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의 문지방과 영국의 현관문 사이
영국에서 심리 상담사(counsellor)로 일하다 보면, 문득 한국인으로서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바로 ‘가족’과 ‘법’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상담실의 제1원칙은 ‘비밀 보장(confidentiality)’이다. 클라이언트가 과거에 무엇을 했든 상담사는 그 비밀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 하지만 이 철칙조차 무력해지는 서늘한 순간이 있다. 만약 당신이 테러를 모의하거나, 거액의 돈세탁을 고백한다면? 상담사는 당신에게 말 한마디 없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 영국의 법은 상담실의 두꺼운 커튼마저 걷어 젖히고 들어와 묻는다.
“그 고백이 사회 전체를 위협하는가?”
개인의 가장 내밀한 내면을 다루는 상담실에서조차, 영국의 법은 ‘사회적 책임’을 ‘개인의 비밀’보다 위에 놓는다.
이 냉정한 원칙은 상담실 밖, 가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영국을 떠들썩하게 한 ‘전직 브랙넬(Bracknell) 시장 사건’이 그 증거다. 그녀는 성범죄 혐의를 받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일부러 문을 늦게 열어주고, 그 틈을 타 아들에게 “증거가 담긴 폰을 숨기라”라고 지시했다가 재판에 넘겨졌다. 죄목은 ‘사법 방해(perverting the course of justice)’. 검사는 이를 두고 “어머니의 사랑이 범죄의 영역까지 뻗어 나간 사례”라고 일갈했다.
영국의 법은 굳게 닫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식탁 위에 앉는다. 이곳에서 가족을 숨겨주는 행위는 따뜻한 ‘보호’가 아니라 명백한 ‘은폐’로 간주된다. 혈연이라는 끈끈한 관계도 ‘법’이라는 차가운 이성 앞에서는 무력하다.
반면, 내가 나고 자란 한국은 다르다. 한국 형법 제151조는 범인을 숨겨주면 처벌한다고 명시하지만, 그 끝에는 너무나 한국적이고 인간적인 단서 조항이 붙어 있다.
“단, 친족 또는 동거의 가족이 본인을 위하여 이 죄를 범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
한국의 법은 집 안까지, 정확히 말하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까지는 들어오지 않는다. 법은 ‘문지방’ 앞에서 멈춰 선다. 비록 흉악범이라 할지라도 부모가 자식을, 아내가 남편을 숨겨주는 행위에 대해 국가는 죄를 묻지 않는다. 그것이 옳아서가 아니다. 차마 부모에게 자식을 고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천륜)’에 반하는 잔인한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근본적인 온도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그 답을 두 나라가 살아남아야 했던 ‘생존의 풍경’에서 찾는다.
한국은 전통적인 ‘벼농사 사회’였다. 모내기부터 추수까지, 이웃과 손을 잡지 않고는 밥을 먹을 수 없는 구조 속에서 ‘우리’는 생존의 필수 조건이었다. 국가가 생기기 전부터 가족이 있었고, 마을이 있었다. 여기에 유교적 도덕 질서가 정치·통치 이념으로 더해지며 국법보다 천륜을 앞에 두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조선시대에는 아버지를 고발하는 것이 오히려 강상죄로 다스려지지 않았던가. 한국인에게 인간이란 홀로 존재하는 점이 아니라, **‘관계 속에 놓인 선(線)’**이다.
반면 영국은 거친 파도와 싸워야 했던 ‘상업과 항해의 나라’다. 낯선 바다에서, 혹은 낯선 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혈연이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계약’이었다. 홉스와 로크가 말한 사회계약론처럼, 그들에게 국가는 개인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이성적으로 합의해 만든 시스템이다. 따라서 법(계약)을 어기는 것은 사회 전체와의 약속을 깨는 배신이다. 여기에 “우리 사이에”라는 사적인 감정이 끼어들 틈은 없다. 영국인에게 인간이란 ‘스스로 책임지는 독립된 점(點)’이다.
이런 문화적 토양 위에서 통제의 방식도 달라졌다. 한국은 **‘부끄러움(shame)’**의 문화다. 내 행동의 기준은 타인의 시선에 있다. 가족의 죄를 덮어주는 것은 그를 사랑해서이기도 하지만, “남 부끄러워서 어떻게 사나”라는 수치심을 막기 위한 방어기제이기도 하다. 반면 영국은 **‘죄책감(guilt)’**의 문화다. 신 앞에 단독자로 선 개인은 아무도 보지 않아도 스스로 정한 원칙을 어겼을 때 내면의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엄마라도 아들의 죄를 덮기보다,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이 원칙을 지키는 일이라 믿는다.
물론, 문지방을 넘지 않던 한국의 법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오랫동안 ‘집안일’이라는 이름으로 묵인되던 가정 폭력에 경찰이 개입하기 시작했고, 2025년에는 가족끼리라도 도둑질이나 사기를 치면 처벌받도록 법(친족상도례 폐지)이 바뀌었다. 이제 한국의 법도 ‘돈(재산)’과 ‘폭력’ 앞에서는 서서히 문지방을 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턱이 닳지 않은 곳이 있다. 바로 ‘핏줄을 지키려는 마음’ 앞이다. 재산 싸움에는 법이 끼어들어도, 자식을 숨겨주는 부모의 마음에 칼을 대는 것은 여전히 가혹하다고 믿는 정서. 한국 사회는 지금 ‘정의’를 위해 문을 열어야 한다는 이성과, ‘천륜’을 위해 문을 닫고 싶은 본성 사이에서 치열하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영국의 법은 공정하지만, 그 냉정함 앞에 관계의 회복이나 망설임의 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법은 개인을 보호하지만, 때로는 사람을 시리도록 고립시키기도 한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두 나라 모두 인간됨을 지키려다 인간을 놓치는 순간이 있다.
어느 쪽이 더 인간적인가라는 질문은 어리석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이 반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얼마 전, 이 주제로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복잡한 속내를 털어놓고 말았다.
“나는 말이야, 가정 폭력이나 억울한 재산 싸움 같은 건 법이 당장 안방까지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해. 그건 문지방을 넘어서라도 약자를 구해야 하는 정의의 문제니까.”
친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만약 내 아들이 쫓기는 상황이라면? 그때도 내가 문을 활짝 열어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숨겨줄 것 같아. 엄마니까.”
친구는 잠시 침묵하더니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 역시 뱉어놓고 보니 참으로 이기적이고 모순적인 고백이었다. 나는 누군가가 내 가족을 해칠 때는 법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문지방을 넘어오길 바랐지만, 내가 내 자식을 지켜야 할 때는 법이 문밖에서 멈춰 서주길 바랐다. 정의를 위해서는 법이 필요했지만, 사랑 앞에서는 법이 거추장스러웠던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가족을 위해 방문을 잠그는 손. 한국에서는 그 떨리는 손을 “오죽했으면”이라는 연민으로 바라보고, 영국에서는 그 손을 “그래도 법은 지켜야지”라는 이성으로 제지한다.
나는 여전히 이 두 마음 사이에서 서성인다. 가정 내 폭력은 막아야 한다는 ‘시민의 윤리’와, 그래도 자식은 품어야 한다는 ‘어미의 본능’. 어쩌면 법이 들어올 수 있는 한계선은, 법조문이 아니라 바로 이 모순된 마음이 매일같이 충돌하는 그 문지방 위에 그려져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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