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먹는 DNA? 김치 담그는 DNA!

김치 담그기의 고됨과 기쁨

by 치유의 통로

김치에 본격 관심을 가진 지 약 3주밖에 되지 않은 아직은 초보 단계에 있다. 그간 담가본 김치는 깍두기, 겉절이, 포기김치, 갓김치, 파김치. 이 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재료는 단연 배추로 담그는 김치이다. 겉절이는 그나마 낫고 포기김치는 정말 어렵다. 김치를 담그는 핵심 과정에 '절이기'가 있는데 특히 배추를 절이는 것은 무척이나 숙련도를 요구한다. 처음엔 모든 것을 짐작으로 감행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를 배추라는 재료가 혹독하게 가르쳐주었다. 소금의 농도나 물의 양, 절이는 시간과 뒤집는 타이밍 등 모든 것 하나 제대로 하지 않으면 무참히 실패했다. 김치에 '대충'이라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사실 적당히 대충해도 당장 결과물은 그럴 듯하게 나온다. 그럴 땐 마치 내가 김치명인이라도 된 줄 알고 기세등등해진다. 김치 별 거 아니네란 교만에 빠져 눈에 뵈는 것 없이 누가 말리지 않으면 김치공장이라도 차릴 태세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 하지 않았던가. 진정한 승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드러나게 된다. 내가 얼마나 과정에 불성실하게 임했는지 이틀, 삼일 지난 김치는 정직하게 말해준다. 엉터리로 절여진 김치는 며칠 안에 곧 흐물흐물해진다. 그리고 쓴맛이 난다. '절이기'야말로 배추김치의 관건이라 할 수 있다.


배추포기를 알맞게 자르는 방법부터 중요하다. 아무렇게나 잘라 절였다가는 나중에 후회할 일로 돌아온다. 자른 배추를 소금물에 적시고 소금을 치고 다시 그 위에 소금물을 붓는다. 그리고 약 10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니까 10시간 동안 배추를 마음에서 놓치면 안 된다. 타이밍이 정말 중요하다. 종종 시간표가 다음 날로 넘어가게 된다. 어쩌면 종료 시점이 한밤중이나 꼭두새벽이 될 수도 있다. 이때 내 시간 따위는 고려되지 않는다. 오롯이 배추의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 한다. 김치 담그기에서 나는 '을'이 되고 배추는 상전이다. 만약 내가 조금이라도 갑이 되려고 할 때 세상 맛없는 배추김치를 꾸역꾸역 처분할 일이 생긴다. 철저히 낮아졌을 때, 배추는 최상의 김치로 보상해준다.


아직 끝나려면 멀었다. 이제 10시간 절여진 배추를 헹궈야 하는데 그러고 나서 다시 기다림이다. 물을 빼는 시간으로 넉넉잡아 3시간 걸린다. 인내심이 부족할 경우 물김치를 맛봐야 한다. 여기까지 약 13시간이 필요한 셈이다. 그것도 한번에 절이기에 성공했을 때 하는 얘기다. 절이기에 실패했을 경우 다시 절이는 시간은 기약없이 늘어나고 김치의 품질은 거의 추락한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잘 절이는 자만이 비로소 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물 빼는 3시간 동안 양념을 만들기 시작한다. 눈대중, 감으로 하는 건 선무당이 넘볼 영역이 아니다. 숙련된 전문가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계량은 필수다. 배합의 최적화는 김치의 생명이다. 고춧가루, 젓갈, 배추 속, 풀죽 등의 균형이 중요하다. 김치는 철저히 균형의 생태계이기 때문이다. 각 재료마다 손질에 걸리는 시간과 방법이 다르다. 우선순위를 고려해서 손봐야 한다. 오래 걸리는 것부터 먼저 시작해야 시간을 잘 운용할 수 있을 뿐더러 재료 본연의 맛을 뽑아낼 수 있다. 뭐부터 해야 하나 허둥지둥 주먹구구식으로 했다가는 일이 꼬기게 되고 김치맛도 꼬이게 된다.


한마디로 중노동이라 할 수 있다. 쉽지 않은 작업임에 틀림 없다. 직접 담가보며 김치가 비싼 가격에 팔리는 것에 완전 설득됐다. 재료값은 그리 비싸지 않을지라도 기술이 필요하며 인간의 기술만으로는 또 안 되는 한계로 인해 자연의 손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김치를 종합예술이라고 했는지도. 어려운 시험문제 같이 붙잡고 씨름해야 하는 김치. 그러나 시험문제가 풀렸을 때의 해방감과 성취감은 모든 노고를 한방에 날려버린다. 잘 담가진 김치 한 점의 맛이 주는 그 희열은 대체 불가능한 매력이다. 과거의 모든 고생은 온 데 간 데 없이 잊히고 좀 더 어렵고도 매력적인 다음 문제를 향해 제 발로 이끌려가게 된다. 이렇듯 새삼 내가 한국인임을 김치를 통해 실감하는 요즘이다. 김치 먹는 DNA만 있는 줄 알았는데 김치 담그는 DNA도 내장되어 있는 걸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