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7.2
6.6
제이는 윤이에게 준호의 계획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다. 물론 제이는 그런 소식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윤이가 자신과 어린 시절을 보낸 아버지의 집에 가고 싶다거나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는 이야기를 먼저 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그러나 윤이는 제이에게 아버지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제이가 살고 있는 집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 집보다 할아버지의 집이 더 보고 싶다고 했다. 제이는 윤이의 바람이 의외여서 놀랐다. 옆에 있던 이수현 경감은 어떻게 해서든 윤이를 좀 더 오래 옆에 두고 싶어 했으므로 제이에게 꼭 윤이를 집에 초대하라고 부추겼다. 유미가 있는 집에 동생을 부르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지만 제이는 윤이에게 내일 저녁에 데리러 오겠다고 했다.
제이가 집으로 돌아간 뒤에 이수현 경감은 윤이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계속 거실에서 머물렀다. “오늘 저녁은 시간이 금방 갔네요. 저기 창밖에 보이는 불빛을 보니 이제야 제가 제1 구역에 와 있는 게 실감이 납니다.” 윤이는 거실의 창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창 밖에는 높은 건물들과 거기서 나오는 수많은 불빛들이 반짝 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하긴 여기는 제3 구역보다 인구가 많으니 밤에 이렇게 도시가 살아 있는 듯 불빛이 반짝이고 왠지 따뜻해 보입니다. 저쪽 동북쪽이 아마도 제이나 윤이 씨의 아버님이 사는 지역 일 겁니다. 그쪽은 낮은 산에 둘러 쌓여서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방향은 그쪽이에요. 아버님도 이제 연세가 있어서 윤이 씨를 보고 싶어 할 겁니다.” 이 수현경감은 윤이가 아버지에 대해서 언급도 하지 않고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점이 무척 궁금하게 느껴졌다.
“불빛도 불빛이지만 뿌연 연기가 없어서 밤의 도시가 참 아름답게 보입니다. 아무래도 제3 구역은 공기가 더러워서 불빛이 이렇게 잘 보이지는 않거든요.” 윤이는 이수현경감이 언급한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수현경감은 더 궁금증이 생겨서 다시 한번 윤이의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 내가 윤이 씨아버지는 윤이 씨가 언젠가는 연락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윤이 씨 어머니도 죽기 전까지 윤이 씨를 찾고 싶어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아버지를 한번 만나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윤이는 조용히 대답하지 않고 창 밖만 바라보았다. “아버지 집에 가보고 싶기는 해요. 어머니가 공부하던 방에서 나던 책 냄새도 맡고 싶고요. 아버지와 할 이야기가 많아요. 지금은 가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곧 만날 겁니다. 만나고 싶어요.” “우리 집에 있으려니 지루하겠네요. 책을 보고 싶으면 내 컴퓨터로 들어가서 공공 도서관에 책을 마음껏 봐도 좋아요.” 이수현 경감은 거실에서 자신의 컴퓨터를 켜고 도서관에 들어가도록 보완을 해제시켰다. “여기 컴퓨터는 공공 파일들에 접근 가능하도록 해놨으니 언제든지 사용해도 됩니다. ”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삼일 지나면 경감님도 어느 정도 회복 되실 것 같고 그때까지만 조금 신세를 지겠습니다.” “내가 오히려 미안하죠. 혹시 다른 필요한 거나 원하시는 것 있으면 이야기하세요”
윤이는 이수현경감의 집에서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제 하루가 지났을 뿐이고 이 수현경감의 집이 그렇게 낯설지 않았다. 단지 그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낯설고 어색할 뿐이었다. 거실의 창밖으로 어둠은 더 짙어지고 거리와 건물의 불빛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이 수현경감은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하품이 나왔다. “이제 들어가서 쉬세요. 몸도 안 좋은데 괜히 저랑 같이 거실에 있으실 필요 없습니다.” 윤이는 이수현경감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부축했다. “약을 드시고 주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제도 주무시면서 계속 신음 소리를 내서 제가 몇 번 와봤거든요.” 윤이는 이수현 경감이 약을 마시는 것을 보고 옆에 서있다가 빈 약병을 받았다.”그럼 편히 주무세요. 저는 나가 보겠습니다.” 윤이는 침대에 누워있는 이수현경감을 뒤로하고 침실을 나왔다. 윤이는 한동안 거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그러다 거실의 탁자에 놓여있던 노트북을 열고 공공데이터와 자료가 쌓여있는 도서관에 들어갔다.
