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운야 Mar 22. 2019

퇴사자의 푸념

퇴사와 입사를 반복하는 생



  항상 일을 그만두고 나면 병이 난다. 그동안 뭉쳐있던 응어리들이 고개를 들고 참아왔던 아픔을 앞다퉈 호소하듯이 그렇게 병이 난다. 열이 오르면서 오한이 들기도 하고, 그동안 잠잠하던 날개뼈가 찌뿌둥하니 염증이 도지기도 한다. 복통에 설사까지. 이 정도면 한 번에 아프지 말고 조금씩 나눠서 아팠으면 좋겠다는 심정. 새삼 내일 갈 곳도 없는 처치가 됐는데 몸까지 아파버리니 조금 서럽기까지 하다.


  끙끙 지고 오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아 한결 홀가분하긴 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에 90퍼센트는 서운함과 미련이 떡 하니 차지하고 있다. 이상한 일이다. 그만큼 애정이 있었다는 걸까. 이 정도 선에서 그만두는 게 맞다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남의 말에서 당위성을 찾았다. 난 어쩌면 도망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만둔다고 말했을 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이 ‘도망치는 건가’였을까.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이 정도면 됐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의 시간을 달려왔으니 이제는 조금 내려놓을 때도 되지 않았나.


  나도 모르게 속 안에 쌓여온 것들이 많았다. 그 독을 치료할 시간 정도는 자신에게 주어도 좋지 않을까. 내가 더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싶듯이, 정들었던 이 코너도 다양한 제작진의 손에서 새로운 것으로 더 바람직한 것으로 발전하고자 할 것이다. 속이 울렁울렁거린다. 어쩌면 나는 엄살쟁이에, 꾀병까지 탑재한 울트라 감성 덩어리 인지도 모른다. 이 정도에도 새벽 3시가 다 돼가는 시간까지 잠도 못 자고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지.


  이제 내 앞에 어떤 길이 펼쳐질지는 나도 모른다. 이게 이 일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계획한 대로만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 더 근사한 내일 혹은 더 불행한 내일, 어떤 내일이 기다릴지 지금의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사람은 불안감 속에서 더욱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법이다. 어찌 됐든 더 신중할 필요는 있다. 어렵게 떠나온 만큼, 다음에 머물 곳에서는 지금보다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되니까. 더 나아지진 못 하더라도 후퇴하진 말아야지. 나는 꾸준히 대본을 써내려 갈 것이고, 그게 어떤 프로그램이든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해낼 수 없다는 확신이 들면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도 가져가기로 했다. 무조건 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군가에게 두 배로 힘이 드는 일을 떠넘기는 행위일 수도 있다.


  사람의 관계에 대한 고뇌, 혼자만의 시간 속 잡념, 인생의 의미, 앞날에 대한 고민 등은 이렇게 일을 내려놓고 쉴 때 더 자주, 더 깊게 그리고 잔혹하게 찾아온다. 난 앞으로 몇 날 며칠을 잠을 못 이루며 괴로워할 것이고, 자주 글을 쓰게 될 것이다. 나는 글을 쓰고 싶은데 일을 하고 있을 때는 글이 잘 써지질 않는다. 다른 쪽으로 나의 에너지와 글의 쏟을 열정을 허비해버리는 기분이랄까. 항상 전력을 다해 뛰고 나면 산책할 여력이 나지 않는 법. 항상 헉헉 거리며 숨만 고르고 앉아 있다가 혼자만의 시간을 다 써버리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남아도는 게 시간.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잘 쓸 것인지가 관건이다.


  나는 이렇게 밤이 깊거나 혼자만의 시간이 길어지면 자꾸 어딘가로 떠나는 티켓을 찾아보게 된다. 아직 백수가 된 것이 실감이 날 정도의 시간은 흐르지 않았지만 (어제까지 회사에 있었다.) 쉬는 동안 하고 싶은 일들이 더 생각날지도 모른다. 지금은 무계획이 좋다. 그리고 건강을 돌봐야겠다. 날개 뼈가 아픈 건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염증이 날 곳이 없어서 비좁은 날개 뼈 사이에 돋다니, 참. 왼쪽 팔까지 조금씩 저려온다. 이건 목 디스크 전조증상일지도 모른다. 디스크 오면 답 없다. 배가 아프고 설사하는 건 마지막 생방송 날 회식 때 주체 못 하고 술을 마신 탓에 온 장기들이 발악 중인 거겠지. 그리고 몸이 춥고 아픈 건 오늘 푹 자고 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그래, 하나씩, 하나씩. 이제 조금씩 잠이 온다. 책을 좀 읽다가 잠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2017/4/27


- 이게 벌써 2년 전의 일기라니.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고민을 하는 건 여전하구나.

이전 04화 너의 세심함이 가끔은 두렵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