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간의 산고 끝에 들었던 한마디의 말 때문에 제왕절개만은 피하자는 생각으로 죽을힘을 다했고 결국 태어난 나의 첫아들. 나는 온몸이 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가 없을 만큼 힘들었고 신생아실 창문으로 처음 만난 나의 아들은 엄마가 힘든 만큼 아들도 힘이 들었는지 머리는 비대칭에 얼굴은 보라색이 되어있었다.
눈물이 났다.
내 몸도 힘들었지만 처음 아기를 마주한 내 마음은 더 힘들었다.
세상에서 처음 만난 아기의 모습은 예쁘다는 생각보다는 우리 둘의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안 예쁜 모습으로 만나게 되었나 싶어 속이 상했다.
집으로 돌아와서의 엄마가 된 나의 생활 속에 나는 이제 더 이상 없었다.
모든 주파수는 아기에게 맞춰져 갔다.
잠을 잘 수도 없었다.
잠시 눈을 붙였나 싶으면 울음소리에 잠을 깨어 기저귀를 갈고 수유를 하고 그러면서 몸조리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망가져 있는 내 모습을 받아들였다.
아기에게 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수유 도중에도 책을 읽었다.
모르는 것 투성이의 엄마가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렇게라도 얻고 싶었다.
내게 다가온 정보를 아이에게 적용하며 점점 육아가 익숙해져 갔지만 그래도 나는 초보 엄마였다.
그리고 하루하루 사랑스럽게 변해가는 아기의 모습에 순간순간 감동하고 순간순간 울컥하며 모든 것이 사랑스럽게 조금씩 변해갔다.
아기가 아프기라도 하면 모든 것이 내 탓인 양 안절부절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쫒아갔다.
그렇게 모든 것을 아기에게 맞춰서 생활하면서 하나의 소망은 크지 않았다.
차라리 단순했다.
‘이 아이가 아프지만 않았으면 정말 좋겠다. 건강하게만 자라 다오.’
아마 나의 바람은 모든 엄마들의 바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아이가 자라고 손에 육아가 익숙해져 갈 무렴 개월별 발달단계를 보아하니 아기를 위해 다양한 자극들이 필요했다. 내가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크지 않은 것들부터 하나하나 사들이기 시작했다.
장난감 하나 고르고 아이에게 무언가를 제공해주는 부모가 된다는 것이 이렇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주변의 아이 키우는 엄마들에게도 물어보며 아이의 살림살이는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어느 것 하나 필요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어느 것 하나 주고 싶지 않은 것이 없었다.
아마 아이를 위한 욕심은 이렇게 시작이 되어 가나보다.
부모로서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놀랍도록 신기하고 즐겁다는 그 느낌에서부터 작은 욕심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나도 처음에는 하나의 바람만 가졌었다.
건강하게만 자랐으면 하는…….
하지만 개월 수가 늘어나고 아이의 나이가 늘어날수록 이 정도는 아이가 잘해주었으면 싶고 더 나아가서 또래들보다 더 잘했으면 싶기도 했다.
놀이터에 나가면 누구보다 더 밝게 씩씩하게 두려움 없이 뛰어놀았으면 좋겠고
장난감을 갖고 놀 때도 집중해서 집중력 있게 잘 놀았으면 좋겠고
책을 많이 좋아하고 읽어 줄 때에는 호기심 가지고 잘 들어주었으면 좋겠고
먹는 것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 양껏 잘 먹어서 또래들보다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들어가서는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리더십 있는 아이가 되기 바랐다.
극성 엄마는 아니었지만 학기 초에는 담임선생님과 반드시 상담을 했었고 내 아이에 대한 일 년을 구두로라도 부탁을 드려야만 내 마음이 편했다.
아닌척하면서도 누구보다 관심 가지는 엄마 중의 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보다 힘든 고통 속에서 이 아이를 낳았고 아이가 바른 방향으로 올바르게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만 하는 책임이 있다고 나 스스로 책임감을 부여하고 최선을 다해야만 좋은 엄마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서 “ 엄마, 나 오늘 100점 맞았어요.” 그 한마디에 초등학교 1학년 반전체의 절반 이상이 100점인 것을 알면서도 어쩜 그리도 행복하고 기뻤는지 모른다.
