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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Feb 18. 2021

나의 우물

글의궤도 4호

관객의취향에서는 매일매일 글쓰는 모임 '글의궤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의궤도 멤버들의 매일 쓴 글 중 한편을 골라 일주일에 한번씩 소개합니다. 아래의 글은 매일 쓴 글의 일부입니다.


우물 안 개구리인 나는 그 우물을 참 좋아했고, 그 안에서 보는 하늘도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아꼈지만 이제는 예전같지 않은 사람들과의 지난 대화를 읽어보곤 한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나를 진하게 아프게 했던 H와의 대화를 보았다. 스며드는 마음이야 말로 가장 빠져나가기 힘든 것이 아닌가 싶다. 천천히 빠져들어가다가 결국에는 물들어 버리게 된다.

‘사랑’이라는 우물 안에 빠져 H라는 하늘을 보게된 계기를 사실은 정확하게 알고 있다. 대부분이 선망하는 그의 외모도 나에게는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심지어 활동 초반에는 거의 얼굴 볼 일도 없었던 것 같다. H를 처음 인지하게 된 건 내 노래를 듣고 그 다음날 아침 내가 떠올랐다는 그의 말을 누군가를 통해 전해들었을 때였다. 생각해보면 그저 좋은 말을 해주기 위해 H의 말을 매개체로 썼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H는 독특한 표현법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내가 너무 많은 의미를 두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아이한테 마음을 열게된 계기라는 것은 명확하다. 내 인생의 가장 회색의 날들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그는 나의 구원자였다. 그 아이를 알게된지 한참 후에야 그 아이랑 처음으로 제대로된 대화를 했고 나는 그 아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는 5월의 어느 밤에 새내기들이 만든 천막 안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이제까지는 누구도 나에게 털어놓지 않았던 고민을 그 아이가 털어놓았을 때 나는 그 우물에 빠졌다. 그 아이도 사랑에 대한 고민을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만 같았던 그 아이는 사실 굉장히 여린 마음을 가지고 있는 아이였고, 나는 그 모습에 내 유일한 탈출구인 밧줄을 잘라버렸다. 물론 H도 사람인지라 실망할 때도 있었지만 내가 잡고 올라갈 밧줄은 이미 끊어지고 없었다. 그때 이미 나는 H라는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지났다. 나는 그 아이가 기댈 수 있는 나무였다. 어쩌면 언젠가는 필요 없어질 수도 있는, 오직 그 아이를 위해 존재하는 나무. 돌이켜보면 모를 수 없었을 것 같다. 그때는 나도 어렸고 나 자신보다는 그 아이가 더 중요했기에 그를 놓치지 않는 데에 급급했다. 그게 어쩌면 내 사랑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을지도.

오랜 시간 혼자 지내면서 나는 왜 이제까지 혼자였을까, 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졌다. 이유는 몇 개일지 모르지만 이제 그런건 세지 않기로 했다. 사랑받을만한 모습들을 고민해왔다. 누군가의 시선에서 보는 나는 어떨지 먼저 생각하고,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사랑을 빙자한 고문이었다. 진부한 깨달음이지만 내 자신을 먼저 사랑했을 때 비로소 나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이제 깨달았다.

뉴욕에 있는 동안에는 걔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 깜빡하고 선물을 사오지 않았다. 미안하면서도 내심은 기뻤다. 상처만 남을지라도 우물벽을 타보자. 다행히 H에게 줄 수 있는 물건이 하나는 있었다. 그 아이는 글을 많이 쓴다. 그 아이를 만나는 그 날, 미안한 선물을 건네는 그 순간이 나를 우물 안으로 밀어넣은 다름 아닌 걔의 손을 잡고 우물을 빠져나오는 마지막 도약이 되었으면 좋겠다. 건네주면서 딱 한마디만 하고 싶다: 너 글쓰는거 좋아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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