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했는데 출근이 6개월 뒤라고요?

종이를 믿는 사회, 사람을 믿는 사회

by 양수경


"합격입니다."


나는 전화를 끊자마자 식탁 위 달력을 펼쳤다. 한국의 시간표로 계산하면 ‘합격 = 다음 주 월요일 출근’쯤은 충분히 가능한 공식이니까. 펜을 들어 조심스럽게 다음 주 날짜를 콕 찍고는, 습관처럼 둥근 동그라미를 그렸다.


마치 시간이 그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만 흐를 것처럼.

내가 이미 이 낯선 땅 어딘가에 온전히 소속된 사람인 것처럼.


나는 그 작은 동그라미 옆에 아주 작게 적어두었다.


First day.


하지만 영국의 합격은 ‘시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기차를 티켓만 쥔 채 플랫폼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기약 없는 ‘대기’의 다른 말이었다. 전 직장의 레퍼런스(추천서) 체크, 신원 조회, 그리고 끝이 없는 서류 작업을 거쳐 최종 계약서의 잉크가 마르기까지… 정말로 수개월이 걸렸다.




특히 상담사처럼 사람의 마음과 안전을 다루는 직종은 영국에서 ‘DBS(범죄경력조회)’ 체크가 필수다. 신청서를 작성하며 지난 몇 년간 살았던 모든 주소를 영어로 하나씩 적어 넣었다. 어렵다기보다는, 내가 지나온 시간을 다시 펼쳐 보는 기분에 가까웠다.


정부로부터 ‘이 사람은 타인에게 해를 끼칠 범죄 기록이 없다’는 무해함을 서류로 확인받기 전까지,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일할 수 없는 사람, 내 입술로는 나를 믿어달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 내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지역 자선단체(Charity)의 자리를 얻을 때도 체감상 6개월 이상이 걸렸다


“대체 이 나라는 사람을 얼마나 못 믿기에 이렇게까지 깐깐하게 구는 걸까?”


‘빨리빨리’ DNA가 뼛속 깊이 새겨진 토종 한국인으로서는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합격이라는 축배를 들고도 내 삶이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 진짜 답답한 건 낭비되는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 앞에서 개인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지독한 ‘무력감’이었다.




한국은 어떤가.


한국은 ‘말’과 ‘정(情)’이 곧 계약서인 사회다.


“우리가 남인가요. 믿고 가는 거죠.”

“좋은 게 좋은 거잖아요.”


그 말 한마디면 수억 원의 거액이 오가는 부동산 계약도 단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끝난다. 서류보다 사람의 눈빛을 믿고, 절차보다 관계의 끈끈함을 믿는다.


반면 영국은 ‘종이(서류)’가 완벽해질 때까지 모든 세계가 멈춰 있는 사회다. 집 하나를 렌트하려 해도 이전 집주인에게서


“이 사람은 월세를 밀리지 않는 좋은 세입자였다.”

“집을 깨끗하게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라는 레퍼런스를 받아야 한다.


막 영국에 도착해 과거를 증명할 서류가 없는 이방인에게는 시작부터 거대한 벽이다. 레퍼런스가 없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1.5개월 치면 될 보증금(Deposit)을 6개월, 심지어 1년 치를 일시불로 요구받는 일도 허다하다.




효율성과 속도로만 따지면 한국의 완승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 뉴스에서 연일 비극적으로 보도되는 ‘부동산 전세 사기’ 사건들을 보며, 나는 영국의 그 융통성 없고 지루한 서류 작업들을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한국 사회를 떠받치던 그 자랑스러운 ‘믿고 가는 시스템’은, 누군가의 악의 앞에서 너무나도 쉽게 무너져 내렸다. 멀끔하게 양복을 입은 공인중개사의 웃음과 호언장담만 믿고 도장을 찍었던 수많은 청년들이 하루아침에 전 재산을 잃고 벼랑 끝에 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한국 특유의 고맥락 사회에서는 깐깐하게 서류의 이면을 묻고 검증하는 행위를 ‘상대방을 의심하는 야박한 짓’으로 치부해 버리기 때문이다. 의심 대신 믿음을 미덕으로 강요하는 사회 속에서, 시스템은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잠시 멈춰 서서 브레이크를 걸어줄 시간을 갖지 못했다.


여기에 질문이 남는다.


진정한 신뢰란 무엇일까?

타인의 선의가 영원할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는 것일까?




영국인들이 사람을 못 믿어서 6개월씩 계약서를 들여다보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이란 본디 유혹에 약하고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개인의 얄팍한 말’보다, 오랜 시간 사회가 다듬어온 ‘견고한 시스템과 종이’를 더 신뢰하기로 합의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당장 내가 불편하고 답답하더라도, 아무도 다치지 않는 가장 안전하고 두꺼운 돌다리를 만들어 건너겠다는 지독한 고집이다.


여전히 영국의 느릿느릿한 행정 처리를 마주할 때면 피가 마르고, 전화 한 통이면 뚝딱 해결되는 한국의 ‘당일 처리’가 미치도록 그립다.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나를 반년이나 기다리게 했던 그 지루하고 피 말리는 시간이, 사실은 누군가의 악의로부터 나를 철저히 보호하기 위해 가장 단단한 ‘갑옷’을 짜고 있던 시간이었음을.


계약 앞에서 ‘좋은 게 좋은 것’은 없다. 때로는 답답할 만큼 느리고 융통성 없는 ‘확실한 것’만이, 결국 우리를 가장 안전하게 지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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