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3.4
3.3
제이는 그의 수명이 너무 많이 남아있어서 지루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매일밤 준호가 남기고 간 자료들을 보면서 준호의 흔적을 찾다 보니 삶이 지루하지 않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요즘 그를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또 하나의 원인은 그의 아내 유미였다. 제이는 결혼에 대해서 많은 기대가 없었다. 미래를 위해 좀 더 나은 유전자 조합을 만들어 내는 노력 정도로 생각하는 게 다였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씩 결혼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유미는 제이보다 감정이 조금 더 풍부한 편이었고 그것은 제이에게도 전염되기 시작했다. 제이는 회사에서 중간중간에 그녀가 궁금하고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집에 와서도 그녀가 그를 반겨서 맞이하는 날이면 제이는 왠지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야 제이는 그녀를 자신의 유전자를 나눠 가질 수 있는 대상에서 인간적인 유대를 맺을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이가 받은 감정체험 시술은 효과적이었다.
“오늘 내가 무엇을 발견한 줄 알아요?” 유미가 제이에게 다가오면서 다소 흥분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이 영상을 한번 보면 당신도 놀랄 거예요.” 제이는 유미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흥분해 있는지 의아했다. 유미는 준호의 자료들이 들어있는 클라우드에 접속해서 영상 자료를 찾았다. “이 영상에서 59분에 저 오른쪽 끝부분을 잘 보세요.” 영상자료는 숲 속을 비추고 있었는데 사람으로 보이는 뒷모습이 카메라의 촬영 각도 끝부분에 잠시 잡혔다가 사라졌다. “사람인 것 같아요. 너무 작아서 침팬지 인지 사람인지 정확하지는 않은데 그래도 형상은 사람에 더 가깝게 보이네요” “맞아요. 이건 분명히 사람이에요.” “우리 회사의 침팬지들은 제4 구역에 있는 농장에서 일하고 그 외에는 숲 속에서 사육됩니다. 이 영상들에 나오는 숲은 제4 구역은 맞는데 우리 회사 침팬지 사육장은 아니에요.” “저도 이 장소가 가장 궁금했어요. 이 영상들은 어떤 실험을 위한 목적으로 오랫동안 촬영된 것으로 보여요. 근데 이 영상 파일들의 이름을 잘 보세요. 숫자가 길지만 이건 날짜와 위도와 경도의 위치 정보를 합쳐서 섞어 놓은 거예요. 이 숫자 조합의 암호를 풀어서 위도와 경도에 넣어보면 지역이 특정되죠. 근데 특이한 것은 여긴 제4 구역 청정지대 중에서도 섬처럼 강으로 둘러 쌓인 고립된 지역이에요.”
제이는 유미가 발견한 사실들보다는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에 더 놀라고 있었다. “여긴 아마도 김준호 박사가 실험하던 노쇄한 침팬지들이나 사회 부적합 판정을 받고 되돌아온 침팬지를 풀어주던 곳으로 생각됩니다. 언뜻 준호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제이는 처음 영상에서 사람의 실루엣을 보았을 때 그것이 준호라고 확신했다. 준호가 아무리 병 때문에 실망했더라도 그냥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누구보다 탐구 의욕이 강했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저기에 준호가 있다면 왜 가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가 하던 연구가 뭘까요? 점점 더 궁금해지네요.” 제이는 의자에 기대어 생각에 잠겼다. “김준호 박사가 무슨 연구를 하려 했는지 알아내려면 좀 더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자세한 임상 실험에 관한 파일은 찾아봐도 없었거든요.” “좀 이상하긴 하군요. 임상 실험에 대한 일지나 보고서 같은 것은 없는데 관찰을 하고 있던 흔적은 있으니. 제가 읽은 참고 논문들은 대부분 유전자 결합과 동물 행동학에 관한 것이었어요. 물론 유전자 결합 논문중 너무 오래된 논문들은 저도 처음 보는 것이라 아직 다 읽어보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유미와 제이는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했다. 이제 이 둘에게는 준호의 연구가 무엇이었는지가 준호의 행방보다 더욱 그들의 흥미를 끌기 시작했다. “매일 오전 9시에 전날의 영상이 자동으로 올라와요. 이 섬같이 고립된 숲 속의 영상들에 가끔 씩 나오는 침팬지들이 분명히 준호 씨가 연구하던 주제였을 거예요. 회사에서 침팬지 유전자 변형에 관련해서 새로 하던 실험이나 프로젝트는 없었나요?” 유미의 질문을 듣고서 제이의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한 번은 농담처럼 노동이 아니라 정치를 할 수 있는 침팬지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한 적이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죠?” “저도 그냥 그때는 관심이 없어서 농담으로 듣고 더 깊이 대화를 안 했어요. 지금 우리가 공급하는 온순하면서 근육량이 많은 노동에 적합한 침팬지가 아니라 지능이 높은 뇌를 가진 침팬지도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겠죠.”
