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9
1.8
제이는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준호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도 이렇게 신경이 예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준호의 변호사가 준호가 작성한 유언장에 대해 알려주자 제이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준호는 지금 치료가 필요한 상태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행방이나 생사를 알지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준호의 변호사는 당분간 모든 회사의 권한을 제이에게 이임했다. 제이는 준호의 행방불명이 마음에 걸렸다. 평소의 준호라면 충동적으로 어디론가 사라졌을 리는 없었다. 제이는 준호의 목적이 언뜻 머릿속에 떠올랐다. 언젠가 준호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준호가 자기의 상상 같은 새로운 세상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제이는 준호가 죽기 전에 그 상상을 시도해 보기 위해서 떠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면서 제이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하지만 제이는 내일은 유미와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다. 중앙관리국에 결혼 신고를 하려면 최신 건강검진 정보를 등록해야 했다. 그리고 유미를 위해서 집안도 정리해야 했다. 준호와 회사 문제를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다. 제이가 회사 일을 마무리하고 병원에 들러서 건강검진을 받는 동안 유미는 제이의 집에서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녀의 짐들 중 가장 소중한 것은 아무래도 식물들이었다. 제이는 그녀에게 지하 휴게실에서 한층 더 내려가면 넓고 어두운 창고 공간이 있다고 알려줬다. 그곳은 돌로 만들어진 창고였다. 제이의 집 입구의 차고 공간과 통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항상 일정한 온도가 유지되고 해가 들지 않는 그 공간은 음지 식물에게는 최고의 서식지가 될 수 있었다. 유미는 그 넓은 지하 공간에서 음지 식물을 더 많이 키울 수 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창고를 둘러보다가 와인들과 치즈가 있는 곳의 옆에 책꽂이가 보였다. 책들은 유리문으로 닫혀있는 책꽂이 안에 있었다. 유미가 책꽂이의 손잡이를 잡아당겼지만 손잡이에는 제이의 집안사람들을 감지하는 센서가 달려있어서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제이가 건강 검진을 마치고 병원을 나설 때 제이를 부르며 다가오는 의사가 있었다. “제이, 오랜만이야. 병원은 준호 때문에 온 거야? ” 제이를 부르며 말을 시킨 사람은 준호의 주치의이자 제이의 주치의이기도 한주영 박사였다. 누구보다 제이와 준호를 잘 아는 이유는 그들의 주치의이기도 하지만 어릴 때 같이 공부한 친구이기도 했다. “응, 오랜만이다. 난 건강검진받으러 왔어.” “그랬구나. 나는 준호가 입원해 있어서 병문안 온 줄 알았지.” “준호는 지금 행방불명이야. 주치의가 그것도 모르다니.” 제이의 대답을 듣고 한주영 박사는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어제까지만 해도 담당 신경외과 의사랑 내가 이야기했는데.” “준호는 어젯밤부터 병원에서 사라져서 지금 현재 행방불명이야. 집에도 병원에도 회사에도 없고 연락이 안돼.”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주치의인 내가 몰랐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알겠어. 다음에 보자.” 한주영박사는 자신의 환자에 대해서 최신 정보가 전달되지 않은 것이 몹시 불쾌한지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 “한박사, 잠깐만 기다려봐. 나랑 조용히 얘기 좀 하자.” 제이는 돌아서 가려는 한주영 박사를 급히 불러 세웠다.
제이는 한 주영 박사의 연구실에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있었다. “병동보다는 여기가 제일 조용해. 자, 이제 이야기를 들어 볼까? 나한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야?” “나는 준호가 없어진 게 너무 이해가 되지 않아. 너는 혹시 준호가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 뭔가 아는 게 있을까 해서.” “흠, 네가 알다시피 나는 준호가 사라진 것도 몰랐는데 나한테 그런 걸 묻다니. 준호에 대해서는 같이 일하는 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최근에 준호의 뇌에 악성종양이 발견된 것 말고는 그가 사라질 다른 이유가 있을까? 아무리 이성적인 인간이라도 죽음이 닥치면 일탈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 “내가 아는 한 준호는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일 애가 아니야. 치료를 거부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어딘가로 사라졌어. 준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답답하네.” “걱정하지 마. 준호라면 네가 찾지 않아도 분명히 자기 계획대로 어딘가에서 잘하고 있을 거야.” 한 주영박사는 담담하게 제이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제이는 한 주영박사의 말을 들으니 한편으로는 그 말에 수긍이 갔다. “자,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이제 접어두자. 아무튼 너의 결혼 축하해. 우리 중에서 네가 가장 먼저 2세를 갖게 되었구나.” “그래, 집에 가서 정리할 게 있어서 그만 가볼게. 한번 집으로 초대할게.” “좋지. 그리고 혹시 준호에게 연락이 오면 나에게도 알려줘.” “준호에게 연락이 올까?” “살아있다면 너에게 연락할 가능성이 가장 커.” 제이는 한 주영 박사의 자신에 찬 조언에 오늘이라도 준호가 연락을 해 올 것 같아 손목의 스케줄러를 만지작 거리면서 병원을 나왔다.
