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시간이 지나면 모든 감정들은 무뎌지고 희석된다. 그렇다고 그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랜만에 공항에 도착한 A는 휴대폰을 보고 눈을 껌뻑였다. 4년 만에 B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SNS에서 싱가포르에 있을 거라는 거 봤어. 얼마나 있다 가는 거야?"
안녕, 잘 지냈냐는 인사도 없이 자기 할 말만 하는 B를 보며 시간은 흘렀지만 묘한 낯익음이 느껴졌다.
"하루도 안 있어. 경유하는 거라 7시간 정도 있다 갈 거야. 너 말레이시아에 있는 거 아녔어? 싱가포르에 있어?"
"응, 나 싱가포르에서 일한 지 2년 정도 됐어. 그럼 저녁이나 한 끼 같이 할래?"
"그래"
무덤덤하게 말했지만 꽤나 갑작스러운 연락과 약속까지.. 마음 한 편에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4년 동안 연락도 안 하고 살았는데 왜 갑자기 만나자는 거지? 그리고 작은 소용돌이는 과거를 불러왔다.
A와 B는 1년 정도 매일매일 연락하고 지내던 사이였다. A가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있을 때 B는 감정의 널뛰기가 보통 사람보다 유독 튀는 A 곁에 묵묵히 있었다. 그 시기에 B가 없었다면 A는 더 깊숙한 어둠으로 빠졌을지도 모른다. 불안정한 시기에 있던 둘은 서로에게 의지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B가 해외로 가면서 매일 하던 연락은 띄엄띄엄 기간이 길어졌고 만나자는 약속은 둘 중 아무도 실행할 만큼의 적극성이 없었기에 유통기한을 다했다.
그리고 4년 후,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던 서로를 만났다.
"Long time no see" 멋쩍게 B가 말했다.
"길 찾느라 애썼네. 잘 지냈어?" A가 답했다.
그리고는 서로에 대한 가벼운 근황 얘기들,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깊기도 얕기도 한 정보들, 각자의 가족들에 에 대한 얘기, 살던 곳에 대한 얘기들을 나눴다.
"이렇게 볼 줄 몰랐는데 먼저 연락 줘서 놀랐어. 그래도 얼굴 보니까 좋네"
"그러니까. 잘 살고 있는 거 보니까 좋다.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몰라. 아직. 너는?"
"나도 아직은 돈이 많이 없어서. 그래도 집도 사고 차도 샀다!"
"성공했네. 근데 나 이제 비행기 타러 가야 해. 즐거웠다. 다음에도 기회 되면 한번 보자"
"응, 네가 그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내서 기뻐. 결혼하게 되면 꼭 초대해 줘"
"그 시기에 네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 고마워. 너도 결혼하면 연락 줘."
둘은 마치 우리는 과거의 한 부분으로 남기자라고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결혼을 축하할 자신이 있다는 듯 행동했다. A는 시간은 많이 남았지만 더 오래 있음 과거가 점철된 혼란이 더 커질지도 몰라 황급히 탑승 게이트로 들어왔다. 담백하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소용돌이의 여운은 오래갔다. 만약 그때 둘 중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더 적극적이었다면 관계는 바뀌었을까? 비행기 경로로 보면 고작 한 뼘 밖에 안 되는 거리인데 그때의 망설임만큼 아쉬움이 남았다.
한 때는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박박 긁어 써야 후회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아쉬움을 어느 정도 남겨놓은 채 덮어놓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란 걸 안다. 지나간 날들을 기억한다. 먼지 낀 창틀을 통하여 과거를 볼 수 있지만 모든 것이 희미하게만 보였다.
(마지막 문장은 영화 <화양연화>에 나오는 대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