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물과 차가운 맥주

벌거벗은 영혼들의 안식처, 펍(Pub)과 목욕탕

by 양수경


내가 사는 동네, 가장 목 좋은 곳에는 '웨더스푼(Wetherspoon)'이라는 펍이 있다. 단돈 2.2파운드(약 4천 원) 면 커피를 무한정 마실 수 있는, 고물가 영국에서 서민들의 숨통을 트여주는 곳이다. 하지만 이곳의 진짜 매력은 가격이 아니라 건물 그 자체에 있다. 원래는 경찰서였던, 오래된 2급 보존 건물(Grade II). 죄지은 자들을 가두고 심문하던 차가운 공권력의 공간이, 이제는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키고 위로하는 알코올의 공간이 되었다니. 시간의 아이러니가 겹겹이 쌓인 묵직한 문을 열고 들어간다.


낮에는 커피 향이 감돌던 이곳은 오후 5시가 되면 마법처럼 공기가 바뀐다. 비에 젖은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온다. 바(Bar) 앞에 느슨하게 서서 파인트 잔을 기울이는 사람들. 가만히 보면 일행이 아닌 경우가 많다. 굳이 통성명을 하지 않아도, 낯선 이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같은 곳(TV 화면 혹은 허공)을 바라본다. 넥타이를 맨 은행원도, 페인트 묻은 작업복을 입은 배관공도 이곳에서는 평등하다. 그들은 급해 보이거나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저 묵직한 맥주잔을 들고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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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자욱한 수증기 너머로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어린 시절, 엄마 손에 이끌려 갔던 동네 목욕탕이다. 뿌연 안개 속에서 동네 아줌마들이 벌거벗은 채 앉아 있던 곳. 사회적 지위나 입고 온 옷의 브랜드 따위는 사물함에 처박아두고, 오직 '살과 살'로만 마주하던 적나라한 평등의 공간. 그곳엔 묘한 연대감이 있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등 좀 밀어주실래요?"라고 등을 내맡겨도 전혀 어색하지 않던 신뢰의 세계. 땀을 뻘뻘 흘리며 서로의 묵은 때를 밀어주던 그 끈적하고도 따뜻한 정(情).


생각해 보면 **영국의 펍은 '옷을 입고 들어가는 목욕탕'**이다. 한국인이 뜨거운 온탕에 몸을 담그며 "으어, 시원하다"라고 신음 섞인 감탄사를 뱉을 때, 영국인은 차가운 맥주 첫 모금을 들이키며 "Ah~"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한국인이 때수건으로 서로의 등을 밀어주며 육체적 무장을 해제한다면, 영국인은 내가 한 잔 사면 너도 한 잔 사는 '라운드(Round)' 문화를 통해 서로의 잔을 채워주며 심리적 무장을 해제한다. 평소 "Sorry"와 "Thank you"라는 예의의 갑옷으로 꽁꽁 싸매고 타인과의 거리를 생명처럼 여기는 영국인들이, 유일하게 그 갑옷을 벗고 무장해제 되는 곳이 바로 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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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의 치유력은 위대한 작가들도 일찌감치 간파했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에세이 《물 밑의 달(The Moon Under Water)》에서 이상적인 펍을 묘사하며 "펍은 사람을 바꾸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게 한다"고 했다.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 속 펍 역시 정보가 돌고 서민들의 삶이 응축된, 그들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장소로 그려진다. 한국의 문학도 마찬가지다. 박완서 작가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동네 목욕탕은 여성들의 연대 공간이자, 전쟁의 피로와 가난을 몸으로 기억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장소로 묘사된다. 영국의 펍이나 한국의 목욕탕이나, 그곳은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니라 고단한 영혼들이 잠시 쉬어가는 **'제2의 거실'**이었던 셈이다.


그 견고하던 성역의 힘은 역사 속에서도 증명되었다. 얼마 전 BBC 뉴스에 'Ye Olde Fighting Cocks(이 올드 파이팅 콕스)'의 폐업 소식이 보도되었다. 서기 793년에 문을 열어 흑사병과 내전, 그리고 두 번의 세계대전 중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켰던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펍이다. 나치 독일의 폭격 속에서도 문을 열고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며 맥주를 나누던 그곳이,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다. 폭격은 견뎠으나 고립은 견디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이 모일 수 없게 되자, 1,200년을 이어온 '위로의 공간'도 숨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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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민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던 펍은 지금,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한국의 동네 목욕탕이 찜질방이나 피트니스 센터로 바뀌어 가듯, 영국의 펍이 있던 자리에는 고급 플랫(Flat)이 들어선다. 이유는 단순하다. 온기를 유지하는 비용이 너무 비싸졌기 때문이다. 런던의 살인적인 땅값은 펍 주인에게 맥주를 파는 것보다 건물을 팔아치우는 것을 강요하고, 치솟는 가스비와 수도 요금은 동네 목욕탕의 문을 닫게 했다. 자본의 논리 앞에서 '머무는 공간'은 가차 없이 '소유하는 공간'으로 대체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마음의 변화일지 모른다. 집집마다 넷플릭스가 나오는 안락한 거실이 생기고,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오는 욕실이 생기면서 우리는 굳이 밖으로 나가 타인과 섞이는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졌다. 우리는 '끈적한 연대' 대신 '매끈한 고립'을 선택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타인의 체온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편리해졌고, 그래서 더 외로워졌다.


우리는 이제 어디서 갑옷을 벗어야 할까. 어디서 벌거벗은 영혼이 되어, 뜨거운 물 혹은 차가운 맥주에 기대어 "아, 시원하다"라고 뱉어낼 수 있을까. 비 내리는 런던의 저녁, 웅성거리는 펍의 소음 속에 서서 나는 문득, 이제는 돈을 주고도 사기 힘들어진 그 뜨끈한 '사람의 온도'가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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