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배추 절임 성공기
드디어 주말이 되었다는 것은 원 없이 김치 실습을 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는 것으로서 일 주일 내내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지난 번 포기김치의 실패를 반드시 만회하리라. 야심차게 배추를 공수하러 마트로 달음질한다. 서둘러야 한다. 단 한 포기를 담더라도 포기김치는 만만찮아서 시간만 최소 10시간 이상이 걸리는 작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관 없다. 기필코 만족스런 작품(?)을 얻어내리라는 일념 하에 이 모든 사서 고생은 즐겁기만 할 뿐이다. 드넓고 광활한 마트 내부로 진입한 나는 오직 배추 코너 앞으로 직진한다. 배추라는 참으로 생경하고도 신비스런 이 생명체 앞에서 감회가 새롭다. 살면서 내가 언제 이렇게 배추와 작정하고 상견례한 적이 있었던가. 이토록 네가 반갑고도 친근한 적이 있었던가 말이다. 푸릇푸릇한 배추들이 한 봉지 한 봉지 참 정성스럽게도 싸여서 진열되어 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이 순간 내 눈빛이 반짝반짝 살아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너무 무거워도 안 된다. 겉잎은 진한 푸른 빛일수록 좋다. 단 한 포기를 고르더라도 내 맘에 쏙 드는 것이어야 한다. 까다로운 내 눈높이에 가까스로 통과한 녀석이 선택 받았다. 배추 하나를 고르는 일마저도 왜 이렇게 설레고 흥미진진한지... 나에게 있어 김치란 더 이상 음식만이 아닌 특별한 존재로 승화되었다. 김치와 함께라면 항상 이야기가 따라다닌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나의 아침 식사도 자연스레 김치와 함께 하는 의식(?)이 된다. 그런데 식사를 하려고 김치통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사형선고(?)를 받았던 포기김치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일이 일어난 것임에 분명했다. 갓 담갔을 땐 명품 김치가 탄생햅네 동네방네 온갖 호들갑을 떨며 야단이었는데 이삼일 만에 흐물흐물해져서 갖다 버려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며 좌절 모드로 추락했던 것이 엊그제 같았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아삭아삭 씹히는 맛이 완전 딴판이 되어 있었다. 죽어가는 김치가 부활한다는 얘긴 못 들어본 것 같은데... 별 일이 다 있다. 김치는 죽은 듯 보여도 버젓이 살아있는 생명이었다. 갑자기 김치 앞에서 옷깃을 여미며 더욱 겸손해진다. 자연이 하는 일이란 늘 내 생각보다 높다. 그래서 늘 자연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내가 한 일이라곤 한 개도 없고 요 며칠새 오직 자연이 일했다. 그리고 이 아침에 내게 맛있는 김치를 선물로 주었다. 뭐든 너무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단정짓지 말라는 가르침과 함께.
새롭게 부활한 김치와 함께했던 아침식사 이야기를 맛있게 끝내고, 또 다른 이야기로 가보자. 마트에서 고르고 골라 사다 놓은 배추 이야기가 그것인데, 이번엔 제대로 투지를 다지며 모든 과정에 임하리라 힘 팍주고 절인 사연이다. 배추절임은 전체 김치의 성공을 50%이상 좌우하는 핵심 공정이기에 심혈을 기울여야만 한다. 따라서 절임배추를 구매하여 김치를 담는다는 것은 결코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일이다. 사실 내 맘 같아서는 내 품에서 씨앗부터 배추를 길러 김치를 담가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 땅부터 사야 할 것 같긴 하지만.
배추를 절이기 전 경건한 마음으로 심호흡을 먼저 해야 한다. 이것은 백 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카운트다운을 하면 최소 장장 13시간이 걸리는 일임을 스스로에게 주지시키는 단계이다. 그리고 비로소 생배추를 손질하기 시작한다. 칼로 가르는 것부터 정신집중 심기일전하여야 한다. 절반 또는 1/3 지점까지만 칼을 대야 하며 나머지 부분은 손으로 찢어 반절 나눠야 한다. 여기까지는 지난 번과 동일했다. 그러나 그 다음, 소금물의 농도를 맞추는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이걸 등한시한 그 무지의 결과로 처참하게 절임에 실패한 전철을 더는 밟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저울까지 꺼내서 각 잡고 정확한 소금의 그램수를 계량한다. 그리고 물 용량을 잰다.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굵은 소금을 야심차게 거머쥐고 배추 틈새 사이사이로 뿌려준다. 팍, 팍, 아낌없이 과감하게 뿌려주는 게 포인트. 물론 이 뿌리는 소금의 용량도 정해진 범위를 지켜야 한다.
소금물에 소금 친 배추를 입수시킨 시점부터 정확히 10시간을 잰다. 이제부터 나는 없고 배추의 시간표만이 존재한다. 밤부터 절인 터라 이제 곧 잘 시간이다. 내가 자든 말든 배추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일을 한다. 그 사이에 나는 잠들고 꿈을 꾸고 다시 아침을 맞아 깨어난다. 나는 이제 일어났어도 배추는 밤새도록 눕지도 졸지도 않고 한결같이 일하고 있다. 절임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눈 비비며 배추 앞으로 가는 발걸음이 너무나 떨린다. 마치 합격자 발표를 확인하러 가는 심정이다. 왠지 배추도 나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있는 듯 사위가 고요하다. 이번엔 부디 잘 절여져 있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이 순간을 위해 그 동안 훓어보고 살펴보며 씨름한 절임 레시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이렇게 했더라면 전교 1등감이다. 드디어 개봉박두....
만세, 만세다!! 이렇게 기쁠 수가. 몹시 만족스런 절임 배추의 탄생, 태어나서 최초다. 한 포기 배추를 절이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여기까지 오는데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맘 고생이었다. 바로 그때, 축포가 들려온다. 축하드립니다. 당신의 배추 절임 능력치가 상승했습니다. 정말이지 행복한 주말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