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굶어 죽는 거 아닐까?

프리랜서 플랫폼에 가입은 했는데 놀라울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by 연옥


RCyTqJI4jub0S2TjLws8BwzLajI.jpg 야생의 프리랜서가 고객의 관심을 받으려 애쓰는 모습이다.


예상은 했지만, 퇴사 후 거지가 되는 데에는 세 달도 걸리지 않았다.


두 달 정도 지났을 즈음, 외면하고 있던 은행 앱 푸시 알림을 실수로 눌러버렸다. 황급히 화면을 닫으려 했지만 나의 눈은 이미 통장 잔고를 본 뒤였다. 정확한 액수가 기억나지 않지만 확실히 일곱 자리 숫자는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회사에서 예산 짤 때 실수로 입력을 까먹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작고 귀여운 십만 원 단위의 잔액. 그게 나의 현주소였다.


조용히 앱을 닫았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인가. 다시 노동 시장에 뛰어들어 나와 네 마리 고양이들을 먹여 살려야 할 때. 퇴사했다는 이유로 전보다 저급한 사료밖에 못 사는 무능력한 집사가 되고 싶지 않았기에, 그리고 백수 생활이 일상이 되어 처음의 짜릿함이 슬슬 무뎌지기 시작했기에,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소속 없이 오직 나의 능력으로만 승부를 걸어야 하는 세계에 처음으로 발을 들인다는 생각에 설레기까지 했다.


그런데 잠시만, 그 세계에는 어떻게 들어가는 거죠?



0sWQZdrEPZIelHqEXRoH3yPk6zcMhhO3Peqs-18T0-LYQ4MbowyBqURiu0iMUdgrphY 어떡하긴, 숨고하지. (숨고 광고 아닙니다. 저에게는 직장 비스무리한 존재일 뿐..)


몇 년 전, 학생이던 시절에 갑자기 동양화를 배우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일대일 클래스를 찾아다닌 적이 있다. 그때 추천받은 앱 중에서 ‘숨고’라는 게 있었는데, 고객으로 가입해 내가 원하는 클래스에 대한 설명을 입력하면 이를 확인한 ‘고수’들이 견적서를 보내주는 방식이었다. (앱의 이름인 숨고는 ‘숨은 고수’의 줄임말이라 견적을 받으면 발송자의 이름 옆에 ‘ㅇㅇㅇ 고수’라고 적혀있었다.)


요청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강서구의 고수, 경기도 고양시의 고수, 기타 전국구 고수들의 견적이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마치 재야의 무림 고수들이 나의 제안에 화답하는 편지를 화살에 꽂아 쏘아 보내는 느낌이라 웅장한 기분을 느꼈다.


이후 몇 분과 대화를 나눴지만 그 누구와도 거래가 성사되지 않았는데, 정성스럽게 보낸 견적서를 무시하는 기분이라 되려 죄송스럽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동양화를 향한 열정은 금세 사그라들었고 숨고와 나의 인연도 끝난 줄 알았다.


이제는 내가 ‘고수’가 되기 위해 다시 가입하게 될 줄은 몰랐지.



99DA30425BB22FA811 고수: 너냐, 오늘 가입한 신입 고수. (언짢)


생각보다 가입 절차가 싱겁게 끝났고, 나는 나의 이름 세 글자 옆에 박혀있는 ‘고수’를 음미했다. 고수, 아직도 내가 어느 분야의 고수가 될 건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호칭을 얻어버렸다. 전에 영어를 가르쳐 본 적은 있었지만 하도 오래되어 전부 잊어버렸고, 그나마 학창 시절부터 꾸준히 했었고 최근에도 지인들의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던 자기소개서 첨삭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3초 정도 고민하고 나의 첫 번째 서비스로 ‘이력서/자소서 컨설팅’을 등록했다. 어렵지 않네. 이걸로 내가 고수 자격을 획득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고수로 이름을 떨칠 분야를 정했으니 반은 해결한 것 같았다.


프로필 작성을 하는 건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최근에 찍은 사진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아 무려 스물세 살 시절 사진을 찾아와 대문짝만 하게 걸었다. 양심 없지만 비대면으로 일할 거니까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한 줄 소개에는 얼마 남지 않은 양심을 모두 덜어내는 마음으로 ‘취업 컨설턴트’라고 적었다. 자격증을 따야만 얻을 수 있는 호칭은 아니니까 사기는 아니라고 다시 한번 다독인 뒤 넘어갔다.


서비스 설명으로는 간소한 이력과 지금까지의 첨삭 경험을 정리했다. 그래도 지난 몇 년간 여러 회사와 학교에 지원하는 사람들을 도왔고, 나 역시 많은 자기소개서를 써 봤기에 생각보다 할 말이 많았다. 그래도 공란으로 남겨두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괜히 어깨가 펴졌다. 후훗, 나도 ‘고수 프로필’이라는 게 생겼어!




물론 고객을 받게 되기 전까지 마지막 한 단계가 남아있기는 했다. 바로 캐시를 구입하는 것. 한 푼도 못 번 상태에서 사비부터 들여야 하는 건 가슴 아팠지만, 숨고는 고객이 보낸 요청서에 견적을 보낼 때마다 캐시가 필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캐시가 그러하듯 큰 단위를 구매할수록 할인율이 높아지지만 나는 손을 떨며 가장 적은 돈을 들일 수 있는 옵션을 선택했다. 다른 사이트로 갈아타거나 갑자기 로또라도 맞게 되면 캐시가 쓸모없어질 수도 있어서 그런 거지, 절대 내가 지금 거지라서 그런 건 아니라고 믿기로 했다.


이제 진짜 준비 끝. 호객 시작이다. 캐시를 결제한 뒤에 도착한 모든 고객 요청서에 빠짐없이 견적을 보내 두고 고객이 대화를 시작하길 기다렸다. 10분 뒤, ‘고객이 견적을 확인했습니다’라는 푸시 알림이 도착해 깜짝 놀랐다. 나의 첫 고객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견적을 읽어주다니!


나의 상상력은 이미 통장에 고객이 입금한 돈이 꽂혀서 그걸로 마라탕을 먹을지, 마라상궈를 먹을지 고민하는 시점까지 달려가고 있었다. 돈이 궁해진 이후로는 내가 만든 맛없는 음식만 먹어야 해서 고달팠는데, 오랜만에 혈중 마라 농도를 채우는 날이 바로 오늘인가. 곧 만나게 될 화끈한 맛을 기대하며 미뢰들이 춤추는 동안 견적을 읽은 고객의 회신을 기다렸다.



img.jpg 기다리기. 좀 더 빨리 기다리기. 더 기다리기. 기다...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렸다.

마라탕을 먹기에 너무 늦어버린 시간까지 오래 기다렸다.


내 견적을 읽었다는 알림이 몇 개 더 도착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앱을 닫고 딴청을 피워봤지만, 다시 들어갔을 때 나와의 채팅창을 나간 고객이 생긴 걸 보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다음 요청서에 견적을 보내려 했지만 캐시가 부족하다는 알림창이 떠 버렸다.


당연히 캐시를 더 충전하려고 했는데, 결제 버튼을 누르려던 나의 손가락이 망설였다. 과연 이 돈을 쓴다고, 더 많은 고객들에게 견적을 보낸다고 나에게 기회가 돌아올까? 이전에 몇 번 첨삭 부탁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해서 내가 이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한 건 아닐까?


통장이 바닥을 보이기 전까지 과연 일을 한 건이라도 따올 수 있을까?


앞으로도 길게 이어질, 고수 아닌 하수 프리랜서의 고뇌를 처음으로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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