제이는 집안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았다. 유미가 이미 집에서 짐을 정리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 집에 들어와 있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새로운 느낌이었다. 그가 유리로 된 현관문을 들어서자 오른쪽의 집안 지도가 보이는 모니터 위에 붉은 불빛이 하나 더 늘어났다. 제이는 모니터에서 유미의 위치가 표시된 곳을 보았다. 그리고 곧 유미가 있는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평소에는 거의 내려가지 않는 그곳은 아주 어릴 적에는 여러 가지 짐들이 있어서 동생과 함께 놀이터처럼 사용했던 곳이었다. 조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는 한동안 비어있다가 제이가 독립을 하면서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제이는 지하 창고부터 정리했다. 할아버지가 모아 놓은 대부분의 물건들은 박물관에 기증하거나 아버지에게 드리고 오래된 책들만 그가 소장하고 있었다. 지하창고로 내려가는 문이 반쯤 열려있었다. 제이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흙냄새와 습기 냄새 같은 지하창고 특유의 냄새를 느꼈다. “어서 오세요. 정리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여기서 식물 정리 하고 있었어요.” 제이가 오는 소리를 듣고 유미가 하던 일을 멈추고 제이를 향해서 먼저 인사를 했다. “잘했어요. 생각보다 식물들이 보기 좋네요.” 유미는 창고의 한쪽에 계단 식으로 된 식물 거치대를 놓고 가져온 식물들로 모두 채웠다. 언뜻 보기에는 풀들이 자라는 낮은 구릉처럼 보였다. “ 한번 둘러보시겠어요. 제가 어릴 때부터 키워온 식물도 있고 제가 직접 새로 개발 한 식물들도 있어요. 나중에 하나하나 다 설명해 줄게요.” 유미는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설렘도 있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집중하는 즐거움도 그녀를 약간 흥분시킨듯했다.
1.9
“예술가 아가씨 아니야? 언제 다시 돌아온 거야?” 주사장은 이영을 알아보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기억력이 뛰어나고 눈치가 빠른 장사꾼이었다. 주사장은 이영이 자기 클럽에 도착했을 때부터 방에 달린 모니터를 통해서 이영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반년 전에 옆 건물의 강 씨 가게에서 바텐더를 하고 있던 마르고 볼품없던 이영이 이제는 제법 섹시해 보였다. “그동안 무엇을 하고 왔기에 이렇게 변한 거지. 제법 괜찮아 보이네.” 주사장은 책상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서 복도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예술가 아가씨. 나를 찾는 거면 여기야. 여기로 오라고.” 그의 목소리는 조용한 복도를 지나 홀까지 퍼졌고 홀에서 북적 거리는 손님들과 종업원들 사이에서 서성거리던 이영에게도 들렸다. 이영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봤다. 홀의 좌측으로 넓은 복도가 있고 거기서 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다가가자 붉은색 카펫이 깔려 있는 복도 끝에서 주사장이 이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예술가 아가씨가 우리 클럽에 왜 왔을까?” 이영이 주사장의 방에 들어가서 소파에 앉자 주사장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건 새로 나온 음료인데 한번 마셔봐. 무슨 일로 왔는지 모르지만 오랜만에 예술가 아가씨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네.” 주사장은 이영에게 맥주병을 건넸다. 그러면서 계속 이영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실제로 가까이서 보니 아까 모니터에서 봤던 모습보다 더 괜찮아 보였다. “저를 기억하고 알아봐 주시니 감사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금 일자리를 찾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강사장님 바에서 바텐더도 했습니다. 칵테일 만드는 것과 술 손님 상대하는 것은 지금이라도 당장 가능합니다.” 주사장은 이영의 말을 듣다가 혼자 킥킥거리면서 웃었다. 그는 크게 웃는 것보다 정말 웃길 때는 웃음을 참아 넘기는 버릇이 있었다. “여기 주클럽은 강사장 바와는 완전히 다른 곳이야. 아가씨도 그건 잘 알고 있겠지? 우리 주클럽은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인간이 욕망하는 걸 다 얻을 수 있는 곳이지. 우리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강사장 바랑은 차원이 달라. 아무나 여기서 일할 수 있는 게 아니야. 하지만 우리 예술가 아가씨가 원하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줄게. 자, 일단 이거나 마셔봐.” 주사장은 이영의 맥주병에 자신의 병을 부딪히면서 건배를 했다.
