다려봤다. 연락을 받고 10분내로 매장에 도착하지 못하면 순번이 다음으로 넘어간다고 했다. 대기번호 6번이 됐을 때 금방 될 것 같아서 기다렸는데, 대기번호 4번이 30분 이상을 잡아먹었고.. 대기번호 2번도 그랬다... 저녁을 먹으러 가야하나? 하다가 금방 순서가 올 것 같아서 계속 기다렸는데 진짜 뭐같이 순서가 오질 않았다.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온 것이 낭패였다. 저녁도 못먹고 바깥에 오래 머물러 피곤이 극에 달한 둘째는 정신을 잃고 날뛰었다. 매장 앞 계단과 에스컬레이터, 엘레베이터를 수십번은 탄 것 같다. 나는 땀에 절었고 머리는 떡져있었다. 줄곤 우리는 '집에 갈까?' '이렇게까지 해서 사야된다는게 이해가 안돼'를 반복했다.
매장 앞 계단을 수십번 오갔던 둘째... 어찌하여 쉴수있는 벤치 하나 없는지.
기나긴 기다림 끝에 구입 성공
우리가 결국 매장에 들어선 시간은 저녁 8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다. 남편이 커플템으로 사려하던 모델이 운좋게 있었다. 다시 한번 오픈런과 이 기다리는 짓을 안해도 된다는 안도감에 남편의 표정은 매우 밝아졌다. 나는 좀더 저렴한 모델도 손목에 차봤지만, 말끔하게 차려입은 점원이 '이 모델이 스테디셀러이고 훨씬 고급스럽죠' 라는 말에 그냥 남편이 원래 사려던 모델로 결정을 했다. 내가 구매결정을 하는 동안 남편은 밖에서 애들에게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여주고, 내가 결정한 뒤엔 나가서 애들 보는거 교체 - 남편이 들어와서 결제하고, 다시 남편이 교체 - 나는 들어와서 시계 관련 설명을 듣고... 이런 우스운(?) 모양으로 마침내 로렉* 구입에 성공했다. 한껏 차려입고 와서 구입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는 초라한 추리닝 차림에 떡진 머리가 매우 부끄러워서 얼른 초록색 쇼핑백을 들고 후다닥 나왔다. 집에 오는 길에는 설렁탕을 테이크아웃해서 집에 와서 먹었다.
오픈런 대기 56번의 힘든 하루는 이렇게 마무리되었지만, 영롱한 시계는 내게 남았다. 이 비싼 시계는 매일 차면 괜찮지만, 그대로 오래 놔두면 시계가 멈추기 때문에 태엽을 20바퀴씩 감아줘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날짜가 나타나는 창은 31까지로 되어 있어서, 29일이나 30일이 있는 달은 태엽을 돌려서 날짜를 맞춰줘야 한다고... '너 좀 손이 많이 가는 애구나...왜 이 돈주고 불편하게...' 싶었지만 심하게 반짝반짝 하는 그 시계는 예쁘긴 예뻤다. 오픈런할만.. 한가? 참 신기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