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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제주, 차가운 바람 속에서

by 청량

내가 원해서 왔지만 무척이나 떠밀려 온 것만 같은 좋지않은 느낌.


제주의 바람은 거칠었다.

서울보다 분명 따뜻한 곳이었지만 바닷바람은 달랐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고 두꺼운 차림이었지만 바람은 내 마음속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몸이 으슬으슬 했고, 컨디션도 엉망이었다. 그러니 제주를 즐길 여유 따위 없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뛰어다녔다. 저 멀리 파도가 밀려오고, 바람이 거칠게 불어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이 마냥 신나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차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조용한 가운데 혼자 있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러면 안됐다.

아이들 앞에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이 시간을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길 바랐다. 아이들과 함께 웃고는 있었지만 예쁜 바다가 내 눈엔 시커먼 흑빛으로 보였다. 제주를 떠올리면 푸른 바다와 넘실거리는 파도가 먼저 그려졌었는데, 막상 내 눈앞엔 회색빛 바다와 집어 삼킬것만 같은 파도, 거센 바람 뿐이었다.


그럼에도 살아야 했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두어 달은 머물러야 했으니 먹을 것을 채워 넣는 일부터 시작했다. 익숙한 대형마트에 들러 장을 봤다. 아이들은 이것마저도 신나했다. 치킨 한 마리를 사서 바깥에서 먹을 작정이었다. 원래는 바다를 보며 여유롭게 여행자 같은 기분으로 한 끼를 해결하고 싶었는데, 바람이 너무 차가웠다. 제주도를 여행하는 초보 여행자의 잘못된 상황판단이랄까. 결국 날씨가 도와주지 않아 편의점 앞에서 라면과 치킨을 먹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조금 초라한 기분이 들었지만 아이들이 신나보여 다행이었다. 행복해 하는 아이들이 조금은 나의 마음을 녹여주는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후 숙소에서 멀지 않은 용두암을 둘러보었다. 바람은 여전히 거셌고 나는 여전히 추웠다. 아이들은 신나서 여기저기 뛰어다녔지만 내 머릿속은, 또 내 마음속은 바람에 날려 아무것도 남지 않아 하얀 백지가 되었다. 아무 생각도 아무 느낌도 갖지 않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조금은 기다려보기로 했다.

마음도, 날씨도, 점점 나아지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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