“김준호박사가 뭔가 침팬지의 지능을 높이는 유전자를 알게 된 걸까요? ” 유미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지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우리의 사고 범위를 벗어나서 생각해야 그 친구의 의도를 알 수 있을 거예요. 참고한 자료들을 보면 과거 유전자 관련 연구들이 많아요. 새로운 침팬지를 만들려고 한 것은 맞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왜 최신자료가 아니라 과거 자료들을 참고했는지는 의문이에요.” “준호 씨의 논문에서 지능이라는 단어를 한번 다 검색해 봐야겠어요. 어딘가 실마리가 분명히 남겨져 있을 거예요.” 유미는 너무 집중한 나머지 제이가 옆에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모니터를 바라보며 서치를 하기 시작했다.
3.4
윤이는 강 씨의 가게로 다시 돌아왔다. 강 씨의 가게는 그가 떠났을 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단지 그동안 영업을 거의 하지 않아서 재고가 많이 남아있었다. “난 아무래도 이제 가게를 접어야 할 것 같아. 심장이 점점 조여 오는 게 이제 서있는 것도 힘들어.” 강 씨는 손님처럼 바에 앉아서 윤이를 보고 하소연하듯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강 씨는 그가 그렇게 기다리던 윤이가 다시 돌아온 것이 그다지 기쁘지 않은 표정이었다. “주사장이 당분간 이 가게를 자기가 해보겠다고 하니까 여기는 그대로 운영하면 될 거야. 자네를 좋게 봤는지 자네가 운영해 주는 조건으로 가게를 사겠다고 했어.” “그렇군요. 그럼 사장님은 이제 집에서 쉴 건가요?” “그렇지 뭐. 이젠 정말 쉬어야지. 주사장이 이 가게가 맘에 들었는지 가격을 후하게 쳐줬어. 당분간 돈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편히 쉬어야지.” 강 씨는 아마도 지금보다 더 살이 찔 것이고 심장에는 더 무리가 올 것이다. 그것이 그의 유전자가 향하는 방향이었다. “혹시라도 제가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병원에 가거나 하실 때.” 윤이는 진심으로 강 씨가 자신을 필요로 할 때 꼭 불러 주길 바라는 심정으로 말했다.
“아참, 근데 지난번 여기서 자네가 목숨을 구해준 경감 기억나?” “네, 기억합니다.” 강 씨는 테이블 앞에 있는 과자기계에 동전을 넣고 레버를 돌려서 또르르 떨어지는 과자를 보고 말했다. 잠시 후 과자가 다 떨어졌는지 조용해지자 강 씨는 한 손에 과자를 담아 바로 입으로 가져가 털어 넣었다. 강 씨가 입에 과자를 한 줌을 넣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우물 거리면서 윤이에게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한번 왔다 갔어. 자넬 찾더라고.” “무슨 이유로 저를 찾았죠?” “자세한 이유는 말하지 않고 그냥 여기서 술을 한잔 마시더라고. 근데 자네가 없는걸 눈치채더니 나에게 자네가 언제 오는지 물었어. 그래서 자네가 말없이 떠나서 다시 안 돌아올 것 같다고 했어.” “아, 그랬군요. 근데 저를 찾는 이유는 말하지 않던가요?” “내가 왜 찾냐고 물었는데 그냥 지난번에 자기를 도와줘서 감사인사를 하려고 찾는다고 했어. 근데 그렇게 높은 신분의 사람이 여기까지 감사인사를 하러 일부러 왔을까? 그 이유 때문에 자네를 다시 찾으러 왔을 리가 없잖아. 무슨 이유로 자네를 찾는지 혹시 짚이는 거라도 있어?” “저야 잘 모르죠. 필요하면 다음에 또 찾으러 오겠죠.” 윤이는 이수현 경감이 자신의 신분을 알아챘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자기를 찾아올 줄은 몰랐다. 윤이는 속으로 만일 그와 다시 마주친다고 해도 별다른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럼 나는 이제 집에 가서 쉬어야겠어. 가끔 놀러 올게.” 강 씨는 몸이 불편한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윤이는 강 씨의 팔을 잡아 부축했다. 오늘따라 강 씨의 무거운 몸과 불편한 다리가 윤이의 마음도 무겁게 했다. “제가 언제든지 부르면 찾아갈 테니 필요하면 꼭 연락하세요.” 윤이의 진심이 느껴졌는지 강 씨는 육중한 몸을 힘들게 움직이면서 윤이를 향해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강 씨를 바래다주고 온 윤이는 가게의 문을 닫고 부엌 뒤쪽 자신의 방으로 갔다. 윤이는 자신이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준호를 만나게 되었는지 생각했다. 그가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무렵 그는 오래된 책들을 읽고 의문에 빠졌다. 그 책들은 자신의 할아버지 집의 지하실 어두운 창고에 쌓여있었다. 윤이 이외에 가족들 중 누구도 그 책에 눈길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 책의 주인인 할아버지도 오래된 책들이 거기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때 지하실에서 곰팡이 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차갑지도 덥지도 않았던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윤이는 그 지하실에서 읽은 오래된 책의 첫 문장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인간은 인간에 의한 인위적 선택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가 설계한 인간이 점점 세상의 주류를 이룰 것이다." 