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6.2
6.0
“제4 구역에 점점 늘어나는 변종 침팬지에 대해서 중앙정부가 아직까지 어떤 대응도 안 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네요.” 이수현 경감은 제이의 푸념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모니터에 나오는 중앙정부의 발표를 듣고 있었다. “앞으로 정부는 글로벌 중앙정부와의 협업을 통해서 조사를 실시할 계획입니다. 오늘 조사단 일부가 입국했고 나머지 조사단도 모두 합류하면 조사가 이번주 내로 시작될 것입니다.” 모니터에서는 계속 뉴스가 흘러나왔다.
이수현 경감은 더 들을 필요가 없다는 듯이 컴퓨터를 끄고 제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요즘 회사는 잘 돼 가고 있어요? 아버지를 만났는데 걱정이 있으신 거 같았어요. 저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하시더군요.” 제이는 이수현 경감의 이야기는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이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보면서 답했다. “아버지를 만나셨어요? 하긴 갑자기 집에 오신다기에 무슨 용건이 있는 걸로 짐작은 했어요. 아버지가 저에 대해서 걱정을 하시던가요? 어떤 문제든 그게 경감님하고 의논할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요.” “우리가 같이 다니는걸 눈치 채신 것 같아요. 앞으로 같이 다니지 말라고 하더군요.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아서 저도 정확히 어디까지 아시는지는 모르겠으나 할 수 있다면 어떤 정보든 다 수집하실 수 있는 분이니 앞으로 얼마간이라도 우리가 같이 윤이 씨를 만나는 것은 중단해야 할 것 같아요.” 제이는 이수현 경감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제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에 잠겼다. “저와 경감님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1급 시민이고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냥 하시는 이야기일 겁니다. 제가 가끔 경감님 만난다고 유미에게 이야기한 걸 들으셨을 겁니다. 구체적인 건 모르실 거예요.”
제이는 아버지가 자신의 행적을 추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윤이를 만나는 것을 아버지가 알더라도 막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디든 자유롭게 다닌다고 그게 다 허용된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간접적으로 우리가 어디를 다니는지 알고 경고하신 걸로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제가 좀 더 알아볼 테니 당분간 서로 안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수현 경감은 확신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았다. 제이는 자신의 아버지가 대를 이어서 중앙정부에서 모든 정보를 관리하는 자리에 책임자로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정보의 분산이나 정보의 개인화를 누구보다 반대하고 그를 위해 평생 일했던 사람이었다. “흠, 일단 경감님 의견을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와 대립각을 세울 필요는 없으니까요. 저도 아버지를 만나서 윤이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솔직하게 할 기회를 놓친 게 아쉽네요. 윤이를 처음 만난 지 벌써 삼년이 지났으니.” 제이는 김준호 박사를 찾다가 제3 구역에서 윤이를 만났다.
“아버지에게 윤이를 만난 일 말고 김준호박사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신종 침팬지와 관련된 일이 김준호 박사와 연관된 일인 것은 누구나 짐작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이수현 경감은 다소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리면서 제이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이는 그의 이런 표정과 말투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누구를 만나도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또한 지금 3구역에서 발견되는 신종 침팬지들은 정부의 식량자급자족을 위해서 이로운 일꾼입니다. 물론 그들은 중앙정부의 승인이 없이 존재하는 게 문제이지만. 우리 회사에서 그들의 유전자를 어렵게 구해서 지금 분석하고 있으니 좀 더 컨트롤이 쉬운 종으로 변종시킬 수 있는 백신을 만들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곧 중앙정부가 그 침팬지들의 컨트롤 타워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단지 과도기일 뿐이죠. 준호가 원하는 본인이 세상을 컨트롤하는 그런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겁니다.”
