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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윤슬 Jul 12. 2022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졌다

: 외롭고 주눅 들었던 내 경험이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가 될 수 있다면

어린 시절, 우리는 말을 하지 않는 아이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불편했다. 쳐다보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싫었고, 말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겁이 났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펼쳐지는 것이 두려웠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집 밖에만 나서면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우리는 얼음 쌍둥이가 되었다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의 우리가 남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고, 친구들도 있다는 사실이 퍽 안심이 된다. 그러나 마음속 저 깊은 서랍에는 여전히 "너 바보야? 왜 말을 못 해" 하고 찡그리고 한숨짓는 얼굴들이 생생히 존재한다. 그리고 서랍의 가장 구석진 곳에는 스스로를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아주 작은 내가 있다

[이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윤여진+윤여주 지음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감정들이 있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우연히 읽게 된 책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났던 날,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웃었던 기억들보다 어찌할 바를 몰라 불편해하는 내가 더 많이 떠올라 감정들이 뒤엉켜 버렸다. 샤워하는 동안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내 삶을 홀로 지켜 나가야 한다는 두려움과 아무도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생각에 내 존재를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었지만 꽤 담담했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나를 안아 주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무심코 흘려보낸 줄 알았던 내 어린 시절은 잘 흘러간 게 아니라 마음속에 고여 나에게 상처가 되어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이제는 모두 괜찮아졌다며 안도했던 마음에 거센 파도가 몰아쳤다. 불편했던 기억들이 떠올랐고, 작은 에피소드들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흘렀다


어린 시절, 어른이 되지 않았지만 꽤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힘든 마음을 애써 숨기려다 보니 일찍 철이 들어 버렸다. 샤워를 하고 나와 작은 에피소드 들로 목차를 적어 내려갔다. 잊고 지냈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갈 때마다 로션을 바른 얼굴에 눈물 자국이 짙어졌다



나는, 괜찮은 게 아니었구나

사랑받고 싶었고 보호받고 싶었구나

누군가에게 내 이야기를 가득하고 싶었구나

그 시절의 기억들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기로 다짐했다

마음을 다잡고 보니 내가 왜 청소년들에게 마음을 쓰게 되었는지, 유독 소심하고 어두운 친구들에게 눈길이 갔는지.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어린아이에게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었는지. 이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내 어린 시절 홀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어른은 없었기에, 어른이 된 나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아이들에게 용기가 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나 보다


유독 외롭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아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혼자 있는 시간이 편해도 괜찮다고, 가끔은 믿어도 괜찮은 어른도 존재한다고. 그러니 우리 함께 용기를 내보면 좋겠다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졌다


샤워를 하고 나와 내가 써야 할 글의 목차를 적어 내려갔다

30개의 목차를 거뜬히 완성했다


어디선가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내가 정말 써야 할 글은 목차를 서슴없이 적어 내려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어떤 글을 써야 그렇게 목차를 가볍게 적어 내려갈 수 있을까?' 늘 고민했는데, 내가 잊으려고 발버둥 쳤던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오늘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한번 만났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떤 날은 억울했고 어떤 날은 슬퍼도 눈물을 꾹 참아냈다

어떤 이유로든 학교 폭력은 인정될 수 없는 사회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허벅지 20대를 거뜬히 견뎌내고 퉁퉁 부은 다리가 저려와 의자에 앉을 수도 없었던 날들도 있었고, 옳은 말을 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한대를 더 맞는 기억들은 무수히 많았다. 꾹 닫았던 입을 열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내 편이 되어 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믿을 수 있는 기억들의 부재로 점점 더 침묵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에게, 처음으로 믿고 싶었던 어른도 생겼다

초등학교 6학년 담임선생님은 나의 특별함을 늘 먼저 알아 봐주셨다. 작은 용기를 냈던 일에 늘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사소한 일에도 '역시 윤슬이는 달라!'라는 말로 마음을 따듯하게 데워주셨다. 나 역시 믿고 싶은 어른이 필요한 누군가에게 따듯한 어른이 되고 싶다


어린 시절의 나를 마주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하고 싶어 졌고, 해야 한다. 어린 시절, 외롭고 두려웠던 경험들이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가 될지도 모르니까. 오늘부터 작고 불안했던 어린 나를 만나 '너는 특별한 사람이야' '너는 사랑받을만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건네며 따스한 온기를 가득 담아 포근히 안아 줄 것이다.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잘 이겨내서 오늘의 내가 될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아 줘서 고맙다는 말도 함께 전할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특별하지 못해 늘 주눅 들어 있던 내 경험을 통해,

단 한 명이라도 작은 용기를 내어 특별한 어른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오늘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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