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의궤도

달리는 사람

글의 궤도 1호

by 유영

관객의취향에서는 매일매일 글쓰는 모임 '글의궤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글의궤도 멤버들의 매일 쓴 글 중 한편을 골라 일주일에 한번씩 소개합니다. 아래의 글은 매일 쓴 글의 일부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간단한 아침을 차려 먹은 후 옷을 입는다. 귀찮긴 하지만 옷을 입으면 어쩔 수 없이 나가야한다. 뛸 때는 온 몸이 땀으로 젖기 때문에 옷은 가볍게 입는다. 어쩔 수 없지. 나가야지, 하고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면 바깥의 찬기가 온 몸으로 밀려들어온다.


퇴사를 한 후 가장 큰 결심은 밤 낮이 바뀌지 않게 하기였다. 백수인데 뭐 어때, 싶지만 한 번 바뀐 밤낮은 좀체 원상태로 복구하기 힘들다. 29년을 살아오면서 대충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 때문에 늘어지면 늘어지는 대로 뒹굴 거린 내 모습이 선했다. 그것 역시 뭐 어때, 싶지만 문제는 그러고 나면 분명히 이래선 안 된다며 자괴감에 빠질게 뻔하다. 자괴감에 나를 방치하지 않는 것이 최선의 과제였다.


작년엔 코로나로 핑계 반 강제 반으로 운동을 제대로 못했다. 그나마 내 체력을 유지시켜주고 있던 활동이 빠져 버리니 지난 여행 때 입었던 옷들은 하나도 못 입게 되어 버렸다. 거의 1년 만에 올라가 본 체중계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그래서 새해 많은 사람들이 다짐했을 법한 다짐을 나 역시 적어 두었다.


운동하기. 살을 빼기.


하지만 그런 얼렁뚱땅한 목표로는 제대로 안 할게 뻔 하니 꽤 근사해 보이는 목표로 이름을 바꾸었다.

30분 이상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되기.


하루에 1분 뛰고, 2분 걷기로 시작했던 달리기 어플은 어느새 내일이면 2분 30초를 뛰고, 2분 걷기를 6번이나 하라고 한다. 현관문을 열 때는 왜 이런 목표 같은 걸 정해버렸을까 싶지만 새벽녘을 달려 공원에 도착해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면 하루의 시작부터 노력했구나 싶어 마음이 벅차오른다.


TV 프로그램 <달리는 사이>에서 한 출연자가 목표점에 도착해 복받치듯 눈물을 터트리는 장면을 보았다. 그는 전날 밤 자신에게 어떤 한계가 있는 것 같다며 눈물을 보였다. 그가 목표점에 도착하자 함께 뛰던 다른 출연자는 그를 안아주며 이야기해준다. 한계가 없음을 알려주고 싶었다고. 몇 번이나 포기할 것만 같은 달리기를 함께 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보며 언제가 뭣도 모르고 나갔던 하프 마라톤 경기가 생각이 났다.


연습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청바지를 입고 손에 핸드폰을 뛰고 달리던 나는 10km 반환점을 돌고 돌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마주쳤다. 아직 반환점까지도 못 왔다는 생각에 온 몸의 힘이 다 빠진 채였다. 하프는커녕 10km도 나에게는 벅찬 코스였다. 달리기를 멈추고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던 순간 걷고 있는 나를 보며 이름도 모를 많은 사람들이 힘내세요! 라고 짧게 외치며 뛰어 나갔다. 나는 그날을 기억하며 친구에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힘내라는 말을 들어본 날이었어. 그래서 그게 좋았던 것 같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힘내라고 응원해주는 날이 있다는 게. 물론 친구는 내 얘기를 듣더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지만.


너 정말 감상적이다. 아니, 칭찬이야. 좋게 받아들이면 좋은 거지.


언젠가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지만 (코로나가 사라지고, 내 체력이 좋아진다는 두 가지 의미로) 아직까진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뛰고 있는 순간엔 나도 나에게 힘내라는 말을 자주하는 사람이 되니까.


목표점에 도달해 눈물을 터트리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맞아. 저런 감정이지. 아직까지 2분 달리기 주자인 나도 알 것 만 같다. 고작 2분인데도 왜 내 다리는 이렇게 무거운지. 또 다시 힘을 내서 뛰라고 말하는 얄미운 어플의 목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며 뛴다. 2분이 훌쩍 지나가길 바라며. 이렇게 열심히 뛰었는데도 1분이나 남았다는 소리에 절망하며.

다음 회 차는 몇 분이나 뛰라고 할까 살짝 염탐해보니 아직까진 2분 30분초 대이다. 다음주 부터는 3분이던데.... 3분이라고 하면 막연하지만 그래도 2분을 뛸 수 있었으니 2분 30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조금씩 늘리다보면 정말 30분은 가볍게 뛸 수 있는 사람이 될까. 작심 3일차를 그럭저럭 넘긴걸 보아 그래도 올해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일은 한파라고 한다. 한파인데 나가야 할까.... 내일의 나는 과연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을까. 알 수 없다. 내일의 나에게 조금 더 기대를 걸어봐야겠다.


[관객의취향_취향의모임_글의궤도_R]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엽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