이수현 경감은 제이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리고 제이가 이야기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봐야겠어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김준호박사가 계획한 대로 더 많은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좀 더 조사해 보고 필요하면 연락하겠습니다.” 제이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끔 집에 놀러 오세요. 회사에 놀러 오셔도 좋고요.” 제이가 악수를 청하자 이수현경감도 제이의 손을 잡았다. “잘지내고 와이프한테도 안부 전해줘요.” “네, 조심해서 가세요.” 제이는 이수현 경감을 위해서 현관문을 열어주고 배웅했다. 제이는 닫힌 현관문 앞에 그대로 서서 멀리 사라지는 이수현 경감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지난 몇 년간 같이 보낸 시간들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제이는 무엇 때문인지 이수현 경감과 공통된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이 마음이 놓였다. 그날밤 제이가 씁쓸한 감정을 느끼면서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을 때 이수현 경감으로부터 의외의 메시지가 왔다. “내일 다시 오늘과 같은 시간에 집에서 볼 수 있을까요?” 무슨 용건인지 모르지만 몇 시간 만에 이수현경감은 제이에게 다시 보자고 연락을 했다. 제이는 가능하다고 답변을 하면서 궁금하지만 용건은 묻지 않았다.
유미는 이수현 경감이 제이를 만나러 자기 집으로 온다는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요즘 자신이 기획한 해저도시의 새로운 리뉴얼 프로젝트 때문에 온통 그것만 신경 쓰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와 같이 저녁을 먹고 자기 서재로 들어갔다. 잠시 후 이수현 경감이 왔다. 그의 표정은 뭔가 들떠 보였다. 제이는 그런 표정의 그를 본 적이 없었다. “경감님,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신 건가요?” 이 수현 경감은 제이를 보면서 손을 내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우선 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제이는 이수현 경감을 데리고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 “마음대로 쓰세요.” 제이가 책상 위의 컴퓨터를 가리키며 이수현 경감에게 말했다. “내가 어젯밤에 받은 메시지가 있어요. 같이 보면서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이수현 경감은 모니터 화면에 자신이 받은 메시지를 띄웠다. 잠시 후 제이는 그 메시지를 다 읽고 이 수현 경감을 바라보았다. “이건 준호가 보낸 건가요? 아니면 그냥 준호의 아이디를 사칭한 자가 보낸 건가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김준호 박사가 사라진 지 삼 년이 지나서 메시지를 보냈다는 게 중요하죠. 그리고 그 메시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제4 구역에서 나는 모든 식량을 지금처럼 차질 없이 공급받기 원하면 앞으로 자신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겁니다.” 메시지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제4 구역은 모든 식량의 원천이 되는 곳이고 그곳은 당연히 중앙정부의 관리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이 메시지는 경감님한테 보낸 건가요?” “아니, 우리 중앙정부의 메인 컴퓨터에 뿌려진 거예요. 거기 그 시간에 접속한 정부 직원들은 모두 받았어요.”
“지금 중앙정부는 이에 대해서 대책을 논의할 겁니다. 이 메시지를 본 사람들이 많으니 이 내용도 곧 뉴스에 나올 겁니다. 그래서 내가 제이에게 의논하고 싶은 게 있어요.” 이수현 경감은 제이를 쳐다보았다. 제이는 계속 이야기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윤이를 한번 만나러 제3 구역에 다시 가보지 않을래요? 제 생각에 윤이는 분명히 그냥 거기서 바텐더만 하고 있는 건 아닐 겁니다. 김준호 박사에 대해서 뭔가 더 알고 있을 겁니다. 어쩌면 같이 일을 하고 있을 수도 있지요.” 제이는 이수현 경감의 말이 반쯤은 맞는다고 생각했다. 윤이가 그냥 바텐더만 하면서 머물기에 윤이는 너무 많은 지적 호기심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어차피 정부차원에서 뭔가 조사를 하고 응대를 하고 있지 않을까요? 경감님과 제가 3년 전에 준호의 행방을 찾아다녔을 때 준호에 대해 알아낸 것은 하나도 없었죠. 준호는 뭔가 우리가 다가가도 다 피해 갈 수 있는 힘을 가진 것 같다고 느꼈었는데 지금은 더 진화하지 않았을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윤이를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차라리 윤이에게 솔직하게 물어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르죠. 내가 지금 김준호의 행방을 알고 싶은 것은 그의 계획이 무엇인지 들어보고 싶어서 일뿐이지 중앙정부를 대신해서가 아닙니다. ” 제이는 이수현 경감의 이야기에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혹시 경감님도 요즘 세계 곳곳에서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다는 탈 중앙화나 개인화에 관심이 있으신 건가요? 준호가 하려는 일이 탈 중앙화는 맞는 것 같지만 그건 다시 중앙화를 만들 겁니다. 역사에서 그건 반복되어 증명되었죠. 인간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결국 더 이상 권력 다툼이 없이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단일 중앙정부가 만들어진 거잖아요.”
