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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노엘 Oct 28. 2020

부부의 세계

남편의  머리를 염색하며

“점심 먹고 머리 염색 좀 해주면 안 될까?”

주말 식사를 마치고 남편이 염색을 해달라고 물어온다. 

그러고 보니 요즘 부쩍 남편의 흰머리가 희끗희끗 보여서 내심 안쓰러워 보였다. ‘나 때문에 힘든 건가? 일 때문에 힘든 건가?’ 혼자서 잠시 고민했었다. 

“미용실 가서 깔끔하게 하지 그래?” 
“미용실 가는 것보다 당신이 해주는 게 더 좋아.”

거절할 수 없게 말을 툭 던지고 남편은 씨익 웃어 보인다. 

지난번에도 구레나룻 쪽에 얼룩이 져서 내심 미안했는데 뭐 본인이 괜찮다고 하니 그냥 해주는 걸로 마음을 먹었다. 얼룩을 만들어도 미용실 사장님보다 내가 더 좋다는 그 얄팍한 거짓말에 속아서 설거지를 잠시 미루고 염색약을 배합했다. 거실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서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한 남자가 보였다. 누구든 세월의 흐름을 비켜 갈 수는 없는가 보다. 소위 인격이라 부르는 복부둘레가 눈에 띄게 늘어난 누가 봐도 중년의 한 남성이 나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라던 결혼식 주례사가 생각이 났다. 나는 어느새 파뿌리가 되어가는 그의 머리카락에 조심스레 염색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그의 흰머리카락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짠해져 오는 것을 애써 감추며 핸드폰 보지 말고 똑바로 머리 들라고 잔소리를 퍼부어본다.


내년이면 은혼식이다. 

25년의 긴 세월을 잘 견뎌내고 살아낸 내가 대견하기만 하다. 길고 긴 25년의 시간 속에서 내 곁을 든든히 지켜준 울타리 같은 남편의 머리를 염색하며 10년 동안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귀향의 간절함을 완성한 오뒷세우스를 떠올려보았다. 남편의 일상도 매일이 트로이 전쟁 같은 치열한 하루였을 것이고 집 밖은 위험하다는 말처럼 세상 속 많은 유혹이 있었을 텐데 고단함을 위로받을 귀향의 종착지는 가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는 위대한 영웅과 남편의 생각이 일치하는 듯하다. 수많은 구혼자들을 두고 오랜 시간 집 떠난 남편 오뒷세우스만을 기다렸던 아내 페넬로페의 마음속에는 사랑을 넘어선 남편에 대한 존경이 분명 자리하고 있었을 것 같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부부들은 정과 의리로 뭉쳐서 가정을 지켜나간다고 하지만 나에게도 분명 남편에 대한 존경심이 마음 한구석에 존재하는 것을 느낀다. 뜨거운 사랑으로 결혼한 많은 사람들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결혼생활 속에서의 위기와 고통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겪으며 사랑의 온도는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 떨어지는 온도를 유지시켜주는 것, 그것은 바로 두 사람만의 신뢰감과 존경하는 마음이 있을 때만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남편은 나와 호적상 동갑이다.

 하지만 마음의 나이는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고 성숙해있다는 것을 살면서 느낄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결혼 후 7년까지 죽도록 싸웠던 것도 내가 싸움을 걸었던 부분이 대부분이었고 그 이후 25년이 될 때까지 남편이 나에게 원망을 하거나 화를 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말이다. 솔직히 내 성격은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다. 부족한 것 투성이에 허당이지만 나누는 것을 좋아해서 손해 보는 일도 참 많이 하는 편이었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두 달 전에 예약한 비행기 티켓이 전자여권 발행이 안되어 망연자실 날아가는 비행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깐 괜찮다고 말하는 남편이었다. 잘못을 잘못했다고 말하면 더 미안하고 부끄러워할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이후 웬만한 건 나도 그를 다그치지 못하게 되었고 나의 허물을 덮어주는 남편을 존경하게 된 것 같다. 가장 최근에는 성격적으로 단순하고 밝은 아내가 점점 힘들어하고 지쳐가는 모습이 지켜보기에 안쓰러웠는지 조심스럽게 제안을 해왔다.


“25주년 기념으로 안식년을 가져보는 건 어때? 인생 길잖아.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거니깐 조용한 데 가서 생각도 정리하고 현실을 잠시 떠나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호텔을 잡아서 쉬어도 좋고 제주도 가서 한 달을 살다와도 되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와. 돈보다는 건강했으면 좋겠고 당신이 몸도 마음도 아프지 않고 건강했으면 좋겠어.”


전화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거지? 지금이라도 당장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나에게 도망칠 비상문을 살포시 열어주고 있으니 미안함과 고마움이 함께 밀려들었다. 이런 남편이라면 나도 페넬로페처럼 끝까지 부부의 신의를 지키며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다음 생에도 부부의 인연으로 만나자고 할 때 싫다고 정색했던 나의 말을 거두고 다음 생에도 그다음 생에도 지금의 남편과 소중한 인연으로 만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았지만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좋은 계절인 가을에 새 출발을 알리는 청첩장들이 하나둘씩 내 손에 도착하고 있다.

결혼식 축가로 많이 불리는 오르막길을 들으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가을 탓일까? 내 고단했던 25년간의 추억 탓일까?


한걸음 이제 한걸음일 뿐 

아득한 저 끝은 보지 마. 

평온했던 길처럼 계속 나를 바라봐줘, 그러면 견디겠어.

사랑해 이 길 함께 가는 그대,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여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저 먼 풍경을 바라봐.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 길

기억해 혹시 우리 손 놓쳐도 절대 당황하고 헤매지 마요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그곳은 넓지 않아서 우린 결국엔 만나 오른다면 


매일 트로트만 듣는 남편에게도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다.

나처럼 그도 눈시울이 붉어질지…….

가끔 바람이 불 때 

걸어온 길을 뒤돌아 바라볼 때 

25년간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의 길을 

앞으로도 남은 세월도 만들어갈 수 있길 바라본다. 

부부의 인연이 다 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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