7.0
유미와 준호는 시계를 바라보면서 초조한 표정으로 회의실에 앉아 있었다. 승화는 라디오를 가져다가 책상에 놓고 주파수를 맞추고 있었다. “주파수는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숫자를 메시지로 보내와요.” 승화는 기억을 저장해 놓는 지인과 통화를 할 수 있다며 급하게 준호를 찾아왔다. 유미와 준호는 과연 그 지인이 정말 기억을 저장할 수 있는지 의문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그 사람이 승화에게 준 정보는 공공도서관에는 없는 귀중한 자료들이었다. 그것만으로 그 사람은 분명히 상위레벨의 데이터 수집가인 것은 틀림없었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룰베이스 의사결정 시스템 개발에 참여한 사람들의 기억을 저장해 놨다는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중앙정부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준호는 왜 그런 고급 자료를 가진 사람이 그것을 승화에게 공유하려고 하는지는 그 의도가 의문이었다.
“주파수는 맞게 맞춰 놨으니 이제 시간이 되면 소통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시계가 아직은 오후 세시 5분 전이었다. 셋은 모두 초초한 표정으로 시계와 라디오만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라디오에서 뭔가 바스락 거리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상대 쪽에서도 드디어 라디오를 켠 것이었다. 셋은 모두 라디오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상대의 목소리가 라디오를 통해서 흘러나왔다. “오늘 세분이 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는데 다 듣고 계신 건가요?” 준호와 유미는 그 목소리에 집중하느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승화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 이메일에 밝혔던 대로 여기는 셋이 모여서 듣고 있습니다.” “승화군요. 다른 분들도 편하게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승화의 친구분들이니 나하고 친구가 될 수 있겠죠.” 상대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준호라고 합니다. 승화한테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반가워요. 저도 승화한테 김준호 박사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유미라고 합니다. 승화와 같이 해저도시의 공기정화 시스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서로 인사를 끝내고 나니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미와 준호는 모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승화를 바라보았다. “저, 오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난번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기억 데이터수집 방법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네, 좋은 생각입니다. 저는 중앙정부의 자료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오래된 자료와 영구폐기를 목적으로 버려진 자료도요. 하지만 제대로 그 자료가 쓰일 수 있는지는 사람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그 자료에 관심을 갖는 건가요?” 잠시 박사는 말을 멈추었다. “네, 박사님. 저희는 중앙정부의 룰베이스 시스템의 알고리즘에 대해 알고 싶어서 그럽니다. 궁금한 것은 박사님이 기억을 저장한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그것에 대해 조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준호는 진지하게 물었다. “ 준호 씨처럼 유전학자에게는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죽기 전에 우리의 뇌를 그대로 모두 읽어내는 겁니다. 유전자 염기서열을 읽는 것처럼 기억을 저장한 뉴런에 자극을 주면서 기억을 읽어 냅니다. 뉴런에 저장된 기억을 읽어 들이면 그 사람의 언어로 기억들이 표현되죠. 그걸 다 기록하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사건이나 반복된 일은 기억 복원율이 굉장히 좋습니다.”