“김준호는 단지 식량을 공급하는 제4 구역을 컨트롤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여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뭔가 그는 이 나라 아니 어쩌면 이 지구 전체의 시스템을 바꾸고 싶어 하는 느낌이 들어요. 이게 시작일 뿐이고 어쩌면 이미 보이지 않는 많은 일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계급의 철저한 분류와 계급 내 인구 조절을 통해서 큰 틀에서는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 맞지요. 그 큰 틀을 깨려는 움직임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것이고요.” 다소 이야기가 무거워졌다. 제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들을 이수현 경감이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당연하다고 여긴 계급별 인구조절이나 계급의 존재가 자유와 상충된다는 이야기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제한된 자원을 가진 제한된 공간에서 생존하기에 가장 최적의 인구를 유지하고 있고 저는 그것에 동의합니다. 경감님의 생각은 좀 더 생각해봐야 하겠지요. 과거 우리 조상들이 살던 지구는 제한되지 않은 많은 인구와 그들의 욕망으로 오염되고 심지어 서로 죽고 죽이는 살기 힘든 곳으로 전락한 적도 있었죠. 그걸 생각하면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과 분류하여 지역별로 인구를 조절하고 관리하는 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류의 존재 자체가 위협당하는데 등급을 나누고 인구를 조절하는 게 자유의 억압이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제이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요. 아무튼 윤이를 한번 더 만나보러 가려고 합니다. 같이 동행하시면 좋고 아니면 저라도 혼자 가야겠군요.”
6.1
“자, 이제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주사장은 정면으로 모니터가 놓여있는 회의실에 혼자 앉아서 화면을 보며 말했다. 대형 모니터에는 준호가 보였다. “곧 연락이 올 겁니다. 지금 외부로 나가는 식량의 운송과 관련된 로봇과 무인트럭이 모두 정지되었으니까요. 중앙에서 아무리 컨트롤하려고 해도 우리가 해놓은 제어명령이 모든 명령 순위의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먹통일 겁니다.” 준호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럼 우리는 대기하고 있으면 되나요? 나는 국제기구의 조사단이 올 때까지 걸리는 시간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겁니다. 그들은 무기를 갖고 올지도 몰라요. 그저 그런 우리가 아는 흔한 전기 충격기가 아니라 과거에 쓰던 대포나 폭탄 같은 대량살상 가능한 무기를 갖고 올지도 모른다고요. 우리가 그들을 막아낼 수 있을지 그게 불분명하니 요즘 통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주사장의 표정은 진지하고 그리고 어딘가 겁에 질려 보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로봇을 제어할 수 있고 그리고 힘을 가진 침팬지들이 있어요. 공장이나 농장 로봇이 필요에 따라 우리를 대신해서 싸워줄 겁니다. 이미 수없이 프로그램 테스트 결과를 같이 봤잖아요. 그리고 저는 그런 상황까지 절대 가지 않을 거라 확신합니다. 제가 단지 중앙정부의 식량과 자원에 대한 컨트롤 타워를 대신하겠다는 것만 분명히 한다면 합의로 끝날 겁니다. 국제기구는 테러집단에 대해서 과거 살상무기를 쓴 적은 있지만 우리와 같이 이익집단 특히 새로운 시도를 하는 집단에 대해 무력을 쓸 만큼 미련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침팬지들은 그들이 원하는 로봇대체 인력으로 손색이 없는데 굳이 협상을 안 할 리가 있을까요.” 준호의 눈은 빛났고 그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한층 더 건강해 보였다. “그럼, 걱정을 안 하겠지만. 그런데 다른 사람은 어디에 가고 혼자 계십니까?”
