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6
3.5
주클럽의 대부분 손님들은 룸에서 술이나 마약을 하기 위해 왔다. 홀에서 술을 마시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홀에서 이영이 혼자 서빙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이영이 할 일이 없어서 바텐더 옆에 서 있는 게 어색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사정이 달랐다. 초저녁부터 술을 마시러 오는 사람이 많았다. 이영은 손님들이 떠드는 소리를 통해서 강 씨의 가게가 오늘 문을 닫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게 누구야? 한동안 안보이더니 여기서 일하고 있었어?” 손님들 중에 이영을 알아본 사람이 이영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이영은 그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작년에 강 씨 가게에서 바텐더로 일할 때 왔던 손님이려니 하고 그저 웃으면서 인사를 받아줬다. “아, 네. 그동안 잘 지내셨지요?” “그럼. 내가 한잔 살게. 마시고 싶은 거 마셔.” “아니에요. 근데 옆 가게는 왜 닫았는지 혹시 모르세요?” “모르지. 어제는 바텐더도 다시 오고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갈 것 같더니 오늘 가보니까 휴업이라고 쓰여있던데.” 그때 옆에 있던 손님이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 내가 보기에는 강 씨가 얼마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아 보였어. 오늘 갑자기 병원이라도 실려가서 휴업을 하는 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이제 손님들이 더 오지는 않을 것 같은데 잠시만 좀 나갔다 올게요. 금방 올 거예요. 옆가게에 갔다 올 거니까요. “ 이영은 바텐더에게 이야기하고 강 씨의 가게에 가기 위해서 주클럽을 나왔다. 강 씨가 혹시 아파서 가게 문을 닫은 것이라면 강 씨는 병원에 있더라도 윤이는 가게 안의 방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의 일층으로 들어서자 강 씨의 바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 문이 굳게 닫혀있는 것이 보였다. 이영은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문을 두드리면서 틈새에 대고 윤이를 불렀다. 이영이 윤이의 이름을 몇 번 부르다가 그만 돌아가려고 멈춘 순간 문 안쪽 멀리서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작게 들렸다. 이영은 문틈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사람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였다. “이영 씨가 웬일이세요?” 잠시 후 문을 열어 준 사람은 윤이었다. “아, 역시 계셨군요.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요. 강 씨 아저씨가 아픈 건가요?” 윤이는 반쯤 열었던 문을 활짝 열었다. “일단 들어오세요.” 윤이는 벽에 기대서 이영에게 들어 올 공간을 내줬다. 이영이 윤이가 서 있는 계단을 지나 한발 내려가자 윤이도 문을 닫고 이영을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게 안은 테이블 위에 의자들이 얹혀있었다. 그 모습은 언뜻 보기에도 가게가 폐업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가게를 닫기로 한건가요? 강 씨 아저씨가 많이 아프기라도 하세요?” 이영은 뒤를 돌아서 윤이에게 물었다. “아픈 건 항상 그랬고 이제 좀 쉬고 싶으신가 봐요. 이 가게는 주사장님이 샀어요. 리모델링을 할지 어떨지 모르지만 당분간 휴업을 하기로 했어요.” 이영은 예상치 못한 윤이의 대답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를 주사장님이 샀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우리 홀에도 바가 있지만 바는 장사가 잘되도 마진이 높지 않은데 왜 여기를 샀을까요? 참 의외네요.” “그래도 이 바가 오래되어서 단골손님이 많아요. 그걸 보고 산거겠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곧 다시 열게 되면 어떤 식으로 운영할지 알게 되겠죠.” “그럼 저는 그만 가볼게요.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해서 와본 건데 아무 일도 없다니 다행이네요. 홀에서 서빙을 하다가 왔거든요. 여기가 닫혔다고 손님들이 저희 바로 몰려들었어요.” “일부러 와주셨는데 제가 괜히 미안하네요. 내일 낮에 시간 되면 점심식사라도 하러 오세요.” 윤이의 말에 이영은 돌아서면서 대답했다. “미안할 필요 없어요. 저는 그냥 궁금해서 온 것뿐이에요. 낮에는 시간이 많이요. 그럼, 내일 점심때 다시 놀러 올게요.” “네, 내일 정오쯤 오세요. 오늘처럼 가게 문을 두드리면 제가 문을 열어드릴게요.” 그동안 이영은 주클럽에서 일을 하면서 윤이만큼 자신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윤이를 처음 만난 날에 윤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연극에 대해서 물어봤다. 그때 윤이의 눈빛과 목소리까지도 그녀는 생생하게 기억했다. 윤이의 점심초대가 이영에게는 따분한 일상에서 구원과 같았다.
