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싼 수업료를 내고 배운 사실
작년 가을이었다. 21코스를 걷기로 계획하고 제주행 비행기 표를 예약했다. 21코스는 하도리에서 종달리까지 11.3km로 비교적 짧고 난이도가 높지 않은 편에 속하는 길이다.
일기예보에 비소식 있어서 우산과 우비를 챙겼는데 떠나는 날 아침에 제주 전 지역 태풍예보가 떴다. 기차나 버스를 이용한 육지에서의 여행이었다면 수수료를 내고서라도 취소했겠지만, 비행기는 당일 취소하면 취소 수수료가 비싸고, 특가로 구입한 표는 환불불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안했지만 어쩔 도리 없이 떠나야 했다. 우산과 우비를 챙기면서 혹시나 비가 너무 많이 오면 올레 걷기는 포기하고 운치 있게 드라이브나 실컷 하자는 마음도 살짝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날은 늘 같이 가는 동무 J와 '자기도 꼭 한 번만 데려가 달라'라고 사정하던 S가 동행하여 셋이 떠나게 되었다. 평소에 성격이나 취향이 맞지 않는 S와의 여행이 솔직히 염려스러웠다. 역시나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S는 아침에 아무것도 못 먹고 와서 멀미를 한다며 출발하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간단하게 빵이라도 챙겨 먹고 오라고 미리 당부를 했어야 했나? 세 살도 아니고 열세 살도 아닌, 마흔세 살의 어른에게 일일이 알려줬어야 했나?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J와 나는 우리만의 올레 루틴이 있다. 새벽 비행기로 출발해 공항에 도착해 렌터카를 인수하면 대략 8시에서 8시 30분이 된다. 그럼 먼저 드라이브 스루에서 커피를 사고, 근처에 미리 검색해 둔 김밥집에 가서 김밥을 한 줄씩 산다. 올레시작 지점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커피와 함께 김밥을 먹는다. 운전을 하면서 김밥을 먹는 게 조금 불편하지만, 그것도 나름 재미있어 했다. 당일치기로 길을 걷고 집으로 가야 하는 우리에겐 시간이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아낄 수 있는 시간은 최대한 아껴야 했다. 그런데 S는 '네? 김밥을 차 안에서 먹는다고요?' 하면 정색을 했다. 미안한 마음보다 실망스러운 마음이 컸다. 아침으로 김밥을 사서 이동하면서 먹는다고 분명히 이야기했는데, 잊은 건지, 아님 듣지 않은 건지 되묻지 않았다. 김밥에 모래라도 넣은 것처럼, 불편한 마음이 지금거렸다.
하도리로 가는 차 안에서 랜트카는 어디서 빌리는 게 싼 지, 숙소는 어디가 깨끗한 지, 아이들과 함께 하는 관광지는 어디가 좋은지, 동선은 어떻게 짜는지, 사실 오늘 자기는 답사 온 거라고 깔깔거리며 말하는 S가 얄미웠다. 난처해하는 J의 얼굴을 보니 내 마음이 거기에 묻어있었다. 올레 여행에 대한 기대가 한순간에 꺼져버렸다. 마음이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걸어 보자고 왔으니, 우리는 출발했다. 해녀박물관 앞에서 출발 도장을 찍고 100여 미터를 걸었다. 비바람이 세차서 도저히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우산은 뒤집어지고, 옷은 홀딱 젖었다. S는 우비도 가져오지 않았다.
걷은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애초에 비행기표를 취소할 걸 하는 후회가 바람을 핑계 삼아 내 뺨을 때렸다. J와 나 이렇게 둘이었다면, 멀미하는 사람도, 차에서 밥을 먹냐는 불만도, 미처 챙기지 못한 준비물도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악조건이었어도 반이라도 걷자고 길을 나섰을 것이다. 이 여행을 망친 것은 태풍이 아니라 S라고 계속 생각했다.
날씨가 궂어도, 가는 길이 멀어도, 일정이 빡빡해도, 음식이 조금 입맛에 맞지 않고 몸이 조금 힘들어도 이 모든 것이 맘이 맞지 않는 사람과 여행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여행하는 동안에도 마음이 불편하고, 다녀와서도 영 개운하지 않았다. '함께'라는 단어가 민망할 정도로, 몸은 함께 하고 있지만 마음은 함께가 아니었다. 여행이 고행이다. 떠나온 것을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역시 여행은 좋아하는 사람과 가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마음이 잘 맞는 이들은 미리 약속하지 않아도 제일 먼저 '배려'라는 준비물을 챙긴다. 배려는 손수건이다. 차가운 의자에 앉게 하는 것이 싫어서 손수건을 깔아주는 것처럼 배려는 동행하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있으면 약속한 듯 서로를 배려해 주는 그런 벗이 있다면 인생이라는 여행도 내내 즐거운 여정이겠다.
제주에 다녀와서 나는 S와 절연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사람인지라, 누군가와 인연을 끊어내는 일이 몹시 씁쓸하고 아팠다. 하지만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과 여행을 가고자 했던 과거의 내 선택을, 비행기표를 취소하지 않은 내 선택을 후회한다.비싼 값을 치르고 배운 진리를 두고두고 잊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