절대 점수로 아이를 평가하지 말고 그 과정과 학교 공부의 이해력을 높이는 것에 관심을 가지자 라고 스스로 교육철학을 세워보았지만 점수 앞에서 무너지는 엄마의 감정은 어쩔 수가 없었던가보다.
엄마이니깐
내 자식이니깐
그렇게 나 자신을 합리화시켜나갔다.
초등학생 때 경험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운동이면 운동, 미술이면 미술, 음악이면 음악, 독서면 독서, 사고력 수학이면 수학…….
그리고 체험활동까지,
그렇게 많은 투자들이 이루어질수록 엄마의 욕심은 아이가 두각을 나타내고 학교생활에서 더 잘해오길 바라는 욕심으로 커져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영재교육원을 운영하면서 부모교육을 최소한 연 2회 이상 진행할 때였다.
창의력 개발원의 소장님께서 부모님들께 교육하시는 내용 중에 하나의 메시지가 내 가슴에 꼭 와서 박히는 것이 있었다.
“부모의 가지가 너무 크고 넓게 뻗으면 그 아래에서 자라는 작은 나무는 크게 자라질 못합니다.
햇살이 충분히 어린나무에게도 비치도록 그 가지를 접어주세요. 접어줄 자신이 없으며 차라리 그 나무를 옮겨 심으세요. 그래야 어린 나무도 크게 자랄 기회를 만들 수 있답니다. 각각의 부모님들은 얼마나 큰 나무인지 햇살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
큰 나무…….
어린 나무…….
나는 내 아이에게 얼마나 가지를 드리운 큰 나무였을까?
내 모습의 크기를 알기 위해 몇 번이나 나를 돌이켜보며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혹시 내가 뻗은 가지의 그늘로 아이가 햇살을 만나지 못하고 약하게 자라는 것은 아닐까?
아닐까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내 욕심이 나를 큰 나무로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렇다면 그 가지를 접어주어야만 했다.
가지 접기
매일 내 곁에서 내 눈에 보이는 아이의 모습들은 늘 부족함이 많았고 늘 걱정이 되었다.
왠지 내가 잔소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바른 길로 잘 자라지 못할까라는 걱정이 앞섰다.
나는 어느새 큰 나무가 되어 아들의 햇살을 가리는 엄마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건강하게만 자라라고 소망했던 초보 엄마는 어느새 욕심 많은 큰 나무의 엄마임에 틀림이 없다.
내가 가지를 접어주지 못한다면 우리 아이는 어떻게 될까?
하루아침에 욕심을 어떻게 다 비워낼 수가 있단 말인가?
내 가지를 접기 위해 나도 노력을 해보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 아이니깐 당연히 간섭하게 됨을 막을 수가 없었다.
내 눈에 자꾸 부족함이 보이니깐 꾹 참던 것이 또 잔소리로 표현되기 시작함을 막을 길이 없었다.
그때 결심했다.
‘옮겨 심어야겠다.’
나의 마음이 너무 힘들고 불안하겠지만 그래도 과감히 뿌리째 옮겨 심어서 자리를 잡고 햇살도 받고 스스로 성장의 기쁨을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16년을 엄마의 나무 그늘 아래서 보호받으며 또한 간섭받으며 살던 아들을 17살 되던 해에 멀리 떠나보냈다.
창원에서 김천으로…….
나의 선택은 공부도 자사고에서 열심히 했으면 하는 바람이었지만 멀리가 있어야만 내가 더 아들에게 욕심을 가지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이유 중에 하나 포함되어 있었다.
남들은 공부 욕심 때문에 아들을 보냈을 꺼라고만 생각하겠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었다.
아들을 떠나보내고 일주일을 울었다.
잠을 잘 때에도 일을 할 때에도.
모진 엄마 때문에 아직은 따뜻한 마음 편안한 집에서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되는 나이인데 혼자서 기숙사에서 낯선 친구들을 만나 지내고 삼시세끼 학교 밥만 먹으며 공부에 에너지를 쏟을 아들이 너무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울고 또 울었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말이 이해가 되었다.
그렇게 나의 피붙이 자식을 17살에 과감히 옮겨 심고 엄마는 많이 힘들고 아팠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내가 힘들어하면 아들도 힘들어할까 봐 마음과 반대로 늘 든든한 응원의 메시지만을 보내줄 뿐이었다.