“그럼 실제로 중앙정부에서 일한 사람들의 기억을 복원해서 데이터로 가지고 계신가요? 특히 룰베이스 시스템을 만든 사람들의 기억을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중요한 프로젝트이니까요. 지속적으로 룰베이스 시스템을 만들고 관리한 사람들의 모든 뇌는 죽기 전에 기억을 복원해서 저장합니다. 물론 그 사람의 기억일 뿐 정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론서 같은 것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본인이 아니면 누구도 해석하기 쉽지 않습니다.” 수염박사의 이야기를 듣는 세 사람은 모두 조용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한 일을 쉽게 이야기하고 있어서였다. 특히 준호는 유전자 염기서열을 읽듯이 뉴런의 기억을 읽는다는 것에 자신의 상상을 더해서 이해하려고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의 뉴런에 뇌의 언어로 기억이 저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과거 기억이나 단기 기억들을 필요하면 불러다 쓰지요. 뇌의 언어로 뉴런에 저장된 기억 객체들이 몇 개가 될까요? 우리가 이제까지 세어보니 평균적으로 100만 개가 되었고 그중에서 쓸모 있는 기억은 1프로 미만이었습니다. 물론 뇌를 많이 쓴 사람들 위주의 결과지만. 어쨌든 지금도 중앙정부는 중요한 사람들이 죽음을 예약하면 죽기 전에 뇌의 기억을 복기하여 저장하는 일을 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복기하는데 일주일이 걸리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열흘이 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기억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그러나 기억을 저장하는 것과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잠시 수염박사가 물을 마시는지 라디오에서는 물 마시는 소리만 들렸다.
“생각보다 시스템이 많이 발달해 있었군요. 우리에게는 생명에 대한 욕심을 줄이고 인류가 모두 만족하면서 사는 길을 추구하도록 강요하지만 결국 정부를 운영하는 시스템에 대한 욕심은 더 커진 것 같네요. 제가 우려하는 것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시스템에 대한 욕심입니다.” 준호는 비장한 목소리로 유미와 승화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반대편 라디오에서 수염박사가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준호의 말이 끝나자 말을 하기 시작했다. “김준호 박사의 생각에 나도 일부 동의합니다. 우리는 욕심을 버리면서 멸망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과거 인간은 욕심 때문에 서로를 죽이기도 하고 지구를 파괴하기도 했던 반복되는 역사가 있었지요. 그 반복의 고리를 끊은 것은 백 년 전입니다. 불과 백 년도 안 되는 시간에 우리가 유전자의 분석을 통해 인간의 계급을 분리하고 인구 밀도를 조절을 함으로 이런 평화로운 세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충동적이고 욕심이 넘치는 범죄형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소멸되어 갔죠. 하지만 지금 우리는 다른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시스템이 군림하는 체제가 자리 잡아 자고 있습니다. 모든 삶을 시스템이 결정해 준다면 인간이 아니라 시스템이 우리를 대신해 살아가는 거겠죠. 나의 다음 세대들은 최대한 자신이 의사결정을 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
수염 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유미가 질문을 했다. “박사님은 의사결정을 인간이 직접 하기를 바라신다고 하셨는데 과거로 돌아가는 것을 원하시는 건가요? 우리는 의사결정 시스템을 쓰면서 모든 일에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었고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줄여왔습니다.” “좋은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의사 결정 시스템을 사용하면서 훨씬 안정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전쟁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범죄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과거 인간들이 가졌던 감정의 스펙트럼보다 지금은 굉장히 좁아진 감정 스펙트럼을 갖게 된 게 단점일 수는 있겠죠. 지금 남아있는 인간 감정의 스펙트럼도 해마다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예측 가능한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안정된 사회이기는 하지만 정체된 사회이기도 합니다. 다 똑같은 인간들이 똑같은 일생을 살면서 생존하는 게 우리가 추구하는 세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어쨌든 중앙정부의 의사결정 시스템의 다양하고 지속적인 변화가 필요하겠죠. 그렇지 못하면 시스템도 인간도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역사는 되풀이됩니다. 인간이 변하지 않으면.”
수염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 사람은 모두 침묵에 잠겼다. 각자 자신들이 생각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개념을 되새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승화가 침묵을 깨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박사님이 이야기하시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우리는 훈련이나 치료를 통해서 조금씩 가져갈 수는 있어도 과거 인간들보다는 많이 퇴화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여기 있는 사람들은 적어도 호기심이나 그 호기심을 충족시켰을 때 갖는 기쁨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시스템을 원하는 것은 박사님과 같은 생각에서 출발합니다. 사람이 시스템보다 의사결정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그중 하나가 박사님이 갖고 계신 중앙정부 시스템의 의사결정 로직에 대한 개발자와 관련된 자료들을 연구해서 인간 스스로가 의사결정에 더 관여하도록 시스템을 바꾸는 것입니다.”