3.6
유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제이와 같이 준호의 자료를 같이 보기 시작하면서 회사일보다 준호의 흔적을 좇는 일에 더 흠뻑 빠져갔다. 처음 결혼을 했을 때 유미가 가졌던 제이에 대한 호감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유미는 이제 제이를 볼 때 좋은 유전자를 공급해 줄 남자가 아니라 흥미로운 과제를 같이 풀어가는 동반자의 느낌을 갖고 있었다. “이제 조금씩 무슨 실험을 하고 있었는지 알 것도 같아요. 제가 정확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침팬지 유전자를 개발하려는 것 같아요. 근데 왜 이걸 회사에서 하지 않았는지가 의문이네요. “ 유미는 옆에 있는 제이에게 고개를 돌리면서 질문을 던졌다. “회사에서는 기존에 우리가 생산하는 침팬지의 인지 능력을 강화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준호가 모아놓은 참고자료 논문들은 대부분 생식능력과 연관되어 있어요.” “맞아요. 문서 자료만으로 보면 생식능력과 관련해서 새로운 침팬지 유전자를 개발하고 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영상자료에서 유전자 결합이나 배양 같은 영상은 없고 침팬지 관찰 자료만 있으니 뭔가 중요한 부분이 빠진 느낌이에요.” 유미는 미간 사이를 찌푸리면서 검지 손가락의 손톱을 입에 물고 말했다. 뭔가 집중해서 고민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처음부터 제 생각에 이 자료들과 파일들은 어쩌면 쓸모없는 거였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우리는 지금 중요한 정보는 다 빠진 빈 정보들만 남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죠.”
“준호 씨의 생각을 알 수가 없어요. 자료의 일부를 남긴 이유가 있을까요? 정말 중요한 자료들은 빠져있다면 우연일까요?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런 걸까요? 의도적이었다면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너무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혼란스럽네요. 다시 준호 씨의 집에 가 볼 수 있까요? 우리가 빠뜨린 게 있을 거 같아요.” 유미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제이에게 말했다. 제이는 그녀가 진심으로 준호의 흔적을 파헤치는데 집중해 있다는 것을 그녀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다. “흠, 무엇이 빠져있을까요? 그가 사이버 공간에서 남긴 흔적은 우리가 다 들여다봤어요. 그럼 물리적으로 그의 집에서 뭔가를 찾아보자는 건가요? 우린 그럴 명분이 없어요.” 제이는 유미의 관심이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하면서 무뚝뚝한 말투로 답했다.
“준호 씨의 행방을 찾는다고 하면 지난번처럼 변호사가 허락해 주지 않을까요?” “유미 씨는 준호를 찾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그가 하던 연구가 무엇인지 알고 싶은 건가요? 제 추측이 맞다면 준호의 행방은 관찰영상이 찍히고 있는 제4 구역의 청정 지역 근처를 찾으면 알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의 연구는 지금 자료로는 알 수 없지만 그를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 알 수 있겠죠. 둘 다 우리가 지금 하기에는 무리가 있어요. 준호의 행방불명을 조사하는 경찰이 이미 제4 구역의 청정지역을 가봤을 수도 있어요. 준호의 자료를 검 토하는 건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제이는 준호의 행방이나 그의 연구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 더 이상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았다. “ 경찰은 김준호 씨가 자유의지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면 더 이상 찾지 않을 거예요. 특별히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면 일상이탈자로 분류하고 죽을 때까지 잊히겠죠. 한 번만 다시 준호 씨의 집에 가봐요. 나는 그의 연구를 자세히 알고 싶어요. 만약 필요하면 도와주고 싶기도 하고요.”
유미의 의지는 강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유미는 지금 준호의 연구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제이는 그녀의 탐구하고자 하는 의욕이 이렇게 강할 줄 예상하지 못했다. “ 그의 연구를 돕고 싶다고요? 그건 의외네요. 준호를 한 번도 보지 않고 같이 일하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죠?” “연구원의 본능이라고 할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재미있는 연구 같아요. 저는 항상 새로운 지식이나 실험에 목말라 있었거든요.” “제가 분석한 유미 씨의 유전적 특징이 이렇게 설명되네요. 탐구하는 성향과 도전하는 성향이 강했거든요. 아무튼 준호의 집에 가거나 그의 행방을 쫓는 건 좀 더 기다려요. 정보 경찰이 지금 그의 행방을 찾고 있으니 그게 종료되고 결과가 나오는 걸 보고 다시 생각해 봐요. 그의 연구는 제가 봤을 때 기존의 틀에서 벗어 난 연구일 게 확실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아니면 불법일 수도 있어요. 그가 혼자 해왔다는 것과 저에게도 공유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그러니 그의 연구를 돕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요. 그가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알고 싶은 것까지는 도와줄 수 있어도 그의 연구를 돕는 건 말릴 거니까요.” 제이는 유미의 유전적 성향이 준호의 연구자료가 방아쇠가 되어 발현될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