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열전

by 치유의 통로

배추김치, 파김치, 갓김치, 깍두기, 섞박지, 오이김치... 나도 몰랐던 내 안의 김치 담그기 DNA가 본격적으로 깨어난 모양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연구와 실습을 거듭하고 있다. 일종의 금단증상처럼 김치를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고 김치가 없는 일상은 뭔가 빠진 것처럼 허전하기만 하다. 요즘 보는 책도 90%이상이 김치와 관련된 것들이다. 김치에 대해 일장연설하고 있는 책들을 보면서 동지애를 느낀다. 수십 년 전 절판된 희귀본을 어렵사리 확보했을 때는 마치 세상의 절반을 얻은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김치 담그기의 묘미는 역시 포기김치다. 어영부영 6포기를 담갔고 이제 7포기째를 준비중이다. 이 정도면 나 같은 초보에게는 거의 김장 수준이다. 평생 김치 담그는 것 같은 일은 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김장까지 불사할 정도가 된 걸 보면 사람 일이란 참 알 수 없다. 김치는 맛있는 데다가 큰 기쁨을 안겨주니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모든 과정이 재미가 있다. 내가 담근 김치에 대한 주변의 반응도 다소 핫해서(?) 나름 보람도 느낀다. 속으론, '아니, 정말 그 정도란 말인가?' 싶다가도 내가 먹어봐도 나름대로 그럴 듯한 맛이 나서 더 나은 맛을 내기 위한 동기부여가 된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삶이 고단할 때, 나를 구원해줄 방법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 것임을 터득했다. 그럴 때는 잠도 잘 이루지 못하는 불면의 밤을 겪기도 한다. 차라리 조용히 김치를 담그기로 한다. 쪽파를 하나하나 다듬고, 무채를 썰어 산을 쌓고, 오래도록 풀죽을 끓인다. 배추가 잘 절여졌는지 가끔 들락날락하며 확인해주고, 잘 갈린 양념에 고춧가루를 한참 동안 곱게 불려놓는다. 이 모든 걸 거치다 보면 마음은 어느새 잘 정돈된 서랍처럼 가지런해진다.


잘 된 김치는 빛깔도 곱고 맛과 향이 좋아서 담근 사람에게 큰 성취감과 행복감을 안겨준다. 이제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며 함께 기뻐할 일만 남는다. 김치 나눔을 통해 주변으로 맛이 전파되고 기쁨이 확산된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내 삶의 무게도 덜어지며 다시 가벼워진다. 밤늦도록 김치를 담그느라 노곤노곤해진 육신은 이내 편안히 잠자리에 든다.


이젠 힘드니 그만 담그라는 주변의 만류와 어느덧 각종 김치들로 꽉찬 나의 냉장고를 바라보노라면 이쯤에서 정말 멈춰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면, 왠지 이보다 더 맛있는 김치를 담글 수 있을 것 같은 영감이 떠올라 오늘도 기어이 배추를 사러갈 궁리만 하고 있는 나를 아무도 못 말린다. 머릿속에서 새로운 레시피가 탄생하고 그걸 실행했을 때 얻는 뜻밖의 결실이 이어지는 한, 나의 김치 열전은 당분간 계속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