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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일단은, 시작

by 청량

떠나고 싶었다.

숨고 싶었다는 말이 더 맞을까. 필히 떠나야만 했다.

내게 일상은 익숙하고 바쁘지만 행복했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버렸다. 그 일은 우리를 곧 떠나게 만들었다.


제주.

어떤 이유에서든 떠날 수 밖에 없었던 나는, 그저 가장 멀리 가고 싶었던 것 같다. 제주는 이런 의미에서 가장 적합한 곳이었다. 심리적으로 또 물리적으로도. 우리 가족은 시간이 필요했고 함께함이 필요했다. 이왕 가는거 멀리멀리 가고 싶기도 했고 먼저는 아이들이 제주를 무척이나 원했다.


짐을 싸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집에 있는 짐들은 이삿짐 센터에 보관하고 두어 달 살 짐을 따로 싸야 했다. 언제 이런 짐을 싸 본적이 있었던가. 가져갈 것들을 대충 추렸지만 짐은 끝도없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짐을 싸고는 있었지만 짐을 쌀 힘조차 없는 상황이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몸도 마음도 무척이나 지쳐있었다.


그럼에도 떠나야 했다. 겨우 짐을 챙겨 차에 실었다. 꾸역꾸역 차가 출발했다. 이렇게까지 많은 짐을 싣고 내륙의 저 남쪽 끝가지 가본적은 당연히 전무. 길은 멀었고 마음은 여느 여행과는 달리 무거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채 하하호호 웃으며 떠나는 길을 즐기고 있었다. 덕분에 나도 따라 웃으며 힘을 끌어내었다. 완도까지 가서 배를 타고 제주로 넘어가는 여정은 길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리 힘들지 않았고, 제주에서의 여정을 마음으로 준비하는 시간을 두둑하게 가질 수 있었다.


있는 돈 써가면서 두어달 아무것도 안하고 가족끼리 지낼 기회를 갖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도망치듯 떠나왔지만 이런 기회를 가지게 됐다는 것은 분명 감사할 일이다. 그러니 감사하기로 했다. 마음이 복잡해도, 이 시간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지 아직은 모르겠어도, 일단은.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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