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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Jan 01. 2023

요즘 감정이입이 너무 잘돼서 힘들어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는 상담소> 제1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는 상담소>는 지난 2년간 두 여자, 유영과 캘리의 내밀한 이야기가 담긴 편지를 시간순으로 엮은 공동매거진입니다. <잃시상>은 평범한 직장인 유영이 우연히 심리상담전문가 캘리를 만나 서로의 감정일기를 편지 형식으로 나눈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던 유영이 캘리의 피드백을 받으면서 감정의 바다에서 유영(游泳)할 수 있게 되는 성장 스토리입니다.


제1화 ‘요즘 감정이입이 너무 잘돼서 힘들어요’는 유영이 감정일기를 처음 쓰게 되면서 겪은 동네 자살소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유영과 캘리, 두 여자가 감정일기를 교환하면서 풀어가는 이야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는 상담소>는 격주로 발행됩니다. 다음 이야기는 1월 15일 일요일 오전 9시에 이어집니다.




요즘 감정이입이 너무 잘돼서 힘들어요



안녕하세요. 캘리선생님. 공대생의 심야서재 매일일기 쓰기 이벤트의 인연으로 감정일기를 알게 되어서 기뻐요. 선생님 블로그를 보니 저처럼 감정을 쌓아두고 회피하는 사람은 꼭 감정일기를 써야 하네요. 4주간 매일일기 쓰기 미션에 성공해서 선생님을 만났으니 감정일기도 완주할게요. 이번 주는 감정이입이 너무 잘돼서 힘들었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날이었어요. 그날의 하늘은 떨이 상품처럼 추레했어요. 저는 그 하늘을 보며 쓰레기장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어요. “그래, 사람과 쓰레기는 재활용하는 게 아니지. 버릴 건 버리자”라고 저 자신도 알듯 모를듯한 말을 지껄이면서요. 그러다가 그 추레한 하늘을 등지고 5층 옥상 난간 주변을 불안하게 서성이는 그 애를 보게 되었어요. 질질 끌던 슬리퍼 소리를 죽이고,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보라색 종량제 봉다리를 조용히 내려놓았어요. 봉다리에서 해방된 손으로 주머니의 핸드폰을 꺼내 119를 막 누르려고 하는 참에 ‘삐용삐용’ 소리가 들렸어요.


소방관 아저씨들이, 아니 사실 저보다 20살은 어리다고 해야 하나요. 젊다고 해야 하나요. 젊다고 할게요. 그 젊은 소방관은 잘 훈련된 솜씨로 에어매트를 재빠르게 펼쳤어요. 소방관이 주변 정리를 하자, 경찰들이 몰려왔어요. 모두 그 애를 주시하고 있었죠.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요. 그 아이는 옥상을 올라가면서 직접 신고를 했다고 해요. “나~올라가요” 하고… 여경의 끈질긴 설득에 터벅터벅 걸어오는 그 아이는 맨발에 겉옷도 없이 떨고 있었어요. 아이의 떠는 모습을 보니, 저도 떨렸어요. 그 애가 누군지, 어떤 영문인지는 모르지만, 그 아이의 심정은 알 것 같아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요.


그 아이는 생채기 하나 없이 무사했어요. 그러나 저의 감정은 무사하지 않았어요. 지구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 사과처럼 제 감정은 깊은 곳으로 추락했어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은 그레고르 잠자처럼요…그 애처럼 몸이 떨리고, 발끝이 시렸어요.


선생님 요즘 감정이입이 왜 이렇게 잘되는 거죠?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가요. 글쓰기 덕분에 관찰력이 생겨서 그런 건가요. 주변에 일어나는 일과 저의 기억이 슬라이드처럼 빠르게 겹쳐 보여요. 그 아이의 맨발에서 저의 맨발이 보이는 거죠.


갑자기 웬 맨발 이야기 인가, 궁금하시죠. 30년 전 이야기예요. 그 아이가 등진 하늘처럼 하늘이 잔뜩 인상을 쓴 그런 날, 바람이 노래하는 날, 기분 나쁠 정도로 맑게 개인 날, 구름이 힘없이 질질 끌려다니는 날, 그런 날이면 마음의 준비를 했어요. 아버지는 기분에 따라, 알 수 없는 날씨에 따라 쇳소리를 내며 저를 혼냈어요. 매 앞에 장사 없다고, 그때는 아버지에게 한 번도 대들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몰드가 들어간 브래지어를 입기 시작하면서 그간 아버지의 따귀 세례 값을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지만, 제가 어른처럼 브래지어를 입었다고 해서 합스부르크 막시밀리안 1세가 갑옷을 입은 것처럼 힘이 생긴 건 아니더라고요.


아버지와 첫 대거리를 한 날, 따귀 값은커녕 본전도 못 건진 저는 맨발로 집을 뛰쳐나가 어느 건물 지하실 층계참에서 한 시간 넘게 숨어있었어요. 그 아이처럼 저는 엄마의 설득에 맨발로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어요. 30년 전 그때, 저도 그 아이처럼 죽고 싶었어요. 이런 기억 때문일까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그 아이의 맨발에 감정이입이 되어서 해넘이를 볼 때까지 우울의 바다에서 허우적댔어요. 그러다가, 창밖에 처녀설이 수줍은 듯 내려앉은 걸 봤어요.

“저 어린 눈도 밟히고 짓이겨져 딴딴해지겠지, 그러다가 언젠간 또 녹겠지”

이런 생각으로 저를 위로했어요.


그날, 감정이입으로 힘들었던 건, 나에게도 그런 슬픔의 경험이 있기 때문일까요? 무슨 영국 경험론자 같은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네요. 제가 경험한 거니까, 그 아이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는 거겠죠? 그 애의 아픔과 내 아픔이 만났으니, 언젠가는 녹을 수 있을까요? 선생님이 블로그 쓰신 글에서 이런 문장을 봤어요.

 “나를 힘들게 하는 일이 생기면, 내가 또 뭘 얻으려고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 보라”

감정이입이 너무 잘 돼서 힘든 이런 일에서 제가 뭔가 얻을 게 있을까요? 첫 감정일기를 써보니 편지 같기도 하고, 일기 같기도 하고, 수필 같기도 하네요.


첫눈 내리던 그날의 하늘, 그 아이와 저의 맨발을 기억하며 캘리선생님께 첫 감정일기를 보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는 상담소>는 격주에 한 번 일요일 오전 9시에 발행됩니다.

1월 15일 일요일 오전 9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는 상담소> 제 3화로 이어집니다.


본 감정일기를 읽은 후 (아래 링크) 심리상담전문가 캘리의 피드백을 읽으시면 화나고 우울한 감정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심리상담전문가 캘리의 피드백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주는 상담소> 제 2화 왜 그렇게 감정이입이 잘 될까요? 우리 함께 살펴 보아요.

https://brunch.co.kr/@ksh326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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