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인사하던 어떤 소녀
오후 5시. 어김없이 FM89.1
나는 라디오를 틀었다. 아파트 순찰은 막 돌고 왔다. CCTV 관제화면은 경비실 안쪽 왼쪽 벽에 있었다. 눈으로 그것을 훑었지만 특별한 이상은 없었다.
내 사연을 보내 놓은 터라 긴장된 마음으로 라디오를 틀었다.
무선 이어폰을 왼쪽에만 끼워두어 모자를 쓴 머리카락 덕분에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라디오 볼륨을 살짝 높였다.
[[ 네, 오늘도 여러 사연을 들고 왔습니다. 오늘 첫 사연은 00 아파트 경비원께서 보내신 사연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박명수였다. 약간 못 생기고 어눌한 척 하지만 많이 베풀고 늘 유쾌한 사람이다.
[[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박명수 님, 저는 최근 저희 아파트에서 있었던 사건 하나를 말씀드리려고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00 아파트 경비실에서 근무하는 경비원 정찬주라고 합니다.
제가 근무하는 아파트에는 2개 동마다 한 사람의 경비원들이 관리를 합니다. 한 동은 참고로 20층까지 있습니다. 한 층에 두 세대가 있으니 한 동당 총 40세대가 있어요.
두 개 동이면 80세대에 아이들 어른들까지 하면 총 300명이 넘습니다. 근무한 지 얼마 안 되는 경비원은 얼굴 익히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저처럼 이곳에 한 10년 있다 보면 주민들 얼굴을 대강 다 익히게 됩니다. 여기는 참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작은 사회랍니다.
고지식한 부부, 인색한 가정, 서로 목소리만 높이고 싸우는 부부, 항상 웃는 가족 등 정말 다양합니다. 어떤 부부는 제가 이곳에 부임해서 일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정면으로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몇 번 있을까 말까 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연을 보내는 이유는 어떤 예쁜 중학생 소녀 때문입니다.
이 소녀가 이곳 아파트에 이사를 온 것은 불과 3년 전이에요. 아 이 부분에서 오해가 있을 수도 있는데 저희는 어떤 가족이 이사를 오더라도 아이가 몇 학년 학생인지까지는 모릅니다.
알 수도 없고요. 하지만 이 소녀가 학교를 갈 때마다 꼬박꼬박 경비실에 제가 있는 주간에는 인사를 하고 가는 겁니다. 심지어 제가 다른 일지를 체크하느라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못 받으면 경비실 작은 창에 얼굴을 대고 인사를 합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좋은 하루 보내세요.”
아, 처음 저는 그냥 엉겁결에 인사를 받았죠. 대답도 “어... 그... 래” 정도였어요. 뭐 제가 언제 그런 인사를 제대로 받아보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아이는 하루도 빠짐없이 인사를 하는 거예요. 사실 경비 생활을 하다 보면 하루가 느리게 흘러갑니다. 평온한 아파트에서 지루한 일상이지요. 딱히 일하면서 동료와 농담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아니고 CCTV를 보면서 특별한 이상은 없는지 체크하고 수상한 사람은 없는지 보는 일이 대부분이거든요. 그런 제게 하루에 두 번씩 인사를 하는 소녀는 각별한 관심이 대상이 되었습니다.
학교에 다녀오면 꼭 경비실에 고개를 내밀고 저와 눈을 마주치면서 인사를 하는 것이죠.
어떤 날은 “경비아저씨, 저 이제 2학년 마쳐서 3학년이 된답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합니다. 저는 덕분에 소녀에 대해서 소상히 알게 되었죠.
저는 그 소녀 덕분에 중학교 학급 등교시간이 8시 30분까지라는 사실과 수업은 대략 4시 반에서 5시 사이에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시간에는 순찰도 미루고 소녀가 오는 것을 기다리게 되었죠. 인사를 해야 하니까요.
그러던 지난달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하루는 소녀가 어떤 남자와 아파트로 들어오는 겁니다. 저는 남자의 복장을 보고 일단 안심했습니다. 남자는 말쑥하게 생겨서 머리는 단정했고 검은색 가죽 서류가방에 양복까지 입고 있었거든요. 아빠를 일찍 만난 것인가. 점점 다가오는데 자세히 보니 소녀의 아빠는 아니었습니다. 제가 본 남자는 한 삼십 대 초반 정도로 젊어 보였습니다.
그 소녀의 아빠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거든요. 그리고 항상 웃으면서 인사하고 지나가서 얼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저는 소녀가 인사를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하고 대답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저한테는 그 시간이 아주 소중하고 기쁜 시간이었죠.
그런데 웬일인지 그날은 소녀가 제가 앉아 있는 경비실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지나가는 겁니다. 옆에 서 있는 남자도 저와 시선을 피하고는 이마에 주름진 힘을 주면서 마치 ‘건들기만 해 봐’ 하는 비장한 모습으로 성큼성큼 경비실 앞을 통과하는 겁니다.