요즘 준호의 연구실에서 준호와 이영이 함께 지내고 있었다. 주사장은 회의실에서 이영이 안 보이는 것을 물어본 것이다. “이영 씨는 해저 터널과 이어지는 제2 연구소에 나가 있어요. 오늘 중요한 사람들이 오고 있거든요.” “아, 지난번에 제2연구소에 대해서 언뜻 들은 것도 같은데. 저도 요즘 기억이 흐려져서. 알겠습니다. 저는 여기서 제가 할 일을 하고 있겠습니다. 항상 대기하고 있을 테니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준호가 알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고 주사장의 화면에서 사라졌다. 주사장은 화면이 꺼진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의 나이도 60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몸에서 근육이 많이 빠져나갔듯이 뇌의 기능도 많이 떨어져서 전처럼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 그를 대신해서 클럽을 운영해 주는 사람은 제니스였다. 그러나 요즘 제니스도 준호가 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느라 바빴다. “사장님, 안에 계십니까? 손님이 사장님을 찾아왔어요.” 주사장이 멍하니 꺼진 모니터를 보고 있을 때 인터폰으로 로비의 직원이 메시지를 전했다. “예약 없이 와서 서비스를 받고 싶어서 나를 찾는 손님이면 그냥 받아줘.” “ 이수현 경감이라고 하는데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멍하니 있던 주사장의 눈이 반짝거렸다. “내 방으로 모시고 와요.”
이 수현 경감은 종업원을 따라 1층의 주사장의 방으로 안내받았다. 주 사장은 방문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경감님, 어서 오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우리 클럽은 통 안 오시고 윤이네 바만 자주 가시는 것 같더니 갑자기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주사장은 이수현경감이 방으로 들어와서 자리에 앉기까지 너스레를 떨면서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는 보시다시피 많이 늙었습니다. 클럽도 이제 예전 같지 않고. 최근 클럽들이 여러 개 더 생겨서 우리 클럽은 이제 과거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경감님은 좋은 곳에서 사셔서 그런지 늙지도 않고 그대로네요. 부럽습니다.” 주사장은 이수현 경감의 표정을 살폈다. 몇 년 만에 보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지만 얼굴도 그대로였고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도 그대로였다. “주사장님, 약속도 없이 느닷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오늘 그냥 한번 와보고 싶었어요. 여전히 활기차게 잘 지내시는 것 같아 반갑습니다.” “별말씀을요. 언제든지 찾아오셔도 됩니다. 이거밖에 없는데 한잔 드시겠어요?” 주사장은 이수현 경감 앞에 잔을 놓고 위스키 병을 들고 와서 따르려고 하고 있었다.
“몇백 년은 돼 보이는 귀한 술이군요. 저는 맛이나 보게 조금만 따라주세요. 원래 술을 안 마시지만 이렇게 귀한 술은 조금 맛을 봐야겠죠. 벌써 향이 아주 좋습니다.” 이 수현 경감의 말이 맞았다. 주사장이 들고 온 술은 백 년이 넘게 보관되었던 위스키로 주사장의 할아버지 때부터 오크통에 담겨서 저장되어 보관되어 오던 술이었다. “역시 경감님은 모르는 게 없으시군요. 이 술은 저희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귀한 위스키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위스키 원산지에서 직접 사들여서 지하 저장고에서 보관하고 있던 거지요. 저는 요즘 이것만 마셔죠. 다른 술은 이렇게 자연적으로 오랫동안 숙성시킨 술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요. 물론 이제는 이런 술의 맛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요.” 주사장은 나이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알코올에 조금 취해서였는지 이수현 경감이 앞에 있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혼자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향이 참 좋군요. 맛은 잘 모르겠네요. 근데 전에 같이 있던 직원들은 이제 안 보이네요. 제니스였던가?” 이수현 경감이 술을 한 모금 입에 대고 나서 앞에 앉아 있는 주사장에게 말했다. 주사장은 혼자 술잔을 잡고 홀짝 거리다가 이수현경감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아, 그 친구는 요즘 바빠요. 나 대신하는 일이 많아요. 다른 괜찮은 여자들은 많은데 다른 여자를 불러줄까요?” “아니요. 그럼 주사장에게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오늘 많이 취해 보이는군요.” 이수현 경감은 주사장이 다른 때와는 달리 정말로 술에 많이 취해서 대화할 수 없는 정도라고 느꼈다. “아, 맞다. 경감님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제가 깜빡했네요. 아무 여자하고 정자를 나눠 줄 수 있는 분이 아니죠. 아, 경감님은 어떤 타입의 여자를 좋아하시나요? 우리 클럽에서 오늘 한번 골라보세요.” 이수현 경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주사장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왜 벌써 가시려고요? 저랑 좀 더 있다가 가세요. 저도 이제 늙어서 외롭답니다. 여자들도 이제 늙은 남자에게는 오지 않거든요. 우리 구역에서 살아가는 법칙입니다. 늙은 수컷은 인기가 없어요. 아무리 좋은 술과 마약을 다 구해줘도 여자들은 젊은 남자를 좋아하죠.” 이수현경감은 주사장과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모니터에는 메시지가 왔다는 불빛이 반짝였다. 주사장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자리에 앉아서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이수현 경감은 주사장을 뒤로하고 방을 나왔다. 그는 잠시 긴 복도의 끝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홀 쪽을 바라보고 서있었다.