내 욕심의 그늘을 벗어난 아들은 힘든 내색 없이 하지만 누구보다 힘들게 1학년을 버텨 냈을 거다.
전국단위로 모인 뛰어난 친구들의 두뇌에 감탄도 하고 넘지 못할 벽도 만났을 것이고 성적이 내 맘대로 안 되는 것도 스스로 뼈저리게 느끼는 한 해를 보냈다.
아들이 말은 안 해도 힘들다는 것을 엄마는 안다.
알아야만 엄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아들의 성적표를 아빠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힘들어도 아이가 제일 힘들고 고민을 해도 아이가 가장 큰 고민이 될 꺼라 생각하고 아들의 성적표는 나만 보고 남편에게는 구두로만 두리뭉실하게 말하고 끝냈다.
엄마의 마음과 아빠의 마음이 같지는 않기 때문에 혹시나 아이 마음에 상처되는 말이 전해질까 봐 나 혼자 속앓이를 했다. 그리고 기도했다. 지치지 말고 끝까지 걸어가는 아들의 모습이기를…….
아들은 고2 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부족함을 메워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내리막 없이 오르고 또 오르는 성적을 받았다.
눈빛에서 자신감과 열정이 보였다.
체중은 빠져서 입학 때 맞춘 교복이 흘러내릴 만큼 몸은 말라갔다.
교복을 모두 새로 맞춰주며 마음이 또 아파왔다.
잘 먹고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는 바람을 못 지켜 주는 엄마라서 미안했다.
수능 당일도 아들을 응원하고 맛있는 도시락이라도 싸줘야 하는 게 정상인데 학교가 멀고 일하는 엄마는 보온도시락 하나 보내주고 기숙사에서 자고 학교급식으로 도시락을 담아갔다.
감사하게도 담임선생님께서 수능생 아들의 도시락을 싸주셨다.
미안함에 눈물이 났다. 나는 좋은 엄마를 포기했다. 그날만큼은…….
아니 그냥 나는 나쁜 엄마였다.
그렇게 스스로와의 힘든 싸움 끝에 결국 작은 나무는 성장을 했다.
햇살에 강해지고 비바람에 강해지며 뿌리를 제대로 뻗은 모양이었다.
스스로 정한 목표를 가슴에 새기고 당당히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했다.
신문에 이름 석 자 올리는 성적을 만들겠다고 하더니만 올 1등급의 성적으로 졸업을 하였다.
감사한 아들이다.
아들이 수능을 마치고 집으로 왔을 때 두 손 꼭 잡고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노력한 아들을 격려해주며 질문을 하나 했다.
아무 생각 없이. 하지만 머릿속에 답을 하나 그려놓고…….
“아들, 너는 지금까지 20년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가 언제야?”
“음, 그거야 고등학교 3년이지.”
“그랬구나. 그랬을 거야. 그렇다면 너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은 언제였을까?”
“음, 그것도 고등학교 3년이지.”
“어? 고등학교 3년이 제일 행복했다고? 엄마랑 우리 집에서 함께 살 때가 더 행복했지 않았을까?”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그럼, 말해봐.”
아들의 대답은 내 상상을 완전히 벗어난 대답이었다.
“ 엄마한테 조금 미안한데 엄마가 나를 멀리 김천에 보내주신 건 지금까지 제일 잘하신 것 같아요.
3년이 힘들었지만 친구들과 생활했던 것도 너무 재미있었고 공부도 원 없이 할 수 있어서 좋았고 …….
음~ 잔소리 안 들어서도 좋았고……. 너무 재미있게 3년을 보냈어요. 다시 하라면 할 수 없겠지만 “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럼 중학교 때는 좀 힘들었다는 이야기인데. 맞아?”
“ 음……. 좀 힘들었지. 흐흐”
그랬구나. 이 아이의 진심이 이런 거였구나.
나는 미안함에 힘들었는데 이 아이는 감사하게 생각했었구나.
그때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큰 나무 아래에서 작은 나무가 잘 자랄 수가 없다.
내가 가지를 접지 못함을 알고 작은 나무를 옮겨 심은 것은 참 탁월한 선택이었구나.
그래. 이제는 너 스스로 저 깊숙이 뿌리내리고 세상 어떤 비바람에도 끄떡없이 당당하게 맞서 성장하는 어른 나무가 되길 바라. 엄마는 이제 걱정이 없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