세 사람은 너무 진지하게 라디오에서 나오는 박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토론을 하느라 시간이 가는 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반대편에서 이야기하는 박사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처음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도 의견이 잘 통하니 오랜만에 즐거움이 느껴집니다. 내 나이가 되면 모든 일이 항상 비슷해서 삶을 이어가는 동기가 부여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내가 좀 더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수염박사는 세명의 젊은이와 이야기가 만족스러운 듯이 편안한 목소리로 자신의 기분을 거짓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신다니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
“아까 이야기한 기억 데이터를 비롯해서 중앙정부 시스템의 초기 데이터가 있어요. 데이터분석가나 통계학자가 있으면 쉽게 분석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동료 중에는 최고의 분석가와 응용수학자가 있습니다. 이름을 대면 다 알만한 사람들입니다. 자료는 최대한 빨리 분석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나면 현재의 시스템을 업그레이드시키거나 목적에 따라 최적화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그거 잘된 일이네요. 먼저 그 자료를 전해줄테디 분석이 끝나면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7.1
준호에게 연락을 해 온 것은 중앙정부 총리실의 비서 박진이었다. 중앙정부를 지휘하는 모든 부서의 가장 윗단에 총리가 있다면 그 총리의 바로 옆에는 박진 비서가 있었다. 비서는 총리에게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전달하고 그의 의사결정을 다시 모든 부서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가 비서라고 불리지만 중앙정부의 핵심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는 총리에게 들어가는 모든 정보와 총리의 의사결정의 중간에 그가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준호를 비롯해서 박진 비서의 실체를 직접 본 사람이 없었다. 어쩌면 박진비서는 총리와 중앙정부의 의사결정시스템을 보조하는 또 다른 인공지능 로봇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사람들 사이에서 퍼져있었다. 하지만 박진은 실체가 있는 사람이었다. 단지 그가 부모를 특정할 수 없는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일반인들과는 다르게 자라서 사람들과의 관계가 적었을 뿐이었다.
준호는 박진 비서가 직접 자신에게 연락을 해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박진 비서는 이미 많은 학습을 한 것 같이 여유로운 목소리로 준호에게 원하는 조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고 연락을 해왔다. 물론 협상의 차원이 아니라 원하는 조건을 정확히 알고 싶다는 차원이어서 중앙정부가 대응책을 이미 마련했다고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조건에 대해서 자세히 묻는 것은 반대의 대응책을 어느 정도 갖춰 낼 수도 있다는 거였다. “이건 총리나 각 부처의 장관이 시킨 일입니까? 아니면 박진 비서가 여러 가지 정보를 분석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나온 것일까요?” 준호는 박진 비서의 메시지를 받자마자 승화를 통해 수염박사에게 자신의 의문을 전달했다.
준호를 돕고 있는 통계학자와 응용 수학자는 각각 중국과 프랑스의 정부에서 일하는 정보분석 전문가였다. 그들의 중앙정부의 의사결정 시스템도 우리나라와 같은 인공지능 엔진을 사용하고 있었다. 준호가 그들에게도 박진 비서의 메시지를 보여줬으나 그들은 모두 인공지능을 통하기 전에 박진비서의 머리에서 나온 질문이라고 답해주었다. 그 근거는 그들이 인공지능에 준호의 제안을 넣어보니 대답은 아직 관련된 데이터가 적어서 답을 하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아웃풋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백 년 전에 이미 국가나 기업 또는 인간 사이에서도 모두 정해진 한계 안에서 상호 이익관계로만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준호가 제시한 제안의 내용처럼 서로 대립관계가 되는 조건에 대한 협상은 인공지능이 학습하지 않은 새로운 영역 일 수밖에 없었다. 준호는 박진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머리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들었다. 어쩌면 박진이라면 중앙정부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금방 교육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는 쉽게 중앙정부에 유리한 협상조건을 제시하고 협상을 얻어 낼 생각이었는데 생각지 못한 장애물이 생긴 셈이었다. 하지만 그 장애물이 누군지 알게 된 것은 하나의 수확이었다. 장애물을 처리하던가 아니면 같은 파트너로 만드는 것이 이제 준호의 목표였다. 준호는 만약 수염박사가 정말 중앙정부에서 일했던 고위직의 은퇴자라면 박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고 그의 메시지를 보고 좋은 충고를 줄 것으로 기대했다. 준호는 박진 비서에게 답을 보내기 전에 수염박사로부터 답을 얻고 싶었다. 수염박사는 준호의 마음을 알고 있는 듯이 바로 승화를 통해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 라디오를 통해서 같이 이야기하고 싶다고 전했다.