이영은 예상보다는 주사장에게 호의적인 대접을 받아서 마음이 놓였다. 이영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병을 테이블에 놓았을 때 방문이 열리면서 한 명의 여자가 들어왔다. “음, 제니스, 여기 이 예술가 아가씨가 일자리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우리 클럽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찾아봐줘.” 주사장은 체격은 작지만 탄탄해 보이는 여자에게 눈빛으로 이영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술가 아가씨, 인사해. 이쪽은 우리 클럽 총 지배인 제니스야. 아가씨가 우리 클럽에서 일자리 찾는 걸 도와줄 거야.” 제니스는 이영을 귀찮은 듯이 힐끗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찾아줘야 하나요?” “오늘부터 우리 클럽이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알려주고 천천히 적성에 맞는 걸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바.” “네. 다른 지시사항이 없으면 영업시간이 다 돼서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니스는 사무적으로 대답하고 바로 방을 나갔다. 마치 더 이상 주사장이 말을 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 그러는 것처럼 보였다.
제니스가 나가자 주사장이 이영에게 말했다. “뭐 해. 얼른 따라가 봐. 오늘부터 제니스가 너의 보스가 될 거야.” 이영은 벌떡 일어나서 방을 나왔다. 복도를 둘러봐도 제니스는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았다. 불과 1분도 안된 시간인데 사라져 버렸다. 이영은 복도 끝으로 뛰어가서 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제니스는 홀의 한쪽에서 종업원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영이 그 무리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제니스는 이영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는지 그녀를 돌아보면서 이야기했다. “이쪽으로 와봐요.” 이영이 제니스와 다른 종업원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이름이 모라고 했죠?” “이영입니다.” “이영 씨는 아직 정해진 일은 없어. 혹시 여러분들이 지나다니다가 이영 씨를 보게 되면 본인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간단히 알려주고 일을 시켜도 좋아. 이영 씨는 무슨 일이든 이분들이 하는 걸 도우면서 배우도록해요.” 이영은 알았다는 듯이 제니스와 종업원들을 향해서 고개를 살짝 숙여서 인사를 했다.
제니스가 말을 마치자 종업원들은 모두 할 일이 있는지 금세 흩어져서 사라졌다. 이영은 우두커니 서있다가는 제니스 뒤에 바짝 붙어서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홀의 입구에 있는 안내 데스크 옆 엘리베이터 앞으로 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타요.” 제니스는 이영을 돌아보면서 말했다. 이영이 엘리베이터에 타자 제니스도 따라서 탔다. 그리고 가장 높은 층인 8층 버튼을 눌렀다. 별 소음도 없이 아주 부드럽게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이영과 제니스는 어색한 침묵 속에 엘리베이터 안에 갇혀있었다. 천천히 엘리베이터가 브레이크를 밟는 느낌이 들고 정지했다. 문이 열리자 이번에는 제니스가 아무 말도 없이 먼저 내렸다. 이영은 그녀를 빠른 걸음으로 뒤따가갔다. 복도 중간쯤 한 방문 앞에 서서 제니스가 손잡이의 센서에 손을 대자 문이 열렸다. 제니스는 방문 손잡이를 잡아 열어젖히고 이영을 향해 말했다. “내 짐작으로는 숙소가 필요한 것 같은데 맞나요?” “네.” “여기서 지네요. 한 시간 뒤에 1층으로 내려오면 오늘 해야 할 일을 알려줄게요.”
이영은 방안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현관문에서 들어서면 오른쪽은 옷장이 있고 왼쪽으로는 화장실이 있었다. 그리고 안쪽으로 침대 하나와 정면에 거울이 있고 창가 쪽으로 작은 모니터가 있는 책상과 일인용 소파가 있었다. 주클럽에서 일하게 되면 근처 어딘가에 방을 얻으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았다. 이영은 가방을 옷장에 넣어 놓고 방을 나왔다. 방의 위치를 기억하려고 방문에 쓰인 숫자를 외웠다. 23이라는 숫자가 낯설지 않았다. 이영이 다시 1층으로 왔을 때 주클럽은 이미 장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입구의 카운터에서 제니스가 예약한 손님을 확인하고 있었다. 제니스는 이영이 내려온 것을 보고 옆으로 오라고 손짓을 했다. “여기 들어오는 손님은 이미 문 앞에서 센서가 정보를 읽어 들여서 이 스크린에 나오고 있어. 이영 씨는 이 스크린을 보고 손님 정보 옆에 나온 서비스 담당자를 호출해 주면 돼요. 만약 서비스 담당자가 없으면 그냥 이 버튼을 눌러요. 그러면 누군가 올 거야.” 제니스는 스크린을 보는 법과 직원 호출을 하는 법을 간단히 가르쳐주고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