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했던 내가 가장 외로웠다
재작년 여름, 임신 사실을 알게 됐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4개월 무렵, 병원에서는 유산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리고 얼마 뒤 진료실에서 혼자 초음파를 바라보며, 이 아이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고 설명을 들었다.
그렇게 나는 짧은 임신을 끝내고, 수술 일정을 잡았다.
수술 후 퇴원하며 병원에서는 최소 일주일 정도는 쉬라고 했다.
몸이 회복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라고
하지만 나는 병실에서 복귀 일정을 먼저 계산하고 있었다.
메일은 얼마나 쌓였을까, 내 일은 누가 대신하지?
우리 팀엔 나 혼자뿐이었다.
당장 내가 없으면 일을 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휴가 없이 복귀하기로 마음먹었다.
몸보다 회사가 먼저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책임감이고, 배려라고 생각했다.
수술을 마치고 난 다음날 사무실로 복귀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 앉아 전처럼 일했다.
그날 대표이자 팀장이 내게 말했다.
“안 쉬어도 돼?”
나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팀에 저밖에 없잖아요. 쉬어야 되긴 하는데… 집에서도 자꾸 눈물이 나네요.. “
그 말을 들은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그래, 차라리 일하면서 잊는 게 나을 수도 있어. 차라리 일하자! “
그 순간, 마음속에서 뭔가 툭 끊어졌다.
나는 회사를 배려했는데 회사는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회사가 개인의 모든 일상을 공감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가족 같은 작은 회사였던 것을..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어떤 감정도 꺼내지 못했다.
그저 그렇게 다시 일했다.
몸은 여전히 아팠고 하혈은 멈추지 않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통증이 밀려올 땐 화장실에 앉아 잠깐 울다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정상처럼 보이는 얼굴로 정상처럼 보이는 업무를 했다.
그날 이후 나는 회사에 마음을 기대지 않게 됐다.
회사는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궁금하지 않았고 단지 내가 일할 수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만 궁금해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리소스였고 감정보다 생산성이 먼저였다.
그 사건을 겪은 이후로 책임감이라는 단어에 조심스러워졌다.
책임감은 늘 내가 나를 다그치는 데 쓰였고 회사는 그 책임감을 이용해 나를 계속 일하게 했다.
배려는 나에게만 요구됐고 정작 나는 배려받지 못했다.
나는 묻고 싶었다.
정말 나였어야 했냐고.
왜 아무도 대신하지 못하는 구조를 방치했냐고.
그리고 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복귀한 나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었냐고.
시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이 종종 떠오른다.
“차라리 일하자!”
그 말은 내 아픔을 부정했고, 나의 애도마저 지워버렸다.
나는 내 상실을 온전히 겪지도 못한 채 그저 일로 덮었다.
그게 회사를 위한 최선이라고 믿었지만 결국 나만 무너졌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어떤 책임감은 스스로를 해치고 어떤 배려는 스스로를 고립시킨다는 걸.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조금 더 나를 지켜주고 싶다.
회사보다 내 몸, 일보다 내 감정, 회복보다 업무가 우선이 되어선 안 됐다는 걸 이제는 안다.
누군가는 아무렇지 않게 건넨 말이
누군가에겐 오래도록 남는 문장이 된다.
그 말을 꺼내기까지, 2년이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