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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Oct 19. 2021

'엄마와 그림책' 모임을 만나다

'제주 1년 살이' 네 번째 이야기



책 육아에 집착한 이유  


정신없이 바쁜 워킹맘 시절에도 웬만하면 자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는 편이었다. 어린이집에서 하는 책 읽기 챌린지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건 몰라도 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시간만은 꼭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육아 철학이나 소신도 없으면서 유독 책 육아에 집착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가장 순수하고 그럴듯한 이유로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하고,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또 책을 읽을 때만큼은 아이와 실랑이 없이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도 좋았다. 워킹맘은 보통 출근 전부터 퇴근 후까지 하루 종일 종종거린다. 아침에 아이를 깨우고, 씻기고, 먹이고, 입혀서 어린이집에 보내고, 하원 후에 다시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까지 어느 것 하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하루 중 '육아'에 쓰는 시간이 상당하지만,  아이랑 정서적으로 교감하거나 긍정적으로 상호작용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지 않다. 나도 늘 그런 갈증을 느꼈던 터라 비교적 편안한 마음으로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책 읽기 시간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으로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애들한테 책은 열심히 읽어줬다'는 자기만족, '책만 많이 읽어주면 되지, 어릴 때부터 한글, 영어 이런 거 가르칠 필요 뭐 있나?' 하는 자기 합리화도 분명 있었다. 그래서 책을 사랑하는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순수한 마음에 아이와 좀 더 교감하고 싶은 바람, 여기에 자기만족과 자기 합리화까지 더해져서 '아이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 싶은 의문과 회의감에 빠졌다. 아이들은 수십 번 읽어서 책의 내용을 다 외울 지경인 자연관찰책만 읽어달라고 가져왔고, 내가 함께 읽고 싶은 책을 골라서 읽어주면 영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제야 단순히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육아휴직 중에 이 문제를 해결해보고 싶었고, 그때 마침 '엄마와 그림책'이라는 모임이 내 눈에 쏙 들어왔다. 제주 어린이 책방 북스페이스곰곰에서 꾸려나가는 '엄마와 그림책' 모임은 볼수록 나에게 딱 필요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 제주에 내려가기도 전에 미리 신청해두고, 시작하는 날짜만 기다렸다.




'엄마와 그림책' 모임에 나가다


예상대로 첫 모임부터 느낌이 좋았다. 재미있는 데다가 유익하기까지 했다. 나는 모임이 있는 날마다 그날 이야기 나눈 책들 가운데 우리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책을 사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저녁에 아이들의 표정과 반응을 세심하게 살피며 그 책을 함께 읽었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은 내가 고른 책들을 매번 진심으로 즐겼다. 깔깔깔 넘어가며 웃다가, 갑자기 생각에 잠기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내기도 하고, 다 읽고 나면 '한 번 더!', '또 읽어주세요!' 하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렇게 그날그날 배운 걸 실전에 바로 적용해보는 경험은 정말 즐거웠다.


그렇게 두 달 동안, 매주 수요일 아침마다 여덟 명의 엄마들과 모여서 책 이야기를 나누고, 밤이면 아이들과 함께 그 책들을 읽었다. 모임에서 접하는 다양한 책을 통해 그림책의 세계를 조금씩 배워 나갈 수 있었고, 엄마들과 이야기 나누면서 묘하게 위로받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내가 놓쳤던 부분들도 하나씩 깨닫게 됐다.




'글자'에서 벗어나 '그림책'으로 대화하자


나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글에만 집중한다는 데 있었다. 그림책을 고를 때도 일단 글을 쭉 읽어보고, 내용이 괜찮다 싶으면 샀는데,  막상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 아이들에게 재밌는 그림책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함께 책을 읽을 때도 글자 읽어주느라 바빠서 아이와 '그림'을 보면서 충분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아이의 질문에도 한두 개만 성의 없이 대답하고, 빨리 넘어가자고 하기 일쑤였다. (아이들이랑 책을 읽긴 읽어야겠고, 잠도 제시간에 재워야겠고, 무엇보다 나는 항상 피곤했다!) 아이들이 책을 읽을 때 시큰둥했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모임이 거듭될수록 아이와 독서 시간은 단순히 책만 읽는 시간이 아니라, 책을 매개로 아이와 즐겁게 대화하는 시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아가 책을 읽으며 나눈 대화는 독서 시간에만 갇히지 않고, 우리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었다. '산딸기 크림 봉봉' 책을 읽고 주말에 온 가족이 크림 봉봉을 직접 만들어 보기도 하고, 팥빙수를 먹을 때마다 '팥빙수의 전설'의 두 주인공, 눈 호랑이와 할머니 이야기를 나누며 깔깔거렸다.


모임 덕분에 지금까지 읽어볼 엄두도 내지 못했던 '글 없는 그림책'에도 도전할 수 있었다. 책 읽는 시간이면 언제나 내가 글자를 읽어주고 아이들은 그림을 보면서 듣기만 했는데, 글 없는 그림책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수지 작가의 '파도야 놀자' 책을 함께 읽던 날, 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1호 꼬마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아이는 주저하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먼저 주인공의 이름부터 정해야 된다며 책 속 여자아이에게 지은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더니,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겨가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나에게는 무척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엄마와 책상'으로 내 감정 들여다보다


8주 간의 과정을 잘 마무리한 '엄마와 그림책' 모임은 한 달 후, '엄마의 책상'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가웠다. '엄마의 책상'을 통해서는 엄마 이전의 '나'에 대해 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엄마가 된 이후, 자신의 공간과 시간을 가족들에게 모두 내어주며 살아온 엄마들이 그림책을 매개로 자신의 감정을 돌아보고, 살피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 미움과 화해, 열등감과 자존감 등 다양한 감정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함께 그림책을 읽었다. 마지막으로 '나답게 살아가는 법'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서로 공감하고, 또 응원했다.   


그림책에 대한 지식을 배우는 건 온라인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곳에 모여 앉아 서로 마음속 이야기를 나눌 때 생기는 에너지는 남다른 힘을 가진다고 생각한다. 특히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제주에 내려와 여자 어른 사람과 이야기 나눌 기회가 매우 한정적이었던 나에게는 더욱 특별했다. 이 모임을 통해서 책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제주 엄마들과 깊이 '연결'될 수 있었다.


지금도 북스페이스곰곰에서는 '엄마와 그림책', '엄마의 책상'모임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모임을 통해서 더 많은 엄마들이 아이들과 행복하게 그림책을 읽고, 자기 자신을 돌보고, 서로 연결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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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

북스페이스 곰곰 gomgom_jeju

'엄마와 그림책' 협동조합 eomma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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