제이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자신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꼈다. 윤이의 지능은 보통의 1급 시민들보다 훨씬 높았다. 그로 인하여 그는 일찍부터 삶의 지루함을 깨닫고 더 많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경험했다. 그가 1 구역을 벗어나서 살고자 하게 만든 것은 자신의 근본에 대한 탐구였다. 윤이는 결코 설계된 인간의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주어진 것을 벗어나서 자신의 본능을 찾아 사는 삶을 살고 싶었다. 윤이는 준호도 결국 자신과 같은 의문을 품고 다른 방식으로 답을 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윤이는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겨서 방안에 죽은 듯이 조용히 앉아있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한참을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스케쥴러에서 메시지 도착 표시가 반짝였다. 윤이는 그 불빛에 잠에서 깬 듯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에게 전달된 메시지를 확인했다.
준호는 그에게 클라우드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서 상황모니터링 파일 중 그가 중요 표시를 해둔 파일을 보라고 했다. 그의 프로젝트에 뭔가 새로운 소식이나 발견이 있는 것 같았다. 윤이는 어두운 방 안에서 노트북을 켜고 반짝이는 커서를 따라 우주 공간을 떠돌듯이 파일을 찾아들어가서 열었다. 영상에는 암컷 침팬지가 제법 배가 부른 모습으로 숲 속에서 거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전까지는 새로운 침팬지 종의 배아 수정에는 성공했지만 암컷 침팬지의 자궁에 수정된 배아를 착상시켰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윤이가 숲 속의 실험실 안에서 본 것은 수정된 배아가 보관 중인 보관실이었다. 그러나 화면에 보이는 침팬지는 배가 제법 부른 것으로 보아 곧 출산을 할 것으로 보였다. “우리가 수정한 배아의 첫 번째 개체가 2주 안에 탄생을 하게 될 것 같아요. 앞으로 계속 태어나겠지만.” 다소 격앙된 톤의 준호의 음성 메시지가 컴퓨터에서 흘러나왔다. “수정된 배아가 보관 중인 것만 보았는데 벌써 자궁 안착이 이루어져 있었군요.” “대량으로 만들어 내려면 아무래도 인공자궁을 이용하는 게 낫죠. 하지만 기존에 우리 회사에서 인공자궁을 통해 배양된 침팬지들은 수명이 길지 않고 면역력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어요. 이 네오침팬지들은 실제 자궁에서 착상되어서 자라기 때문에 훨씬 안정적인 수명과 면역력을 가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과제는 개체수를 단시간에 늘릴 수 있는 방법이겠네요. 임신기간을 단축할 수 있도록 유전자를 변형시키던가 인공자궁을 실제 자궁처럼 업그레이드시키거나 둘 중 하나를 해결해야겠군요.” 윤이의 말에 준호는 약간 뜸을 들이다가 답장을 했다. “맞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그 생각을 저는 회사를 창립한 처음부터 했죠. 아까 본 그 침팬지는 임신 기간이 50일 된 침팬지입니다. 65일에서 70일이면 출산을 하게 될 겁니다.” “그럼, 벌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는 거군요.” 윤이는 준호가 단지 새로운 객체의 탄생 때문에 기뻐서 영상을 보낸 것이 아닌 것을 알고 약간 놀라고 있었다. 그가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것은 알았지만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고도 감춰온 것이 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준호가 마음만 먹는다면 짧은 임신기간을 통해 네오 침팬지를 대량으로 번식시킬 수도 있었다. 과연 준호는 상상하는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아직 문제를 해결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네오침팬지가 우리 예상대로 건강하면 그때는 정말 성공이겠죠. 네오 침팬지는 자궁 내 성장기간도 짧지만 태어나서 성숙하게 되는 시간도 2년으로 단축된 종입니다. 5세대까지 별 다른 변이 없이 번식하게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0년이면 충분합니다. 그걸 다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제 수명이 따라주지 않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짧게 만들려고 노력했겠죠.” 준호의 목소리는 의지에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