승화는 준호에게 송수신기의 주파수를 맞추는 법을 알려주었다. 준호는 승화가 두고 간 라디오 송수신기를 어색하게 만지면서 승화를 향해서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이렇게 스크린을 띄워서 이야기하면 좋지 않을까? 어차피 우리만 쓰는 인공위성의 네트워크라 보안이 위험하지도 않은데 이렇게 라디오를 굳이 써야 하다니. 아날로그 인간.” “ 단순히 보안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옛날 물건을 좋아하는 취미가 있으신 것 같던데요.” 그들이 이야기하는 사이에 주파수가 맞춰졌는지 반대편에서 수염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음에는 좀 더 편한 매체를 통해 이야기하도록 하죠. 하하” 수염박사가 준호와 승화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그들의 대화에 참견을 했다. “아, 연결이 잘되었군요. 그럼 저는 이만 일하러 가보겠습니다. 두 분이 이야기하세요.” 승화는 인사를 하고 바로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박사님, 제가 라디오 송수신기는 익숙지가 않아서요. 하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면 잘되겠지요.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에게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물어보니 저도 감사합니다. 마침 박진비서는 제가 잘 아는 사람 중의 한 명이라서 바로 연락을 드린 겁니다.” “박사님께서 박진이라는 사람을 잘 아십니까?” “중앙정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에 제 세대들은 그를 잘 알지요. 그는 어릴 적에는 우리에게 교육을 받았고 그 후에는 총리의 비서로 계속 일해 왔으니까요.” “그렇다면 박사님께 바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제가 그 사람의 메시지를 본 순간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이 의사결정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이 맞나요?”
수염박사는 잠시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것은 뭔가 재미있어서 나는 웃음이 아니라 잠시 시간을 벌거나 당황스러움을 면하기 위한 웃음으로 들렸다. “김준호 박사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박진이라는 사람은 아이큐가 200이 넘는 천재입니다. 1급 시민들 중에서도 상위 0.01프로의 뛰어난 지능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많은 학습을 시켜서 다방면에 지식이 뛰어납니다. 그는 스스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의 범위 내에서는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은 의사결정을 할 수 없습니다.” 준호는 너무나 당연한 수염박사의 설명을 듣고 뭔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박사님, 그렇다면 그가 보낸 메시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저에게 다시 저의 협상 조건을 물어 온 것이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의 되묻는 행동은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설명하자면 긴데, 그는 감정을 잘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뛰어난 지능을 갖고 방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맞지만 일반 1급보다 뛰어난 것은 감정을 잘 다룬다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그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그는 감정을 잘 다스리고 사용하는 사람이란 것입니다.”