저는 우선 이 남자가 누굴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학교선생님일 수도 있었겠지요. 저는 갑자기 저도 모를 모험심이 생겼습니다. 아니 매일 인사하던 소녀가 갑자기 저를 모른 책하고 가는데 남자로 태어나서 이런 상황이 이상하지 않으면 제가 스스로 이상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순간적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얘기한다는 쪽과 그냥 경비실 문을 열고 나가서 얘기한다 두 가지가 있겠지요. 저는 경비실 문을 선택했습니다. 어 저는 사실 얼굴이 너무 커서 초등학교 때부터 대갈장군이라는 별명이 있었거든요.
아무튼 저는 화가 났습니다. 저는 아니 누구 때문에 지금 순찰도 미루고 인사 한번 받겠다고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그리고, 이상하기도 했습니다. 혹시 소녀가 위협은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조용히 말하면 저 남자가 뭔가 변명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어쩌면 제 순간적인 기지였을 겁니다. 아무튼 제게는 너무 이상한 상황이었고 저는 빠르게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소녀를 위해서 말이죠.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건 저 소녀가 제게 보여준 인사에 대한 의리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함부로 남의 일에 끼어들었다가 피해를 입었다는 신문기사들도 많이 나와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위축이 되는 것도 사 실 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소녀를 위해서 뭔가는 해야겠다는 생각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늘 인사하던 소녀가 아마 혼자 있었다면 그런 용기를 부리지 않아도 되는 것이죠.
이미 두 사람은 경비실을 지나가서 아파트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올라가는 단추를 누른 상태였습니다. 아직 엘리베이터 표시창에는 8층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희 동 8층 아파트에는 노인 부부가 사시는 데 할머니가 요즘 허리가 안 좋아서 걸을 때 노인용 보행기를 사용하시거든요. 여자 아이가 오기 직전에 올라간 터라 아주 걸음이 느려서 아직 천천히 내리는 중이었을 겁니다. 저도 모르게 확 경비실 문을 열고 나가서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것을 확인했죠. 저는 그쪽을 향해서 소리를 빽 질렀습니다.
“수화야, 너 할아버지 여기 있는데 뭐 해? 인사도 안 하고.”
저는 딱 이 말만 했습니다. 물론 제 목소리는 매우 커서 아파트 1층을 쩌렁쩌렁 울렸죠.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갑자기 사내가 주춤거리더니 몸을 벽에 붙이면서 천천히 저한테로 걸어오는 겁니다. 아 순간 저는 인사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저와 팔만 펴면 닿을 만한 위치에 와서는 제 옆의 빈틈을 찾아서 확 뛰어 나가는 겁니다.
저는 너무 의아했습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하는 순간 17층에 사는 그 소녀가 갑자기 풀썩 주저앉아서 막 우는 겁니다.
“아.. 저... 씨... 감 사...해...으....저....모....르...는...사..람...이...에...요...”
그렇게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전 바로 경찰에 신고를 했고 범인은 검거가 되었습니다. CCTV가 있으니 그냥 100% 검거죠. 뭐. 그날 저녁에 아이의 부모님이 과일을 들고는 감사하다고 찾아오셨습니다. 알고 보니 아이에게 커트칼로 위협하면서 집에 끌고 들어가려고 했다고 하더군요. 이 사연이 저희 아파트에서는 알려줬습니다. 주민 모임이 가끔 있는데 부녀회장님이 감사패를 주시면서 말씀하셨거든요.
박명수 님, 이쯤 되면 저희 아파트의 분위기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요즘 저와 동료들은 쉴 틈이 없습니다. 여기는 매일 매 순간 서로 인사하는 소리가 넘치거든요.
이 사연을 쓰는 동안도 대략 지나가시는 한 다섯 분도 넘게 인사를 했습니다.
박명수 님 늘 건강하시고 감동이 있고 재밌는 방송 감사합니다.
추신 : 박명수 님, 사실 저는 그 여자 아이의 이름을 모릅니다. 혹시 실제로 그 사연의 소녀를 찾으실까 봐 노파심에 글을 적습니다. 그냥 아무 이름이나 부른 것이죠.
네~ 이렇게 보내셨습니다. 와아, 이 분 추신을 보니 소름이 돋네요. 아이 이름은 모르는데 그냥 불렀다는 말이잖아요. 오늘의 장원으로 선정하고 백화점 상품권 10만 원과 동료분들과 나눠 드리라고 롤케이크 다섯 개 보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지금까지 박명수의 라디오쇼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나는 오른손을 불끈 쥐었다. 내 사연이 채택되어서 전국에 퍼진다는 자체가 너무 기뻤다. 저기 멀리서 소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항상 감사합니다. ” 소녀가 나를 보고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학교에서 수업 듣느라 고생 많았어요.” 나는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인사도 나누었으니 순찰을 돌 시간이다. 나는 벽시계를 보면서 순찰봉을 손에 쥐었다.
경비실 문을 나서니 조금은 힘을 잃은 저녁 해가 천천히 나무들의 그림자 떼를 길게 이끌면서 담벼락에 하루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