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이 드리운 이들의 쓸쓸함 (김종관/연우진/아이유/김상호)
감독: 김종관
장르: 드라마, 옴니버스
출연: 연우진, 이지은(아이유), 김상호, 이주영, 윤혜리
개봉일: 2021.03.31
러닝타임: 85분
<아무도 없는 곳>은 <더 테이블>, <페르소나-밤을 걷다>에서 느꼈던 '김종관' 감독의 작법과 감성이 강하게 담긴 작품이다. 주인공 '창석(연우진)'을 중심으로 여러 인물의 이야기들이 대화 형태로 스쳐지나가는데, 옴니버스식 구성이지만 주인공이 동일하다는 점에서 단편의 연작 소설을 보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 든다.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창석과 대화하는 4명의 인물이 모두 아무런 접점이나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인물들이 서로 동떨어져 있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의 공통점으로 귀결된다. 이별과 죽음을 비롯한 경험에서 발현된 상실감을 드리운 채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 애써 담담한 척 창석과 편안한 대화를 주고 받지만, 이들의 눈동자에는 심연 과도 같은 쓸쓸함이 고여 있다. 이는 그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기만 하는 창석에게도 해당되는 특징이다.
극은 지하철 역 카페에 앉아 있는 창석과 '미영(이지은)'의 장면으로 시작된다. 잠시 졸고 있던 미영은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창석을 알아보지 못하는데, 창석은 미영을 이미 전부터 알아왔던 눈치다. 창석은 미영에게 자신이 상상해 낸 이야기를 들려주고, 미영은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서도 이야기에 장단을 맞춰준다. 대화를 나누던 와중 미영의 모습이 '아이유'에서 '문숙' 배우로 전환되는데, 아마 미영은 치매에 걸린 창석의 어머니고, 젊었을 때의 기억으로 돌아간 상태라 등장하는 배우의 모습을 달리 한 것이라 유추해볼 수 있다. 아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놓인 미영은 자신의 기억과 먼저 떠난 남편에 대한 상실감에 빠져 있는 인물이다.
소설가인 창석은 몇 년간 영국에서 거주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고, 자신의 후배이자 출판사 직원인 '유진(윤혜리)'을 만난다. 유진은 인도네시아 유학생과 연애를 하다가 최근 이별을 겪었고, 그와의 사이에서 생겨난 아이를 지웠다고 한다. 유진은 창석이 만나는 인물들 중 가장 밝은 목소리로 자신의 과거사를 털어놓지만, 그 역시 이별에 대한 상실감을 지니고 있다. 컴컴한 저녁, 인물들의 모습마저 제대로 비춰지지 않는 장면 속에 뿌옇게 타오르는 인도네시아산 담배만이 그의 외로움을 대변한다.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사진작가 '성하(김상호)' 역시 창석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지만, 유방암에 걸린 아내로 인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는 인물이다. 아내가 먼저 떠나면, 함께 따라가기 위해 청산가리까지 준비해 놓았을 정도로 사랑이 극진하다. 성하는 진실인지 아닌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기적에 가까운 이야기를 술술 풀어 놓으며 아내의 의식이 돌아온 소식을 신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의 상기된 심정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아내가 사망했다는 전화 통화를 건네받는다. 단 몇 분만에 뒤바뀐 그의 기분은 이내 무거운 짐이 되며 터덜터덜 병원으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창석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바 안에서 만난 바텐더 '주은(이주영)'은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과거의 기억이 조각의 형태로만 남아있는 인물이다. 수많은 기억을 잃어버린 탓에 기억에 대한 소중함을 아는 사람인 탓일까. 그는 술 한 잔을 창석의 기억과 맞바꾸고, 창석에 관한 시를 읊으며 녹음기에 기록한다. 상실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작은 기억이라도 소중히 대하려고 하는 그의 태도가 반영되었음이 느껴진다.
각자의 사연을 갖고 있는 네 명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만 주던 창석에겐 어떠한 일이 있었을까. 늘 담담하고 평온한 미수로 응수하지만, 그의 건조한 말투와 잿빛 표정은 그에게도 평범치 않은 사연이 있음을 암시한다. 서울의 밤골목을 기웃거리며 공중전화 앞에서 여러 번 망설였던 그는 이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통화 상대는 극중 이혼한 것으로만 비춰졌던 영국에 있는 아내. 아내는 창석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걸 견디기 힘들었던 창석이 관계를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인다. 관계를 회복할 수 없겠다는 것을 재확인해버린 창석은 허공에 맴돌던 자신의 외로움과 상실감에 대한 근원을 완전하게 깨닫는다. 그렇게 슬픔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좁고 어두운 거리를 쓸쓸히 걸어간다.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그 사람들과 대화하는 장면들이 주된 플롯이라는 점에서 감독의 작품 중 <더 테이블>과 유사하기는 하다. 하지만 감정의 깊이나 분위기 면에 있어서는 <페르소나>의 <밤을 걷다> 단편에 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에 비해 심도 깊은 감정선을 다루고 있고, 내용도 훨씬 무겁다.
잘 알지 못하는 인물들의 대화만 있을 뿐, 사건이나 흐름의 전환이 없어 다소 지루함을 느낄 수 있다. 감상의 측면에서는 좋은 영화라고 할 수 없겠으나 <아무도 없는 곳>은 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곱씹어 보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게 더욱 의미가 있다.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재미나 매력적인 포인트가 부족하기는 하지만, 정적인 페이스로 전개하는 장면들의 연속과 쓸쓸함을 배가시키는 소품들의 클로즈업,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 이야기들은 여전히 매력적인 장치들이다. 그 잔잔한 감성과 섬세함을 애정한다면, 이번에도 그의 유니버스는 관객에게 통하였다고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