6.2
이 수현 경감은 주사장의 클럽을 나와 윤이의 바로 갔다. 걸어서 오분도 안 걸리는 짧은 거리였다. 그 짧은 거리를 걷는 동안 언뜻 이수현 경감은 누군가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눈빛을 느꼈다. 그는 두리번거리면서 주변을 살폈다. 환한 대낮이라서 그런지 거리에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주사장의 클럽 주차장에 있는 차도 이 수현 경감 차 밖에 없었다. 그는 윤이의 바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잠긴 문을 두드렸다. 바의 오픈 시간은 저녁 7시였고 지금은 겨우 오후 3시가 지난 시간이었다. 윤이가 문을 안 열어주면 그냥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안에서는 아무 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다. 이 수현경감은 인기척을 느끼고 재빨리 뒤돌아보았다. “여기 아직 오픈 안 했는데요?”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이영이었다.
“혹시 여기서 일하시나요?” “아니요. 하지만 이 바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여기 문에 쓰여있듯이 저녁 7시에 열고 그전에는 들어갈 수 없어요.” “그럼 혹시 여기서 일하는 바텐더를 만나려면 어디를 가야 할까요? 저는 윤이를 만나려고 왔습니다.” 이영은 이수현 경감을 쳐다보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우리 클럽에 왔을 때부터 유심히 봤어요. 전에도 한번 봤던 기억이 있었거든요. 지금 윤이는 여기 없어요. 다음에 오셔야 할 겁니다.” 이 수현경감은 이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녀가 조금 전 주클럽에서 입구의 안내를 담당하던 직원이란 걸 알아차렸다. “아, 그렇군요. 윤이에 대해 잘 아시는 것 같은데 친구인가요? 혹시 지금 윤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이영은 그의 말을 듣더니 잠겨 있는 바의 문을 열었다. “일단 여기 먼저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제가 어디 있는지 알아보고 다시 올게요.” 이 수현 경감이 주춤거리고 있자 그녀는 다시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바에 들어가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영은 이수현 경감을 놔두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이 수현 경감이 조심스럽게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자 밑으로 내려갈수록 바에서는 특유의 알코올 쩌든 냄새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이수현경감은 잠시 어지러움을 느꼈다. 아마도 아까 주사장이 건네준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것도 영향이 있는지 바에 찌든 알코올 냄새에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계단을 다 내려갈 때쯤 이수현 경감은 발을 헛디뎌서 계단으로 굴러 넘어졌다. 순간 그는 바의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면서 정신을 잃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윤이가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정신을 잃은 건가요?” 그는 일어나려고 침대에 손을 잡고 허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온몸에서 통증이 몰려와 비명이 저절로 나왔다. “아, 온몸이 너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어요.” “넘어지면서 다친 것 같은데 병원으로 가셔야 할 것 같아요. 혼자 일어설 수가 없으면 차를 운전하실 수도 없을 텐데. 위치관리가 기록되지 않도록 자가주행으로 운행하실 테고. 지금 당장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조금 기다려보시죠. 제가 아는 의사분에게 원격진료라도 의뢰해 보겠습니다.”