준호는 잠시 생각을 하느라고 침묵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침묵이 계속되자 반대편 수염박사가 준호에게 물었다. “박사님의 말씀으로 유추해 보자면 그가 우리에게 혼돈을 주려고 그런 메시지를 보낸 건가요?” “네, 맞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는 박진은 지금 우리 안에 본능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다듬어진 이성과 논리로만 살아왔지만 잠재된 본능 안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있습니다. 그게 발현되지 않고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다룰 줄 모릅니다. 박진은 지금 김준호 박사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를 일깨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 준호는 다시 조용히 생각에 잠긴 듯이 눈을 감고 의자의 등에 머리를 기댔다. 몇 분 간의 침묵이 흘렀다. “저는 더 많이 학습되어야만 풀 수 있는 제안을 던지고 나름 승리자인 듯 만족하고 있었는데. 그는 제가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일깨워서 저를 흔들고 있었군요. 앞으로는 박진을 상대하려면 감정을 좀 더 연구해야 하겠군요. 박사님의 오늘 조언은 저에게 너무나 중요한 것을 알려줬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이야기가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만약 감정에 대해서 훈련을 받고자 하면 유명한 의사들이 많지만 저는 김수지박사를 추천합니다.” “혹시 김수지박사라면 김수미박사의 쌍둥이 언니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알겠습니다. 제가 또 연락드릴 때는 직접 연락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연락을 드리면 될까요?” “가상공간의 중앙 도서관에 오면 언제든지 저를 볼 수 있습니다. 주로 3층의 세계역사 구역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수염 난 흰가운을 입은 박사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준호의 대답과 동시에 라디오의 상대편에서는 이미 주파수를 끄고 나갔는지 전파 소음만이 들려왔다.
7.2
준호는 뇌 수술을 받기 전까지 사용하던 자신의 메신저로 박진 비서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까지 그를 신원미상의 제4 구역 거주자로 분류하던 중앙정부는 앞으로 3년 전 행방불명된 김준호박사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준호가 전면에 자신을 드러내기로 한 것은 이제 그도 물러 설 곳이 없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제 중앙정부의 규칙을 어기고 새로운 시도를 하는 불손한 1급 시민으로 태그 되어 그의 모든 움직임은 디지털 정보로 남겨질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언제든지 중앙정부로부터 추적되어 그의 자유가 박탈당할 수 있었다. “너무 성급하게 자신을 드러낸 것 아닌가요? 아직 준비가 완벽하지 않은데.” 그의 옆에 있던 제니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상대는 제가 누군지 알고 있는데 시간을 끌면 우리가 불리합니다. 일단 중앙정부의 누구든 우리와 협상을 하기 위해 나오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내일까지 같이 토론하자고 제안을 했으니 그들이 나올 겁니다. 총리가 나오던지 비서가 나오던지 아니면 각 부서의 장관이 모두 나오던지 하겠죠. 제니스는 제3 구역의 우리 인구증가에 집중해 주세요. 협상이 결렬돼도 우리는 제4 구역과 제3 구역 그리고 해저도시까지 차지할 생각입니다.” “그럼 드디어 중앙정부의 경찰시스템에 대한 해킹에 성공한 건가요?” “그건 아직 하지 못했으나 그들이 동원 가능한 모든 전력 시스템에 대해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우리는 에너지차단과 그로 인한 로봇 시스템의 무력화를 시행할 겁니다. 이 전략으로 가장 피해를 입게 되는 곳은 감시와 통제를 하는 경찰시스템이 가장 많은 제3 구역과 공기순환 시스템에 의지하는 해저도시입니다.”
제니스가 돌아가고 얼마동안 준호는 자리에 앉아서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에 대한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있었다. 그때 준호의 노트북에 있던 메신저가 불을 반짝였다. 그가 박진비서에게 메시지를 보낸 지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박진 비서는 그에게 화상회의를 신청해 왔다. 준호는 바로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자리에 어깨를 펴고 똑바로 앉았다. 잠시 후 회의실의 화면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얼굴이 작고 하얀 소년이었다. “박진비서님, 벌써 회의를 요청하는군요. 우리의 예상보다 항상 한발 빠르게 대응하네요. 반갑습니다. 김준호입니다.” 준호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그 소년을 보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박진입니다. 제가 아는 김준호 박사가 맞군요. 오늘 보내신 메시지를 보고 너무 반가워서 바로 회의를 요청한 겁니다.” 상대의 목소리는 어리고 가늘어서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될 정도였다. “저를 만난 사람들은 모두 처음에는 당황합니다. 제가 너무 어려 보여서요. 하지만 저는 이래 봬도 29살입니다.” 박진비서는 그렇게 말하고 큰소리로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의 웃음소리는 아이가 웃는 소리처럼 높은음이었다. 준호는 그 웃음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자, 이제 그만 웃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시죠. 제가 한 제안에 대해서 검토를 하셨나요. 저는 처음에 보낸 그대로 같은 제안을 오늘 다시 보냈습니다. 중앙정부의 입장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오늘 회의 이후의 결과에 따라 제4 구역과 제3 구역에서 나가는 모든 식량과 에너지가 중단될 것입니다.”
