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과 ‘멜랑콜리(Melancholy)’ 사이에

런던의 비는 차갑게 젖고, 서울의 눈물은 뜨겁게 고인다

by 양수경


런던의 오후 세 시. 하늘은 벌써 물 먹은 솜이불처럼 축 늘어져 있다. 안개비, 영국 사람들이 drizzle이라 부르는 그 비가 소리 없이 내려온다. 이곳의 비는 한국의 장마처럼 한 번에 쏟아붓지 않는다. 그저 하루 종일 축축하게, 옷깃과 마음 사이로 스며든다.


영국에서 겨울을 산다는 것은 추위를 견디는 일이 아니라 빛의 부재를 견디는 일에 가깝다. 오후 세 시면 어둠이 내려앉는 계절. 이 긴 겨울 동안 많은 영국인들은 ‘계절성 정동 장애(SAD, Seasonal Affective Disorder)’라는 마음의 감기를 앓는다. 일조량 부족으로 세로토닌이 줄고, 이유 없이 무기력해지는 상태. 그래서일까. 이곳의 슬픔은 소란스럽지 않다. 영국인들은 슬픔을 밖으로 터뜨리기보다, ‘멜랑콜리(Melancholy)’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몸에 걸친다. 비에 젖은 코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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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처음 영어를 가르쳐주었던 튜터, 도로시(Dorothy)도 그 긴 겨울을 앓고 있었다. 그녀는 은퇴한 교사였는데, 늘 차분하고 지적인 영국 부인이었다. 하지만 겨울이 깊어지면 그녀의 거실 커튼은 대낮에도 쳐져 있었고, 그녀는 종종 테이블 위에 ‘라이트 테라피(Light Therapy) 박스’를 켜두곤 했다.


하얀 인공 광선을 뿜어내는 그 작은 기계 앞에서, 그녀는 홍차를 마시며 희미하게 웃었다.

“한나, 영국의 겨울은 사람을 바닥으로 가라앉게 해요(Sinking). 그래서 우린 스스로 빛을 만들어야 하죠.”


어느 날, 내가 비자 문제와 학교 행정 처리의 불합리함 때문에 얼굴이 붉어져서 억울함을 토로한 적이 있었다. 내 목소리 톤이 높아지고, 가슴을 치며 답답해할 때, 도로시는 그저 조용히 내 손등을 덮으며 말했다.


“Oh, dear… Mustn’t grumble.” (오, 저런… 불평해선 안 돼요.)


그녀의 위로는 따뜻했지만, 미지근했다. 그녀는 같이 화를 내주지도, 욕을 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영국의 날씨처럼 차분하게 내 감정을 흡수할 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그 고요한 침잠(Sinking) 앞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내 안의 불덩이는 활활 타오르는데, 그녀의 세계는 너무나 축축하고 고요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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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알았다.

영국인의 슬픔과 한국인의 슬픔은 온도가 다르다는 것을. 영국의 슬픔은 '수성(watery)'이다. 비에 젖은 양모 코트처럼 차갑고 묵직하지만, 겉으로 보기엔 단정하다. 그들은 정원을 가꾸고, 긴 산책을 하며 감정을 풍경 속에 섞는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Stiff Upper Lip(의연함)’은, 이 멜랑콜리한 기후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생존 방식처럼 보인다.


반면, 내가 나고 자란 한국의 슬픔은 ‘화성(Fiery)’의 감정이다. 내 핏속에 흐르는 정서, ‘한(恨)’은 차갑게 식지 않는 ‘불덩이’다. 한국의 슬픔은 가라앉지 않는다. 가슴 명치끝에 맺히는 단단한 ‘응어리’다. 억울함과 설움이 뭉쳐진 이 뜨거운 에너지는 밖으로 분출되어야 비로소 해소된다. “아이고” 하고 소리 내어 울거나, 가슴을 치거나, 매운 것을 먹으며 땀을 흘려야 직성이 풀린다.


도로시의 라이트 테라피(인공 빛)로는, 내 안의 펄펄 끓는 화가 도무지 잠재워지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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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여전히 부슬비가 내리는 런던 거리를 걸었다. 사람들은 우산도 없이 코트 깃을 세운 채 묵묵히 걷고 있었다. 문득 도로시의 작은 인공 태양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 빛에 의지해 멜랑콜리의 바다를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집에 도착해 매운 라면을 끓였다. 보글보글 끓는 붉은 국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지금 균형을 배우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고.


내 안에 '한'만 있었다면 타버렸을 것이고, '멜랑콜리'만 있었다면 가라앉아 익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국의 차가운 공기가 내 열기를 식히고, 내 안의 한국적 에너지가 이 눅눅한 우울을 데운다.


버지니아 울프처럼 우아하게 우울을 견디다가도, 속이 터질 땐 김소월처럼 붉게 울어도 된다. 씁쓸한 홍차와 매운 라면 국물이 내 위장 속에서 섞이듯, ‘한’과 ‘멜랑꼴리’도 내 안에서 기묘한 조화를 이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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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문학에서 멜랑콜리는 오래된 영감의 원천이었다. 존 키츠(John Keats)나 바이런(Lord Byron)의 시를 읽다 보면, 그들이 슬픔을 피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어두운 아름다움’을 발견했음을 깨닫게 된다. 영국의 슬픔은 밖으로 터뜨려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으로 가라앉히는 ‘침전(沈澱)의 미학’이다.


반면 한국 문학의 슬픔은 얼마나 뜨거운가. 김소월의 「진달래꽃」에는 체념보다 끓는 애절함이 있고, 박경리의 「토지」 속 인물들은 한을 삶의 동력으로 삼아 버텨낸다. 한은 무너짐이 아니라 살아내게 하는 힘이다.


중년의 나이에 영국으로 건너온 나는 이 두 슬픔 사이에 서 있다. 창밖에서는 런던의 비가 조용히 내리고, 내 안에서는 여전히 뜨거운 불씨가 살아 있다.


이제는 안다. 굳이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차가운 성찰이 필요할 땐 런던의 비를 맞고, 다시 움직여야 할 땐 내 안의 불을 지피면 된다. 오늘도 나는 잿빛 하늘 아래서 뜨거운 커피에 우유를 붓는다. 차가움과 뜨거움 사이, 그 중간 어딘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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