이 수현 경감은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다리와 팔을 움직여 보았다. 모두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넘어지면서 오른쪽 발목을 다쳤는지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얼마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나요?” “그리 길지 않아요. 이영 씨가 금방 발견해서 제 침대로 옮겼고 넘어지고 나서 지금까지 두 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아마 잠이 드신 것은 알코올 영향이 더 클 겁니다.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는 사람이 알코올을 마시면 졸음이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여기 의사에게 진료를 받는 건 기록에 남을 겁니다. 혹시 주사장에게 진통제 같은 약을 구 할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기록에 남지 않도록 주사장님과 친분 있는 의사를 연결하겠습니다. 여기는 제3지대이고 온갖 불법을 자행하는 3급 사람들이 모여 살지요. 그런데 그게 의외로 편할 때도 있답니다.” 윤이는 그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웃으면서 말했다.
이 수현 경감이 의사의 진료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모니터를 통해 그를 진료하는 의사를 쳐다보았다. “입체 사진으로 보면 다행히 뼈의 골절은 보이지 않습니다. 단순한 타박상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통제를 맞고 쉬시면 나을 겁니다.” 의사는 말을 짧게 하고 서둘러 화면을 껐다. 아마도 이수현경감에게 신분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수현 경감도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고 싶지 않았다. “진통제는 주사장님이 갖다 주실 겁니다. 아니면 그냥 어떻게 조금 움직여서 차를 운전하고 돌아가시겠어요?” 윤이는 이 수현경감을 걱정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물었다. 혼자 아픈 몸을 이끌고 차를 운전해서 돌아가는 것이 걱정되기는 이수현경감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자율주행을 시행하기에는 자신의 위치가 중앙정부에 기록되기에 꺼려졌다. “불편하긴 하지만 그래도 해봐야지요. 정 안되면 자율주행으로 가면 됩니다.” 그는 아까보다는 그래도 한결 머리가 맑아졌는지 표정은 밝았다. “그런데 진통제를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처음 깨어났을 때보다는 아프지만 그래도 골절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그냥 움직여도 될 것 같습니다. 참을만하니 그냥 가야겠어요.” 이 수현 경감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럼 제가 주차장까지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윤이는 이수현 경감의 팔을 잡고 천천히 걸었다. “이렇게 걷다가 주차장까지 가는데 날이 새겠네요.” 그들 앞에 주사장이 언제 왔는지 나타나서 말을 건넸다. “제가 괜히 아까 술을 권한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제 등에 업히세요. 제가 주차장까지 모시겠습니다.”
주사장이 이수현 경감을 업고 윤이가 뒤를 받치면서 주차장까지 오는데 세명 다 온몸에 땀이 났다. “정말 혼자 운전을 하실 수 있나요?” 주사장이 차 앞에 이수현경감을 내리면서 물었다. “제가 운전할까요?” 윤이의 뜻밖의 제안에 이수현경감은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진심이세요? 제1 구역을 떠나서 십 년 동안 가지 않던 분이 저를 위해서 다시 가시겠다는 건가요?” “네” 윤이는 짧게 대답하고 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뒤에 타세요.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돌아올 때는 어떻게 하려고요?” “다시 경감님과 오면 되겠죠. 며칠 내로 완쾌되시면 저를 다시 데려다주실 거죠? 아니면 좀 귀찮지만 걸어서 와야겠죠.” 윤이의 제안에 크게 당황한 건 이수현 경감이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윤이 씨의 호의를 무시해서는 안 되겠죠. 그럼 주사장님 조만간 또 뵙겠습니다. ” 이수현 경감은 차의 뒷좌석에 탔고 문이 닫혔다. “주사장님 며칠 내로 돌아오겠습니다. 이영 씨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그럼.” 윤이는 주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운전석에 올랐다. 주사장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클럽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차가 움직이자 뒤에서 이수현경감이 윤이에게 물었다. “나를 데려다준다는 것은 핑계일 뿐 뭔가 제1 구역에 가야 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맞지요? 무슨 이유인지 이제 저와 윤이 씨 단둘이 있으니 이야기해보시죠. 제이를 만나러 가려는 겁니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겁니까?”