박진 비서는 웃음을 멈췄다. 그러나 준호가 말을 마치자 다시 그 높은 음의 웃음을 웃었다. 준호는 잠자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제가 웃느라 시간을 빼앗아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김준호 박사님, 제안에 대한 답은 잠시 후에 하기로 하고 제가 알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제가 아는 김준호 박사님은 유전자분석과 개발의 권위자로 호미니드의 창업자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일상이탈자로 전락하신 건가요?” 준호는 박진 비서가 선택한 단어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는 김준호입니다. 지금이나 과거나 같은 사람입니다. 단지 제가 달라진 것은 회사를 운영하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준호의 대답에 박진비서는 또 큰소리로 웃었다. 그는 마치 웃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 같았다. “아시겠지만 이제 김준호 박사님은 1급 시민도 아니고 자유를 누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전까지는 행방불명자였지만 지금은 중앙정부의 권위에 도전하여 조직의 규칙을 어기고 일상을 이탈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보는 김준호 박사의 신분은 일상이탈자이고 게다가 중앙정부에 대항하여 우리가 지켜온 식량과 에너지의 공급을 위태롭게 하는 테러리스트입니다. 하지만 중앙정부는 평화와 인류애를 기본으로 박사님의 제안을 검토해 볼 것을 알려드립니다. 정확히 48시간 후에 제안해 주신 조건에 대해서 중앙정부의 입장을 갖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만약 그동안 다시 1급 시민 김준호로 돌아가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중앙정부는 최대한 박사님을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하도록 도와드릴 것입니다. 오늘 미팅은 이걸 먼저 제안하려고 한 것입니다.” 박진비서는 말을 마치고 준호에게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준호는 그가 사라지고 스크린에 자신의 얼굴만이 크게 나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새삼 많이 늙어 보였다.
수염박사의 말대로 박진비서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준호는 그가 1급 시민에서 일상이탈자가 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박진비서에게 듣자 새삼 서글픈 감정이 들었다. 준호는 과거를 회상했다. 그의 삶은 뇌종양이 걸리기 전까지는 평화로운 삶이었다. 급진적인 변화는 뇌종양이 걸려서 죽음을 선택해야만 했을 때부터였다. 그가 죽음에 순응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삶을 이어가고자 결심한 것은 하고 있던 연구를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욕심을 내서 살아남아야 했다. 물론 그가 욕심을 낸 것은 자신의 생명일 뿐이었지만 그 욕심을 채우기 위한 방법들은 모두 불법적인 일들이었다. 그러나 준호가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그것은 욕심도 아니고 불법적인 일도 아니었다.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고? 그건 내가 아니라 김준호라는 1급 시민으로 돌아가는 일이지.” 준호는 자신에게 말하듯이 큰 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김수미박사를 연결해 줘요.” 준호의 스크린에는 김수미 박사와 준호의 얼굴이 반반씩 나왔다. “갑자기 회의를 요청하고. 무슨 급한 일이 있나요?” “ 방금 내가 박진 비서란 사람하고 짧게 회의를 했어요. 내 기억을 찾아보시겠어요. 내가 말하는 것보다 그게 빠를 것 같은데요.” 준호의 이야기를 듣고 김수미 박사는 반대편에서 잠시 사라졌다. 오분쯤 후에 다시 스크린에 김수미 박사가 나타났다. “박진, 그 사람은 역시 뇌가 늙지 않는 사람인가 봅니다. 외모가 아직도 십 대 소년처럼 보이니 말이에요. 저도 몇 년 전에 행사에서 언뜻 본 것 같은데 그때와 똑같더군요.” “아무래도 그 사람은 감정을 흔들어서 내 이성적인 판단이나 전략을 무력화시키려고 하는 것 같아요. 감정체험 클리닉의 김수지박사에게 감정체험을 받게 해 주면 안 될까요? 그러면 아무래도 지금보다는 유연하게 잘 대처할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